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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에 의지해 고독 이겨낸 조선의 어머니

기자명 법보신문

20. 의인왕후 박씨

전국 명산대찰에 원찰 설치해 아들 낳기 발원

후덕하고 인자해 ‘살아있는 관음보살’ 추앙도


만약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역사에는 if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지만, 의인왕후 사후에 벌어지는 조선왕조의 비극 앞에서 후대인들은 한번쯤 이 같은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 신분으로 의병을 모집해 선조의 의주 피난으로 추락한 조선왕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즉위 후에는 중립외교를 통해 청·명과의 외교에도 성공하는 등 조선의 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연산군이 온갖 폭정을 일삼은 데 비해 정치적으로 유능한 광해군의 폐위 명분은 유교적인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뜨거운 방에서 태워 죽이는 강상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후궁에게서 배출된 왕자 즉 서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영창대군은 비록 후실이나마 왕비의 아들이었다. 종법 질서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조선시대에 그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미 선조가 살아있을 때부터 폐세자가 거론될 정도로 그의 위치는 불안했다.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신분적 콤플렉스는 그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 했고, 이는 결국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부메랑이 되었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몰려 쫓겨난 것도, 인목대비가 어린 아들을 잃고 평생 피눈물을 흘리고 살아야 했던 것도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의인왕후가 선조의 대통을 이어나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다. 한 나라의 국모인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고난했을까.

의인왕후의 삶은 평생을 고독과 벗했다 할 정도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었다.

열다섯의 나이로 선조의 비로 간택되었을 때 이미 선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소주방 나인 출신의 공빈 김씨였다. 선조의 첫아들인 임해군과 둘째 아들을 선사한 이 또한 공빈 김씨였다. 광해군을 낳은 지 얼마 안돼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의 사랑은 인빈 김씨에게로 옮겨갔다. 그녀는 왕자 셋과 옹주 하나를 낳았다.

이처럼 후궁들이 연달아 아들을 낳는 상황에서 의인왕후는 공주 하나도 낳지 못했으니, 그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온갖 약을 써도 소용이 없고, 수많은 명의에게 처방을 받아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의지처는 부처님 밖에 없었고, 자신의 절망을 위로받을 곳도 부처님 밖에 없었다.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궁중의 여인들은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그녀가 관세음보살이라 불린 것은 단순히 그녀가 불교를 열심히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궁들이나, 후궁들의 자식, 나이 어린 여종에게까지 후덕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대했고, 그 사랑에 치우침이 없었다.

의인왕후는 또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어미가 버젓이 살아있는 후궁의 자식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은 의인왕후라는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직후 의인왕후의 존호에 정헌(貞憲)을 추가하여 올린 것은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녀는 어린 임해군과 광해군에게 각별한 정성을 쏟았지만 선조의 다른 소생들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이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의인왕후는 성품이 온화하여 궁궐 나인이나 무수리에게도 한반도 화를 내어 꾸짖는 법이 없었으며, 선조의 후궁들에 대해 평생 투기한 적이 없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왕비였으나 그 부드러운 권위로 인해 조선왕실은 짧으나마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는 물론 왕비의 인내와 눈물, 희생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 후덕한 여인은 왕실의 안주인으로서 존경은 받았을지언정 평생토록 지아비의 사랑은 받을 수가 없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의주로 피난을 떠날 당시 의인왕후 대신 인빈 김씨를 데리고 떠났다. 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홀로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갔다. 이후 한양이 수복된 후에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갔지만 의인왕후는 여전히 해주에 머물고 있었다. 정유재란 때 선조는 또다시 피난을 떠났는데 이때도 인빈 김씨를 데리고 떠났고, 의인왕후는 세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자신이 엄연한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이같은 홀대를 받은 것은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조선왕실에 있어서 왕의 여인은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따라서 왕통을 계승할 왕자를 낳는 순서에 따라 그들의 서열 또한 정해지기 마련이었다. 왕이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세명의 아들을 배출한 후궁이었고, 정실 왕비를 데리고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녀는 160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마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선조의 칭송이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선조의 말 속에는 그녀의 희생 속에서 왕실 내명부가 별 잡음 없이 평화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선조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쩌면 광해군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그를 보호해줄 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의인왕후가 커다란 치마폭으로 어미 잃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주었지만, 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 이상 그를 보호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 박복한 여인은 조선왕통을 이어나갈 아들도 낳지 못했고, 자신이 친아들처럼 키운 광해군을 조선의 명군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왕조를 지탱시킨 모태였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스스로 서있는 자리를 밝히고, 어미 잃은 자식들을 거두어 들였던 그 자애로움이야말로 그녀가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왕실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인간의 역사를 이루어온 가장 큰 힘이었고, 또한 한국불교를 살려낸 커다란 젖줄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부처님 앞에서 자식의 안녕을 발원한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 자식 앞길에 성공대로가 열리게 해달라는 기복적 신앙은 어쩌면 붓다가 전한 법과는 거리가 먼 대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고 사랑하고 발원하는 마음이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이루는 근간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누구나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연모의 대상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불교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간절한 발원과 기도. 그 거대한 에너지야말로 이 우주를 탄생시킨 가장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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