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35. 마음②-‘혜성가’
[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35. 마음②-‘혜성가’
  • 법보신문
  • 승인 2007.12.0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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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 벗어던지니 달빛 아래 진리 드러나
<사진설명>마음은 물질이나 육체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성과 속, 과거와 현재, 물질과 이성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김수웅 회원 작 ‘백련풍경’.

‘달’등장시켜 과거-현재 역사 융합
마음으로 하늘 해석한 ‘깨달은 이’


융천사는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처럼 해석을 바꾸어 혼란을 질서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 해석을 의심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면 이것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초구에서 이와 똑같은 문장구조로 “옛날에도 신기루를, 그것도 신라를 지켜주는 의미를 갖는 건달파성을 왜구의 선단으로 착각하여 온통 신라가 난리를 치지 않았느냐, 마찬가지로 지금 길쓸별인 저 별을 흉조의 혜성으로 착각하여 온 신라가 불안해하지만 실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인 초구가 오늘의 사건인 승구의 일을 해석하는 전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구(3연)는 이를 다시 종합하고 있다. 달이 초구와 전구의 현실 위에 떠오르고 있다. 달은 두 현실 위에 떠서 둘을 무화하고 융섭시키고 있다. 달은 문맥상 건달파성과 길쓸별을 다 받고 있다. 초구와 전구는 결구로 종합되고 있으며, 달은 초구와 전구를 매개하고 있다. 따라서 달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공간적으로는 천상계(길쓸별, 부처, 세계)와 지상계(건달파성, 인간, 자아), 의미상으로는 이상과 현실을 매개하고 있다. 절대적 천상의 의미를 갖는 달이 떠 있으며, 더구나 그 달은 화랑이 가는 길을 비추며 화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달이다.

해석 바꿔 나라를 구하다

그러니 혜성이든, 일본병의 침입이든 세계의 분열상은 모두 달 아래 떠가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아, 아! 달 아래 떠가버리더라.”라고 진술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달 아래 모든 무질서는 무화되고 융섭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일본의 천문학자 요시다 세이치(吉田誠一)의 공식과 궤도에 대입하면, 진평왕 9년인 587년에 프랑스의 쟝 퐁, 피랑쥬 강바르, 아돌퓨 강바르가 발견한 퐁-강바르(Pons-Gambart)라는 혜성이 출현하였으며, 이 혜성은 최고로 밝을 땐 2등성으로 빛나므로 맨눈으로 관측이 가능하나 이것은 남반구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일본을 중심으로 할 경우 8월에 3등성, 9월에 4등성으로 빛나 8, 9월에 맨눈으로 관측이 가능하다. 즉 당시 나타났던 혜성은 4등성에 불과하므로 보름달이 뜨면 지구상에서 관측이 되지 않는다. 곧 사라진다. 이러니 무질서나 재앙을 뜻하는 혜성의 기운조차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이에 어울릴 무슨 혜성의 기운이 있을고”는 자연스럽게 터진 발화다.

이처럼 융천사는 ‘혜성’을 ‘길쓸별’로 바꾸어 불러 신라를 구하고 결국 신라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장군이 원정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해가 사라지고 캄캄해졌다. 요즘말로 개기일식이 일어난 모양이다. 모든 장병들이 나서서 이것이 흉조라며 원정을 중지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장수는 동요하기는커녕 자신의 외투를 벗어 태양을 가리며 외쳤다.

“자, 여러분! 외투로 해를 가리면 어두운가, 밝은가?” 병사들은 “어둡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장수는 “외투로 가렸을 뿐이다. 우리는 원래대로 원정을 떠난다.”라고 외치고는 원정길을 서둘렀다. 결국 그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왜 똑같이 빈민굴에서 나서 자랐는데 누구는 히틀러가 되고 누구는 채플린이 되었는가?” 똑같이 빈민굴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한 사람은 채플린으로, 또 한 사람은 히틀러로 양자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자신이 맞은 가난이란 텍스트를 어떻게 읽었느냐의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갈랐다. 가난을 “박탈감”으로 읽은 아이는 비행 청소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난을 “복수심”으로 해독한 사람은 히틀러 같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난하면서도 누구보다 의연하고 정의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소년도 있다. 아주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가난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심연의 고통이나 의미에 다다르는 길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쯤으로 읽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떤 이보다 깊고 맑은 눈으로 가난한 이를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의 소외와 고독을 읽는다. 가난에 담긴 인류의 문제를 통찰한다. 가난의 뼈저린 고통 속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가난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러기에 인류를 구원한 위대한 사상과 예술, 과학 중 상당수의 걸작들을 이들 가난한 소년들, 혹은 가난에 필적할 만한 고통과 좌절을 겪었으나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이들이 창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마음으로 어떻게 읽었느냐의 차이가 삶을 바꾼다.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천상의 질서까지도 변화시킨다. 환경이나 조건이 운명과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거기 마음의 변화, 이에 따른 깊이 있는,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읽기가 있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넘어선다. 우리는 우리 앞의 텍스트를 읽는 만큼, 그 만큼의 세계를 형성한다.

불교에서 진여 실체에 이르려면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의 대상(萬有)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을 오온(五蘊)에서 벗어나 적멸(寂滅)의 경지로 이끌어야 한다. 진여 실체의 깨달음, 해탈은 오온을 해체하고 번뇌와 아집과 어리석음으로부터 풀려날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오온-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에 얽매이기에 이에 이르지 못한다. 색온은 오근(五根)-눈, 귀, 코, 혀, 몸-과 오경(五境)-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으로 이루어진 물질계를, 수온은 대상을 받아들여 즐겁거나(樂受), 괴롭거나(苦受),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捨受) 감각을, 상온은 대상에 대하여 옳고 그르며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개념의 정신작용을, 행온은 인연에 따라 이루어지고 행해지는 심리활동을, 식온은 대상을 분별하여 이해하는 인식 작용을 의미한다. 눈으로 본 혜성을 흉조로 본 신라인들이 오온에 휩싸인 자들이라면, 오온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그를 길쓸별로 보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그 마음에 따라 바꾼 융천사는 진정 깨달은 자다.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인

잘 알고 있듯,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가는 길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어느 집에 들러 바가지의 물을 달게 마시고 잠을 청한다.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집은 무덤이었고 바가지의 단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이를 알고 토하다 깨달음을 얻어 그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간다. 바가지의 단물로 보았을 때는 그리도 달던 물이 해골에 담긴 것으로 보자 토한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짓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원래 부처님과 같이 청정한 것인데 마음이 미혹함을 일으키어 삼라만상을 구별하고 허상을 보는 것이며 모든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마음에 있는 본래 부처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진여 그대로의 실상을 대할 수 있다. 마음에서 진과 속 등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융섭시켜 볼 때 진리는 피어나는 것이다.

마음은 물질이나 육체의 대립어가 아니라 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30대까지의 얼굴은 부모님 책임이지만 40대 이상의 얼굴은 본인의 책임이다. 자신이 마음에 따라 얼굴이 변하기 때문이다. 못 생겼어도 선한 마음을 품고 오랜 동안 살아온 이에게서 우리는 부처님과도 같은 선한 인상을 느낀다. 남산의 소나무는 설악산의 소나무와 다르다. 그들은 서울의 혼탁한 대기와 산성 토양 속에서 종족을 보존하려는 마음을 가졌고 이는 무수한 솔방울로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은 물질도, 유전자도 바꾼다. 원효의 말대로 “참으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이 일심(一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중심이면서 읽기의 주체이다. 원효는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본성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마음이란 모든 법(Dharma)이 의지하는 주인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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