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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편서 역사 속 인물을 찾아내다

기자명 법보신문

[베일벗은 천년사찰 북한산 삼천사지]2.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 이전에도 대지국사 명문 비편을 수습하여 소개한 자료는 몇 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조선 선조(宣祖)의 손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 1637~1693)가 편찬한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실명 여왕필(失名 麗王筆)’이라 표기한 삼천사비의 비양명(碑陽銘)편 3개와 ‘실명 삼천사 비음(失名 三川寺 碑陰)’이라 표기한 비음명(碑陰銘) 단편 2개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청나라 학자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편집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도 비양(碑陽) 파편 8개, 음기(陰記) 파편 8개가 필사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권(上卷)에서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체제를 준용하고 있다. 1965년 최순우(崔淳雨)의「삼각산 삼천사 대지국사비」 『미술자료(美術資料)』10에는 1964년 삼천사지 현지답사를 통해 수습된 자경(字徑) 2㎝의 비양편(碑陽片) 49개 399자와 자경(字徑) 3㎝의 비음편(碑陰片) 25개 115자가 아무런 순서 없이 번호대로 필사되어 있다.

섬세한 조각은 경이감마저

이 때 수습된 파편의 탁본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탁본첩으로 보관되어 있다. 1976년 황수영(黃壽永)편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에는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수습한 비편 중 비양(碑陽) 16개, 비음(碑陰) 8개를 싣고 있다. 1984년의 허흥식(許興植)편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과 1995년의 이지관(李智冠)편 『역대고승비문(歷代高僧碑文)』에도 실려 있는데 앞에 소개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상기한 자료들에 수록된 명문비편 탁본을 분석해 보면 고려시대 삼천사나 법경과 관련된 일련의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하나의 단문을 형성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파쇄 된 흔적만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편적인 고려시대의 관직명과 인물명, 불교용어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결된 문장이 아니기에 해석에 애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지국사 법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어 그의 생애나 행적에 대한 설명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역부족인 안타까운 면이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삼천사지 탑비구역 발굴조사과정에서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새로운 단서들을 찾는 행운이 잇따랐다. 수습된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명문비편은 모두 255점인데 630여 자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글자가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가로 또는 세로 괘선이 표현된 면석(面石) 비편도 수습되었다.

옅은 초록빛을 띠고 있는 각력암제 비신과 이를 받치고 있는 웅장한 귀부, 그리고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이무기를 머금은 이수의 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진설명>‘…瑜伽百軸文(유가백축문), 太賢心路章(태현심로장), 龍○寺(용○사)…’명(銘) 비양편(碑陽片, 右)과 탁본(上). 신라 법상종 승려 태현(太賢) 스님이 등장하는 대목으로 여말선초 법상종의 맥락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다.

먼저 가로 30.5㎝×세로 34.2㎝ 크기의 면석에 122자가 새겨진 비편을 살펴 보면 ‘…瑜伽百軸文(유가백축문), 太賢心路章(태현심로장), 龍○寺(용○사)…’와 같은 문구가 나온다. 이는 삼천사가 고려 전기 법상종의 사찰임을 증명하는 기사이다. 먼저 유가(瑜伽)라는 단어는 법상종의 용어이고, 유가론 100축문은 『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100권을 말하는 것으로 유가사지론은 법상종의 중심 경전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소재한 칠장사(七長寺)의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고려 문종 14년(1060)에 세워졌는데 비문의 내용에 ‘만행문중(萬行門中)에 구화(和)가 가장 중요하지만 성(性)과 상(相)이 함께 통하는 것은 십칠지(十七地)인 유가교문(瑜伽敎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종전에 의행(依行)하던 구화문(和門)을 버리고 이 유가수행문(瑜伽修行門)으로 나아가야 하겠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여기서 ‘십칠지’와 ‘유가교문’이라는 말에 주의해보면 십칠지는 불교 용어로 앞서 언급한『유가사지론(瑜伽師之論)』5분(分)의 처음 본지분(本地分)에 나오는 말이다. 유가사지론은 법상종의 중요한 경전이라고 했고, 유가교문은 법상종을 일컫기에 당연히 혜소국사는 당시 법상종의 승려이고 칠장사도 법상종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삼천사 역시 고려 전기 법상종의 사찰이며, 대지국사 법경 스님도 법상종의 승려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스님의 법명인 ‘법경’은 본래 법상종의 용어로서 6경(境)의 하나인 제6의식(意識)의 대상을 말하고 있어 법경이 법상종과의 관련으로 법명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현(太賢)’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는 신라의 승려로서, 태현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 인용된 주석서 『광석본모송석(廣釋本母頌釋)』을 말하는 것으로서, 물론 태현도 법상종의 승려이다.

<사진설명>‘…○十二僧臘八十五(○십이승랍팔십오)…’명(銘) 비양편(左). 고려 초기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세속 나이와 출신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이령간(李齡幹)’ 비양편(右). 비 앞면 처음 시작하는 부분으로 찬자(撰者)인 이영간과 서자(書者)로 추정되는 최홍검의 이름이 보인다.

또 다른 비편으로 가로 48㎝×세로 38㎝ 크기의 면석에 127자가 새겨진 비편인데 비문의 서(序) 마지막 단락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대지국사의 승랍(僧臘)과 세수(世數)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다. ‘…○十二僧臘八十五(○십이승랍팔십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대지국사 법경의 속세의 나이를 92세로 추정해본다면 적어도 7세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고서 정식으로 승려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出赤縣之郊(출적현지교)…’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적현은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임진, 장단 인근의 지명으로 법경의 출생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같은 비편 상에 나오는 ‘…弟子三川寺主首座珍岳(제자삼천사주수좌진악)…’이라는 대목을 통해 대지국사의 제자인 진악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다.

상기한 제문헌에서 언급된 대지국사비문의 찬자(撰者) 이영간의 이름을 처음으로 비편의 양면(陽面)과 음기(陰記)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중의 하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는 고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번 조사결과 비편에는 이령간(李齡幹)으로 음각되어 있음이 새롭게 밝혀져 기존의 조선시대 문헌의 표기와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대지국사 행장 첫 발견

<사진설명>‘이령간(李齡幹)’ 비음편(左). 비 뒷면의 일부분으로 비의 찬자인 이영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중희십(重熙十)’ 비양편(右) 탁본. 좌측에 보이는 세로 획선으로 보아 비 앞면의 제일 끝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비의 건립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더불어 이번에 수습된 음기 편에 나오는 ‘…紫金魚袋臣崔弘儉奉(자금어대신최홍검봉)’에서 ‘최홍검(崔弘儉)’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인물로서, 비문을 시작하는 비 앞면 우측 하단에, 비문을 지은 이영간의 바로 옆줄에 이름을 남기고 있어서 대지국사의 비문을 쓴 서자(書者)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최홍검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의 4품 이상 관헌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이 밖에 비 양면의 편에서 법경이 ‘대지(大智)’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智易名(○지역명)’이란 문구와, 관직명인 ‘기상시(騎常侍)’, ‘중승(中丞)’과 같은 단어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1032년 법경을 국사(國師)로 임명한 고려 제9대왕 ‘덕종(德宗)’을 표기한 것도 보이며 ‘천복(天福)’이란 단어가 새겨진 비편도 출토됐는데 이는 중국 후진(後晋)의 연호(936~943)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주목된다.

또한 ‘중희십(重熙十)’이라 새겨진 비편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좌측에 종(從)으로 획선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비 양면의 좌측 단 끝선의 일부로 보인다. 따라서 중희(중국 요나라 흥종의 연호) 10년을 탑비 세워진 건립연대로 가정해 본다면 대지국사 탑비는 고려 정종(靖宗) 7년(1041)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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