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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38.[끝]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는 유·무가 아니라 양변 여의는 데 있다

집착하고 미혹한 사람일수록 복잡
경계에 끄달리고 지배 받으면 중생
끄달리지 않으면 도인

 

25. 불행(佛行)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네가 일불승을 듣고 이불승을 구해가지고 너의 성품을 미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 어느 곳이 일불승인가 너를 위해 설하리라.

이불승을 구하면 구하는 자체가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법상에 집착할 수 있고, 법이 있다고 보고 집착할 수 있으니까 이불승을 구하는 자체가 너의 성품을 미하게 하는 것이니 구하지 말아라 하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되, 모든 부처 세존이 오직 일대사 인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 하니. 이 법을 어떻게 이해하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네가 나의 설함을 들어라.

경에 모든 부처님이 말하길 일대사 인연 때문에 부처님이 이 세상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법을 일대사 인연으로 이해해도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생각지 아니하면 본원이 비어 적적해서 사견을 여의는 것이 일대사 인연이다.

사람의 마음이 ‘나다-너다’‘있다-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공적하고 적적해서 그것이 일대사 인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모두가 인연으로 만들어졌고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는 유·무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양변을 여의는데 있습니다.

내외가 미하지 아니하면 곧 양변을 여읜다. 밖으로 미하면 상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하면 공에 집착한다.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는 것이니 곧 이것이 미하지 않아 이 법을 깨달아 일념에 마음이 열리면 그것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마음에 무슨 물건을 여는고. 부처님 지견(知見)을 연다.
부처님 지견이 무엇인가 하면 양변을 여의고 그 여읜 자리에서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 지견입니다.

부처는 마치 깨달음과 같다. 나누어서 네 문이 있으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또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들어감이니라.

불지견을 깨달아서 그 자리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지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깨달음의 지견이 열리고 보이고 하는 것을 평상심시도라고 하면, 깨달음의 지견을 인식하고 들어가는 것은 무심의 경계이다. 깨달으면 무엇이든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고 일상에서 복잡하게 느끼는 것이 단순화됩니다. 따라서 해결방법도 단순화됩니다. 그것을 모르면 여러 가지가 독립된 것으로 아는데, 깨달으면 여러 가지 (주변에서)일어나는 일을 분류하면 두 가지 뿐입니다. 모르면 열 가지가 다 다르고, 깨닫고 나면 두 측면에서 정리하면 두 가지 뿐이에요. 이 두 가지도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두 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도인들이 단순 명쾌합니다. 집착하고 미한 사람일수록 복잡한 것이지, 팔만사천 지혜가 다 깨달은 데서 나옵니다.

한곳을 쫓아서 들어가니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내가 항상 일체 세상사람들이 마음자리로 스스로 불지견을 열게 하고 중생지견을 열지 않기를 원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착각에 빠지면 불지견이 안 열리고 중생지견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착각을 깨면 중생지견이 불지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지견으로 타고났는데 ‘내가 있다’는 데 집착하니까 중생지견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해서 악을 지어서 스스로 중생지견을 엶이요. 세상 사람이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불지견이 열림이니, 중생지견을 열지 말고 불지견을 열면 곧 그것이 출세니라.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법이다. 아래를 향해서 셋을 나누는 것은 미한 사람을 위한 연고니 다만 일불승을 의지해라. 대사가 말하되,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내가 굴리고 행하지 못하면 내가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내가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내가 굴림이 된다.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려가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림을 입는다.

우리도 경계에 끄달리고 지배를 받으면 중생이고, 끄달리지 않으면 도인입니다. 그리고 나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연민하게 됩니다. 또한 끄달리느냐 끄달리지 않느냐에 따라 중생과 부처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경계에 끄달리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대사가 말하되, 노력해서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이 경을 굴리는 것이다. 법달이 한번 듣고 언하에 대오해서 눈물을 흘려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되, 화상아 실로 일찍이 법화를 굴리지 못하고 7년 동안 법화의 굴림을 입으니 이후로 법화를 굴려서 염염히 부처님 행을 수행하리라.

뭐가 모자라서 닦는 게 아닙니다. 부처가 되어서 부처님 행을 하는 것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뭐가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게 아니라 깨닫고 나서 깨달음에 의해서 평상심 그대로 사는 것을 여기서 표현하기를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족해서 닦는 게 아니라 행위하는 것을 바로 수행이라고 합니다.

대사가 말하되, 부처님 행이 곧 이 부처다.

부처님이 수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부족해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요.

그때 들은 사람이 깨닫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그때 혜능 스님의 법문을 들은 사람은 다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끝〉


※「법보신문」이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인재개발원과 공동기획으로 2006년 6월 7일부터 시작한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강좌 연재가 38회로 끝났습니다.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연재는 매월 한 차례씩 1년간 강의한 내용의 녹취록 요약본을 고우 스님의 직접 감수를 거쳐 격주로 지면에 옮겨 왔습니다. 강좌는 ‘33 후기(後記)’까지 진행됐으나, 육조 스님 법문의 주된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아 ‘25 불행(佛行)’까지 연재하는 것으로 지상중계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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