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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사랑한 이웃 종교인들

기자명 법보신문

[새해특집]김경재목사-박청수 교무-서명원 신부-이찬수 원장

종교는 인간이 우주의 진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다른 이름을 가진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곤 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으로 인해 때로는 적이 되기도, 때로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신년특집 ‘불교를 사랑하는 이웃종교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로서 불교인들과 깊은 소통을 나눈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찾아가는 진정한 세계를 생각해보기 위해 마련된 기획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과 내 안의 진리를 밝히기 위한 구도 수단이자, 영혼을 키우는 바다다.

편집자 주

 

다른 종교 이해하면
내 종교 더 풍성해져

개신교 김 경 재 목사

1996년 화계사에서 세 번의 불이 났다. 광신적 개신교도의 방화였다. 미친 종교가 날뛰는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와 탄식이 화계사를 휩쓸었고, 현각 스님을 비롯한 외국인 스님들 사이에서는 ‘당장 수행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겠다’는 이야기까지 터져나왔다.

이때 화계사 인근에 위치한 한신대의 한 교수와 학생 20여명이 흉물이 된 법당을 찾아왔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는 뜻을 전하고 법당을 청소하고 돌아갔다.

그해 12월 화계사 울타리에는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랜카드가 올랐다. 이에 뒤질새라 이듬해 5월에는 한신대 대학원생들이 ‘축 부처님오신날’ 현수막을 걸었다. 한신대 운동장이 매년 부처님오신날마다 화계사 주차장으로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한국의 다종교사회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미담으로 꼽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학생들을 인솔해 화계사를 찾아갔던 그 교수는 바로 김경재 목사였다.

지금은 한신대를 정년퇴임하고 삭개오작은교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외치는 이들, 불상의 목을 잘라놓고 붉은 페인트를 칠하는 이들.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이라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같은 종교폭력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사회 속에서 김경재 목사는 한 명의 의인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는 한국 기독교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빈자를 보듬어야 할 교회가 자본주의적 성장과 경쟁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세계 각국의 토착적인 문화와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군식 선교에만 매달리는 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그가 가장 비판하는 대상은 한국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이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보수신학자들은 그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다. 그는 한국에 ‘한국적인 기독교’가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그의 스승이었던 함석헌과 김재준 등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를 시도했던 이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타종교에 대한 포용적 태도로 인해 김 목사는 평생동안 기독교 내부에서는 이단 논쟁에 시달려야 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마귀의 종교를 인정할 수 있느냐”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다른 종교를 깊이 알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지고, 깊어지고, 성숙되는 것”이라고 거듭 설득했다.

“불교, 기독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등 위대한 종교들은 서로 다른 특정한 문화와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해석학적 모체 속에서 체험되고 표현된 공동체의 구원체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이 나의 종교적 삶을 더 풍요롭게 심화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란 권위적 종교의례나 경전신조에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성현들의 높고 맑은 생명적 진리체험을 내 안에서도 체험해보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가 더 가난하고 더 작아지고,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한국 국민들의 가치관에 혼란이 온 것 또한 1차적으로 모든 종교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근 그는 이화여대 김옥길기념관 내에 조그만 지하채플인 삭개오작은교회를 이끌고 있다. 신자라고 해봐야 고작 40명 정도에 불과한 이 교회는 평신도와 청년들이 중심이 돼 초교파적으로 예배를 보고 성경공부를 한다. 또 타 종교의 경전도 공부하며 종교간 이해와 대화를 꾀하기도 한다.
교회 이름인 삭개오는 성경에서 난쟁이자 부족한 인물로 나온다.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했기 때문에 타종교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김경재 목사.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 이웃종교인들에게도 산소를 마구 뿜어내는, 아주 커다란 나무임에 틀림없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고통받는 이웃, 내 영혼 키우는 텃밭

원불교 박 청 수 교무

박청수 교무는 참 맑았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미소와 말투.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너무 맑아서 모든 것을 그대로 투영할 수밖에 없는 유리 같다는 생각이 지나간다. 그 유리에 슬픔이나 고통같은 비춰질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리고 그들이 즐거워할 때는 행복이 빛처럼 반짝거리는 그런….

박청수 교무를 ‘불교를 사랑한 이웃종교인’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약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그가 원불교 수행자로서 불법을 평생 수지하고, 법정 스님과 같은 불교계 인사들과 깊은 교유를 가지며, 라닥과 캄보디아 등 불교국가에 자선활동을 펼친 것이 사실이지만 ‘불교’라는 틀 안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기엔 왠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는 불교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했고,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그들을 끌어안았던 ‘열린 영혼’으로서 살아왔을 뿐이다.

일제시대 한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군소종교로 분류되는 원불교의 수행자가 된 조그만 체구의 한 여인. 모든 마이너리그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듯한 그의 삶은 그 편견의 벽을 거침없이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다.

그는 물이 없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우물을, 자식들을 수만리 먼 땅으로 유학 보내는 라닥인에게는 학교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캄보디아인들에게 병원과 고아원을 지어주었다. 중국 훈춘 조선족 장애자를 위해 특수교육학교를 설립하고, 아프리카 12개국에는 의약품을 보냈다.

그의 구호의 손길이 닿은 나라는 무려 세계 55개국. 작고 상냥한 한 여인의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쏟아져 나왔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박 교무는 그것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완전히 깨어있고 완전히 고요해야 여법하게 일이 진행됩니다. 세계 55개국에서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마음이 조금만 혼란스러워져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거든요.”

30여년전 가톨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운영하는 성 라자로마을을 지원할 때 원불교인들 중 “왜 우리 종교 안에도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 남의 종교에서 운영하는 단체에 기부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박 교무는 그런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남는 장사”였다고 말했다. 라닥의 학교로 헌옷을 보낼 때 그 옷을 거두어 준 이들은 바로 김몽은 신부가 이끄는 대치성당의 신도들이었다.

“원불교는 교세도 작고 신도수도 적잖아요. 그래서 옷을 모아봤자 몇 점 안 걷혀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죠. 헌옷 좀 모아서 보내자고. 그랬더니 컨테이너가 넘칠 정도로 옷이 모아졌어요.”

북한 동포들에게 컨테이너 9개, 인도에 9개, 캄보디아에 7개 등 세계로 떠난 컨테이너 수만 30개에 이른다. 원불교가 세상밖으로 더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우리’라는 틀에 갇히지 않았던 박 교무의 열린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우리만 찾으면 언제 하나가 되나요. 내가 먼저 가서 손을 내밀고 경쟁심 없이 다가서면 다 통해요. 마음이 청정하고 가슴이 온정으로 덮여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져요. 세계 곳곳의 수많은 고통받는 이들도 함께 따뜻해져야지요.”

그가 해외 자선사업을 하게 된 것은 거창한 타이틀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들마다 때마침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연들이 있었고, 특유의 성격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한 고려인이 다가와 절망에 갇힌 눈빛으로 ‘살봐주섬(살려주세요)’이라고 외쳤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랄해의 고갈로 중앙아시아 지역이 사막화되었고, 수백미터 아래 우물을 파도 소금기 섞인 물밖에 나오질 않았다. 고려인들이 수십 호 살고 있는 마을에는 1주일에 한명씩 죽어가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도저히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박 교무는 그들을 러시아 볼가강가로 이주시키는 대이동을 실행했다.

라닥에 여행을 갔을 때는 소년들이 없는 마을 풍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수만리 떨어진 남인도로 학교를 보내기 위해 수년간 생이별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아프리카에 여행을 갔을 때는 물을 기르기 위해 4시간을 가야 하는 아낙네들을, 캄보디아에 갔을 때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잠도 안오고, 밥도 잘 안넘어갔다. 그들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해외 자선사업이 무려 55개국에 이르렀다.

박 교무는 ‘하늘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늘사람은 항시 욕심이 담박하고 생각하여 맑은 기운이 위로 오르는 사람이라고 소태산 대종사가 말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남은 여생의 마디를 고요하게 싱그러운 기운을 날숨 들숨으로 호흡하며 하늘사람이 되기 위해 정진하려 한다고, 그런데 자꾸 곳곳에서 자신의 손길을 기다려서 언제 정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토로했다.

박청수 교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 사람이 하늘에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늘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55개국 수천만 이웃들은 손길로 어루만질 수 있단 말인가.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간화선 통해 참그리스도인 삶 찾아

가톨릭 서 명 원 신부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간화선, 그리고 성철 스님.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셋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것을 100%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듯이, 나에게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들을 설명할 수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서명원 신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대답으로 말문을 열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불교철학을 가르치는 서명원(본명 Bernard Senecal) 신부는 예수회 소속의 수도자이다. 그는 매일 간화선 수행을 하고, 성철 스님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개량한복을 입고 서강대에서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84년 여름 서강대 한국예수회 초청으로 방한했을 당시 진정한 한국문화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불교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1990년 사제품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7대학 동양학과에서 한국문화를 공부했다. 석사논문은 구산 스님에 대해 썼다. 그리고 구산 스님의 제자였던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송광사 수행기 『파란 눈 스님의 한국 선 수행기』를 통해 성철 스님을 알게 되었다. 돈점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10여년간 성철 스님의 저서들을 연구한 그는 2005년 파리 7대학에서 성철 스님의 생애와 전서(全書)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10여년간 빼곡이 주를 달면서 공부해온 『선문정로』, 『육조단경』 같은 성철 스님의 저서들은 수십번 형광펜으로 덧칠해져 무지개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성철 스님, 그리고 한국불교와의 만남은 그에게 “너무 어려운, 그러나 너무 행복한” 여정이었다.

그는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복음서 속 예를 들었고, 예수에 관한 이야기하면서 불경 이야기를 함께 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는 기독교인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왜 그에게서는 자꾸 불교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리를 잊은 게 아닙니다. 불교를 통해 기독교 성직자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기독교를 심도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그를 통해 내 본래의 종교를 훨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간화선 수행을 한다. 화두를 깨치기 위해 10여년간 수행을 해왔다는 그는 “간화선을 통해 도달하는 세계가 바로 예수의 영적 세계로 통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언어도단”이라는 미소 섞인 답변만 돌아왔다. 서 신부는 진정한 종교란 ‘보살심’이라고 정의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것, 다들 부처가 되길 간절히 발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말 또한 불교의 보살심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 데 자기가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놓을 뿐 자신을 앞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는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의 가톨릭은 불교를 연구하고, 불교는 또 가톨릭을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때 비로소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각각 기독교인과 불교인인 한국은 두 종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깊은 영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인류 전체에 이바지 할 수 있고요. 그러려면 서로를 알아야 하지요. 저는 신학을 전공하는 스님들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깊이 알면 존경하게 되고 배우고 나누면서 풍요롭게 되지요.”

인터뷰 내내 서명원 신부는 무척 밝고 진지하고 유쾌했다. 서명원이라는 이름은 1986년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던 서인석 신부가 ‘천천히 빛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배웅을 하면서 ‘성불하십시오’라며 합장하는 서명원 신부. 마치 선방에서 만난 도반처럼 느껴지는 그의 푸른 눈이 깊고 정직하게 그리고 천천히 빛나고 있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내가 꿈꾸는 세상? “종교 ‘똘레랑스’ 이뤄지는 사회”

종교문화연구원 이 찬 수 원장

지난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21세기 종교재판’이라고까지 불렸던 ‘강남대 이찬수 교수 해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던 기독교인에 대한 보수 기독교계의 집단 따돌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은 각각 피부도 틀리고 성격도 틀리고, 말투도 틀리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사람이라는 본질은 같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적인 모습들만 보고 종교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건으로 많은 내상을 입었을 법한데도 그의 목소리에는 담담함이 묻어났다.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서 더 높은 곳에서 넓게 보는 자의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이 원장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옳지 않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며 “많은 단체와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찬수 원장은 강남대 재직 당시 교양필수과목인 ‘기독교와 한국사회’ 강의를 맡고 있었다. 이 원장은 이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원장은 당시 “신앙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 강의를 진행하려 했다”며 “열린 시각으로 다른 종교와의 관계 속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고 했다.

“지금 시대는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시대지만, 상대를 충분히 이해한 뒤 보게 되는 ‘차이’와 전혀 이해하지도 않은 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차이’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상대를 충분히 이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전자가 상대방과의 조화와 관용으로 나타난다면, 후자는 무관심과 대립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원장은 학생들에게 종교 간의 ‘똘레랑스(tolerantia, 관용)’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원장은 ‘종교 간의 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취지로 EBS TV의 ‘똘레랑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내몰리게 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이 원장은 “종교 간의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설명했지만 그의 해명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때의 행동이 창학이념에 반한다는 해직 사유에 대해 이 원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입장이다. 이후 법원도 이 원장에 대한 강남대의 해직 처분에 대해 “재임용 거부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복직은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원장은 지난 2007년 5월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종교문화연구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지난 9월부터는 세계종교연합회(WCRP) 평화연구소의 객원연구원 겸 교성학림의 객원강사 자격으로 일본 도쿄에 머무르고 있다.

“단순히 신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아요. 진정한 종교란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를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곧 거룩한 사람의 성품을 간파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의 핵심은 결국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양한 종교의 핵심과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는 아직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종교들이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진정한 종교의 ‘똘레랑스’를 이 사회에 심기 위한 그의 외길걷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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