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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40. 중도-‘시계추’

기자명 법보신문

소멸로 치닫는 무의미한 반복?
존재하지만 머물지 않는 원리!

<사진설명> 이 눈이 녹고나면 길은 사라지는 것일까 드러나는 것일까.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여동완 씨가 촬영한 티베트 창장공로 상의 겨울.

언제나사
그를 향하여
온몸으로 달렸다가는
그에 이르려는 찰나,
맞은편으로 내닫는다.

이제사
어느 쪽에도
다다르지 못함을 알련마는
잠시도 머물지 않은 채
쉼 없이 진동한다.

모두사
태엽 풀리면
절로 멈출 운명이면서
극미하게 풀쳐내어
멈추지 않는
저 역설, 저 삶!

필자가 지은 ‘시계추’란 시다. 언제나 시계추는 목표를 향하여 온힘을 다해 달리지만 그에 이르려는 찰나 다시 반대편으로 내닫는다. 어떻게 보면, 이 무의미한 반복을 영원히 하도록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이 시계추의 속성이다.

어디 시계추뿐이랴. 인간 삶이 그러하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자리와 권세와 영광과 명예와 자본을 향하여, 혹은 순수한 이상과 완성을 향하여 정신을 모으고 몸을 사르지만, 누구도 이에 이르지 못한다. 그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도 끊임없이 그를 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속성이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이성이나 지식으로 헤아리고 알 수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진리의 속성

이상의 완성은, 욕망의 달성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기루, 아무도 그에 이른 사람은 없다. 모두들 그 대상을 향해 질주하지만, 갈 때는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할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달해 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에 이르고서야 자신이 그토록 추구한 대상이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100이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문의 연서를 쓴다 해도 거기에 표현된 사랑은 7, 80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사랑은 저 멀리 달아난 느낌일 것이다. 그처럼 궁극적 진리에 우리는 다다를 수 없다, 다다른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며칠 전 읽었던 포스트모던철학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살 충동을 느꼈다. 내가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면 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다 깨달은 것이 진리에 이를 수는 없어도 다가갈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시계추는, 인간은 어느 쪽에도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잠시도 쉼 없이 진동한다. 헤아릴 수 없기에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도달할 수 없기에 그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를 향한 지향과 실천이 바로 실존이다.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존재한다 하면 저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저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이것이 존재한다. 존재는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닌, 그 ‘사이에’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경계를 나누고 구분을 하는 것일까? 봄에 들이나 산을 가면 많은 새싹들이 움을 틔운다. 양지 바른 논둑이나 들에는 달래, 냉이, 씀바귀, 돌나물 등이 지천으로 깔리고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골짝에는 질경이, 취, 얼레지, 두릅, 머위 등이 자태를 드러낸다.

어머니와 산에 오르면 어머니는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나물을 한 소쿠리 가득 캐 오신다. 어머니는 캐온 것을 다듬으시며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나물 가운데에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조것은 참취이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풀일 뿐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먹는 나물과 먹지 못하는 나물로 구분하고 이것을 다시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는 것이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 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풀은 그 자체로는 카오스이어서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으므로 그리 나눈 것이다. 풀 자체가 자신을 질경이요 취라고 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리 나눈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모두 허상일 따름이다.

대상의 분별은 인간의 기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모두 이 나눔의 하나일 뿐이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이분법적 모순율, 곧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이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을 이데아와 진리, 참과 거짓, 말과 글, 주체와 대상, 성과 속, 자연과 인간 식으로 경계를 지었다. 그리고 그 중간이나 ‘A and not-A’는 있을 수 없는 모순으로 보았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으며,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쓰고 있는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서양의 이분법으로 보면,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다. 과연 그럴까? 낮은 12시에서 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낮엔 밤이 들어와 있고 밤엔 또 낮이 들어와 있다. 낮은 스스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공(空)하다. 밤이 있어서 낮이 있다. 밤을 견주면 낮이 드러나나 낮은 가명일 뿐이다. 밤이 있어 드러난 것이다. 절대 낮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엔 이미 밤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낮과 밤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하나 생을 일으키지 않고 머물지도 않는 중도(中道)의 원리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가 아니면 not-A인 것이 아니다.

없는 듯 있는 세계의 실체

아내만 보면 찢어 죽이고 싶다거나, 자기의 아내가 신이고 천사라는 사람은 극단에 있는 자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곧 퍼지(fuzzy)이다. 우리는 0과 1에 대하여 말하지만, 진리는 그 사이에 있다. 때문에 시계추는, 우리 인간은 양 극단에 서지도,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A and not-A의 논리로 세계를 바라보고 표현하면, “유(有)는 곧 무(無)이고, 진리는 곧 허위이며, 사랑이 곧 미움이고 삶은 곧 죽음이다.” 이것을 존재한다 하면 저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다 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그를 진리라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허위라 깨달은 순간 그 속에 담긴 일말의 진리가 퍼뜩 다가온다.

시계추도 마찬가지다. 태엽이 모두 풀리면 시계추는 멈춘다. 그것이 시계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시계는 태엽을 서서히 풀어 시계추를 움직인다. 멈추지 않기 위한 작동이 결국 멈춤을 향하는 역설이다. 인간 존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살려고 먹어대지만 먹는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하여 세포를 늙게 하는 행위다. 소식(小食)을 하는 자가 장수한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이런 역설을 깨닫는 것이 또 중도다.

무명(無明)은 미혹하여 세계를 주와 객, 본질과 현상 등 둘로 나누어 보나 세계의 실체는 이를 하나로 융합한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에 머물지도 않으므로 하나가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고요하고 그득하여 무명을 떠나 이를 수 있는 청정한 세계이기에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거나 극단에 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절충하여 그 중간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실체는 이와 같아서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어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無)에 머물지도, 모든 것을 긍정하는 유(有)에 머물지도 않는다. 세계의 실체는 유와 무, 현전과 부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이며, 차이를 통하여 양자를 드러내고 모든 것을 포섭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비어있는 곳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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