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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 실패… 친일 승려-혁신 세력 공존

기자명 법보신문

[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39.해방공간 불교계의 대립과 갈등

사찰령 등 악법 철폐 실패로 불교청년단 등 혁신 세력 등장
급진적 개혁으로 우익과 대립


<사진설명>불교청년당 인사들이 통도사 무풍교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불교청년당 선전부장을 지냈던 통도사 출신 임정달로 법명은 화산이다. 사진제공=민족사

우리나라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의해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좌익과 우익이 신탁통치 수용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처음에는 좌익과 우익이 모두 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익계열은 곧 찬성 쪽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결정은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찬성하는 쪽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열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계열이었다. 이후 두 진영의 갈등은 깊어졌고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었다. 불교계도 형태는 다르지만 이 시기 비슷한 유형의 갈등과 대립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한국 불교계의 방향은 일제시대의 경험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불교계의 당면 과제는 친일파 청산·사찰령철폐·적산재산 처리문제·자주적인 개혁성취 등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과제들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불교계의 친일파 청산은 일제시대 종무원 간부들과 31본사 주지들이 물러나고 종립학교였던 혜화전문학교와 교계 언론사들의 주요 간부들이 퇴진하고,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되어야 하였다.

그런데 1945년 9월에 개최된 승려대회에서 31본사 주지들의 퇴진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불교계는 친일 본사 주지들이 그대로 눌러앉은 상태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중앙총무원 간부들과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해방 직후 불교계의 일제 잔재 청산 노력은 종무원 간부 일부를 경질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였으며 몇 가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를 제약하는 악법이던 사찰령을 비롯한 악법 철폐도 이루어 내지 못하고, 교계 개혁을 위한 노력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등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불교계의 집행부가 이러한 한계를 보이자 혁신계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불교계의 혁신단체로는 불교청년당을 들 수 있다. 불교청년당은 1945년 9월 전국 승려대회가 개최될 무렵에 결성되었으며 사회교화 사업과 건국사업에 협력하고자 다른 종교 단체와 공동으로 활동하였다. 불교청년당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 조선불교의 혁명, △교단내 미신적 요소 배제, △시대에 적응한 교학수립, △신앙의 자유 확보, △사찰토지 소유 반대, △교단 반역자와 민족 반역자 숙청, △조국 완전 자주 독립.

이와 같은 사항은 당시 불교계의 현실로 볼 때 수용이 불가한 사항도 있었다. 당시 불교계의 재정수입의 대부분이 사찰토지에서 조달되고 있던 현실에서 종교 단체가 토지를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교청년당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백석기·유성갑·성락훈·양외득·김해진·김만기·정태일·전길선·김경구·김창호·임정달·우정상·이외윤·임재영 등이다. 불교청년당 사업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국화여자전문학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것이다. 국문과와 문화과 등 각 50명씩을 모집하였는데 입학 자격은 여고졸업자였다. 여고를 졸업한 근로 여성들을 위하여 야간 전문학교를 운영하여 시대에 적응하는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자 하였다.

1946년에 불교계에 등장한 혁신 단체로는 혁명불교도동맹을 들 수 있다. 혁명불교도동맹은 지식층인 동시에 혁명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1946년 4월 25일 창립되었다.
‘계급 없고, 죄악 없는 평화사회를 건설하고, 모든 형식·미신·봉건 등 구습을 숙청하고 교단개혁·조국광복·사회혁명 완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혁명불교도동맹이 표방하는 슬로건으로 볼 때 급진적인 좌익계열의 노선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주도 인물은 박봉석·장상봉·김달진·곽서순·조명기·이부열 등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수도자만이 승니의 권한을 가지자, △사원은 일반에 개방하자, △사유(寺有) 토지는 전부 국가사업에 제공하자, △불건전한 포교당을 숙청하자, △본존은 석가불만 숭봉하자, △승니는 생업에 근로하자, △의식은 극히 간소화 또 엄숙히 하자.

진정한 수도자만이 승니의 권한을 가지자는 이야기는 이 당시 교계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던 교도제 실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교도제란 비구승을 수행승으로 규정하여 교단의 중심으로 삼고 대처승은 교화승으로 구분하여 사찰 사무나 포교 등의 일에 종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교도라는 개념에는 일반 신도까지 포함되는 광범위한 것이다.

혁신계열은 1946년 11월 불교청년당·불교혁신회·혁명불교도동맹·불교여성총동맹·재남
이북승려회·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선우부인회 등 7개 단체가 모여서 결성한 조선불교혁신총연맹으로 세력이 결집된다.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은 1947년 5월 8일부터 9일까지 전국 대표 500여명이 모여 불교도대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비구승단 옹호, △교학진흥, △대중불교 건설, △미신불교 타파, △교화운동 강화.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은 전국불교도대회 개최 결과 채택된 결의안을 5월 10일에서 13일까지 개최된 중앙교무회에 제출하여 시행을 요구하였지만 중앙교무원은 이 결의안을 묵살하였다.

그 원인을 입법기관인 중앙교무회의 구성원들 대다수가 일제시대 사찰령 체제 아래서 주지들의 독단적인 전권을 농단하던 보수파로서 현재에도 여전히 집행기관의 요직 앉아 교단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선리참구원과 그 방계 단체인 선우부인회가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의 구성원으로 참가하였다는 점에서 이 단체의 성격을 좌익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비구 선승들을 좌파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은 중앙 기구인 중앙총무원을 부인·해체하고 조선불교총본원을 재설립하여 교계를 혁신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조선불교혁신총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전국불교도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사진설명>전국 불교도대회 성명서. 이 성명서는 해방 직후 전국 승려대회를 통해 성립한 중앙총무원의 개혁 노선에 불만을 가진 조선불교혁신총연맹에서 보다 개혁적인 혁신의지를 밝힌 문건이다.

총연맹은 해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앙총무원이 조국재건과 교단정비 사업에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두 개의 중앙기관이 생겨난 셈이다. 조선불교총본원 측은 교정에 장석상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박원찬을 선임하고 독자 노선을 표방하였다. 이들이 추구하는 개혁 노선은 기존의 집행부인 중앙총무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들은 대처승을 정식 승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신도로 전환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포교사·교사·종무원 등의 직책을 부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찰 토지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총무원이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한데 반해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갈등은 미군정의 종교정책이 우익 중심의 정책인데다가 토지개혁 노선에 있어 견해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탈퇴하는 내분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하였다. 결정적인 요인은 조선불교총본원의 핵심적인 인사 10여명이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북쪽으로 김일성을 만나러 가는 김구 일행을 따라 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데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혁신단체를 좌익으로 규정하거나 심지어 ‘빨갱이’로 몰아 부치는 경우가 있지만 해방 공간 불교계의 갈등은 보수와 혁신세력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혁신계열 인사들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글로 발표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이들 가운데 좌익 활동으로 구금되어 실형을 받은 기록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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