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41. 선(禪)①-경한의 ‘산에 머물며’
[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41. 선(禪)①-경한의 ‘산에 머물며’
  • 법보신문
  • 승인 2008.01.1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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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없는 거문고 가락’ 비유로

‘언어 떠난 세계’ 시각적 묘사

 

산은 푸릇푸릇 물은 파르무레
새는 재잘재잘 꽃은 함빡함빡
이 모두 줄 없는 거문고 가락이러니,
푸른 눈 호승(胡僧)을 슬카장 보누나.

山靑靑水綠綠
鳥花簇簇
盡是無絃琴上曲
碧眼胡僧看不足

 

<사진설명> 세계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설명. 이를 마조도일은 ‘줄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했고 부처님은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설하셨다.

고려 말의 선승 백운화상 경한(白雲和尙 景閑: 1299-1375)이 지은 선시 ‘산에 머물며(山居)’중 한 편이다. 산도 푸르고 물도 푸르다. 자연은 그 모습 그대로 있다. 한 티끌 없이 그대로의 자연은 진여 불법이다. 그 자연에 묻혀 있는 새들은 불법의 가락을 노래하고 풀은 진여의 꽃을 피운다. 줄 없는 거문고의 곡조는 무엇인가? 우선 이 가락으로 인하여 벽안의 호승을 슬카장(‘실컷’의 고어) 보게 되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푸른 눈을 한 호승은 서쪽에서 와서 선을 전한 달마대사일 수도 있고, 경한 스님이 십이송(十二頌)을 지어 바치고 찬(讚)을 쓴 지공(指空) 제납박타(提納薄陀)일 수도 있다. 그러니 거문고의 곡조는 선(禪)의 세계로 인도하는 곡조인 셈이다. 그럼 이 말의 원조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선을 왜 줄 없는 거문고라 하였는가?

단순화 시키는 언어의 한계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인가? 빛이 프리즘이나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인간세계에서 그리 나누어 나타나는 것이며 일곱 가지 범주를 가진 인간에게 그리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밝음과 어두움, 양자로 나누고 다시 밝기에 따라 분별하고 이를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나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도 허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주황을 ‘진한 주황, 아주 진한 주황, 극도로 진한 주황’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우리 앞의 자연의 소리는 카오스(chaos)이다. 자연 그대로의 소리(聲)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기에 그 소리를 무지개의 색처럼 나누어 궁상각치우니,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나누어 코스모스(cosmos), 곧 음(音)으로 만든다. 인간의 이해란 진여실체, 혹은 도(道)를 인간의 인식틀에 따라 범주화하는 것이다. 범주를 씌워 코스모스로 만들어야 이해의 대상이 되고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거의 무한의 소리를 인간 나름대로 어떤 틀로 구분하고 경계를 지어 음으로 만들어선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한다.

신(神, 검)이 전한 고라는 뜻에서 ‘검고’에서 기원한 거문고도 여섯 줄을 술대로 누르고 퉁기고 문질러 신의 소리에 다가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음(音)일 뿐, 정작 신의 소리에는 이르지 못한다. 궁(宮)과 상(商) 사이, 도와 레 사이에도 무한대의 소리가 존재한다. 그러니 그런 궁극의 소리에 다가가려는 악기는 줄이 없을 수밖에 없다.

‘나무’라는 기호는 ‘나무’의 관념 내지 이미지를 지시할 뿐 현실의 나무는 현전(現前)하지 않는다. 즉 기호는 부재한 현전을 지시할 뿐이며 의미는 항상 연기되거나 달라져 있다. 세계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표상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 자체가 본질이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나무는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소쉬르가 통찰한 대로 언어에는 차이만이 있는 것이다.

선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야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헤아릴 수 있지만, 그 마음에 어떤 인식이나 언어로 다가가겠는가. “모든 것에 참은 없으니 참을 찾으려 하지 마라. 만약 참이란 것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 참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를 여의어야만 그 마음이 참이라 할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 가짜를 떠나지 않고서는 참은 없는데 어디에 참이 있겠는가?”(惠能, 『六祖壇經』)

세계의 궁극적 실체, 즉 참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드러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잘못된 마음으로 구분을 하고 범주를 만들고 경계를 짓기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이 망령된 생각, 언어기호로 이루어진 틀을 떠난다면 참을 구분하는 모든 허상들이 사라진다. 참은 언어기호와 말, 그리고 글, 언어기호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성과 의식을 떠나 존재한다. 참이란 평등하여 변이가 없고 어떤 기호나 생각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오로지 말과 의식을 떠나 참 마음으로 즉할 수 있는 것이기에 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기호로도, 의식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이기에 참이라 한다. 참과 일체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언어로, 말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그러니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마음이 구분과 경계 만들어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고 이언절려(離言絶慮)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참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답은 모든 언어를 버리고 선정(禪定)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기호의 공성(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진리에 이르는 보편적인 방법 또한 언어이다. 내가 강의 시간에 들어가서 진정한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두 시간 내내 입을 다물고 하늘만 쳐다보다 나온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미사여구를 써서 내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랑에 필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야 내 아내는 사랑을 확인하고 좋아한다.

“不立 양 글자 역시 문자다.”라고 지적한 사람은 혜능이다. 해체를 주장한 데리다는 텍스트를 해체하지만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주장한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 했다. 장자(莊子)도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금강경』의 저 언덕 너머와 뗏목의 비유, 『대승기신론』의 달과 손가락의 비유 또한 이와 통한다. 궁극의 진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깊이 통찰한 성인과 현인이 깨달은 것은 “궁극의 진리(지붕, 물고기, 달, 저 언덕 너머)는 말로는 다다를 수 없지만, 말(사다리, 통발, 손가락, 뗏목)이 방편은 될 수 있다. 대신 전자에 이르려면 이를 떠나라.”라는 것이다.

비록 우주에 이를 수는 없지만, 장대를 이용하되 이에서 떠나면 더 높이 날아 우주에 가까이 다가가는 이치와 같다. 하여 선에도 화두가 있고 선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소리 자체와 줄 없는 거문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악기로도 그 궁극의 소리를 표현할 수 없지만, 줄로 경계를 나눈 악기 대신 줄 없는 거문고라는 방편을 통한다면 그에 이를 수 있다.

화두는 장벽 뛰어넘는 장대

이 시에선 그런 방편을 이미지에서 찾고 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드러내자니 언어로 부족하다. 이미지로 엮는다. 이 시에선 산이 푸르고 내가 푸르고 꽃이 핀 시각적 이미지, 새가 지저귀고 거문고가 소리를 내는 청각적 이미지가 잘 결합되어 있다. 이 이미지를 배합하면 우리는 방안에 앉아 푸른 산을 떠올리고 새의 노래 소리를 듣는다. 언어와 의미를 떠나 자연의 이미지에 젖는다. 자연의 모습이 진경(眞境)이고 진경이 곧 선(禪)이니,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선에 다가간다.

내용과 메시지를 중심으로 시를 해석하는 방식은 시가 이미지의 예술이란 점을 망각한 행위이다. 시와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며, 시와 예술을 감상하며 황홀할 수 있는 것은 시어들이 엮어내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신사가 문득 어머니 자궁이 빚어내는 원초적인 따스함 속에 푹 파묻히고, 감옥에 갇혀 있는 무기수가 고향의 향기로운 꽃밭을 마음껏 뛰놀도록 ‘매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미지이다.

마들렌 빵 냄새를 통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듯 이미지는 근원으로 다가가는 열쇠이다. 이미지는 언어기호나 이성으로 다다를 수 없는 실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한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고자 하면서 상징과 코스모스가 가려버린 카오스, 도(道)를 향한다.

줄 없는 거문고를 통해 자연의 소리에 다다른다. 절로 푸른 산, 절로 쪽빛인 냇물, 절로 재잘거리는 새, 절로 함빡 핀 꽃의 이미지가 펼쳐주는 세계에 노니노라면 절로 자연에, 선에 이르러 하나가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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