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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42. 선(禪)②황지우의 ‘게 눈 속의 연꽃’

기자명 법보신문

‘꽃 이름’에 갇힌 ‘실체’ 비판
‘게’는 언어 떠난 수행자 상징

 
<사진설명>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땅인가. 뻘밭은 모든 생명이 나고 죽는 곳이요, 연기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이다.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는 타는 게,
게座에 앉네

황지우의 시, ‘게 눈 꽃의 연꽃’(『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전문이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 ‘꽃을 위한 서시’를 모티프로 한 시다.
1연은 김춘수의 시에 화답하여 이름을 매개로 타자와 관계하면서 의미를 드러내고 존재하는 꽃과 돌의 실존을 다루었다. 그러나 김춘수의 시가 서양의 세계관, 특히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황지우의 시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름으로 정체성이 주어지고 의미를 가져 실존을 할 수 있는 세계에선 존재는 모두 이름을 갖기 원한다. 그리 서로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서로의 마음을 소통한다. 하지만 서양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실체와 동일성중심의 사유가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 언어 스스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을 뿐임을. 플라톤 이래 모든 서양 철학자들이 그토록 번뇌를 하며 추구해왔던 이데아가 모두 헛된 것임을. 동일성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를 낳았음을.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는 이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꽃 매개로 불성 드러나

그리 깨닫고 나니 하품이 나온다. 하품은 부정과 조롱의 표시이자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는 기다림, 혹은 빈틈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이름과 실체와 동일성에 현혹되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마음을 유혹한다. 그 모두를 추억으로 몰아 추억조차 버리자 새로운 것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실체 중심의 사유를 초월하여 얻은 관계의 사유, 타자성의 인식이다. 나는 이름으로, 혹은 나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와 관련성 속에서 ‘차이, 혹은 사이로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인은 “돌을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라고 말한다. 석기 시대에 돌을 부딪쳐서 깨트려 돌 속에 담긴 불을 빼내었듯, 돌과 같은 마음 속에서 이름, 동일성과 실체에 중심을 두고 행하였던 모든 사유와 실천을 떼어내 이제 버리자는 말이다. 1연 전체가 일상이고 생멸문(生滅門)이다.

1연이 생멸문이라면, 2연은 그리로 가는 다리며, 3연은 진여문의 장이다. 게 눈속에 진흙 속에서 깨달음을 향해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마음은 원래 없었다. 게는 보름달이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시방 세계 곳곳에 자비의 빛을 뿌리는 것처럼 보광(普光)의 거품을 피어 올린다. 보광의 거품을 피어 올리니 그 순간 게는 연꽃을 담지는 못해도 그를 볼 수는 있다. 깨달음을, 그를 지향하는 삶을 비로소 안 것이다.

푼수 중에서도 최상의 푼수라 할지 모르지만 누가 내 글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아내의 얼굴’과 ‘산’이다. 원래 역마살도 심하고 술과 후배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밖에만 나가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거기 가난한 시간강사 때나 조금 살림 펴진 지금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늘 환하게 웃어주며 맞아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 책상에 앉으면 언제나 넉넉히 품어주는 관악의 능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보면 내 마음엔 금세 파문이 일고 엔돌핀이 돌며, 기쁨으로 충만한 머리는 손가락에 강물과 같은 글들을 풀어내라 명령한다. 필자는 학교 연구실에선 글을 쓰지 못한다.

이처럼 무엇을 보면 그 대상은 내 눈에 상으로 맺혀지고 마음에 파문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나의 세포는 변한다. 하여 바라본다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눈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뻘밭서 깨달음 향해 용맹정진

이 또한 주와 객을 이분법으로 분별하는 사유다. 무엇을 바라봄은 그것이 이미, 마음과 육신의 통합체로서 내 몸이 됨을 의미한다. 게가 연꽃을 본다는 것은 연꽃이 게 눈 속에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보는 순간 연꽃은 게 눈에 맺혀지고 그것은 게의 마음을 뒤흔들고 마침내 게의 몸마저 변하게 한다. 하여 연꽃은 게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게의 마음 속에 있던 것이 눈을 매개로 드러난 것이다. 게의 불성(佛性)이 연꽃을 매개로 하여 드러난 것이다.

진여문의 장, 3연에서 맨 처음 마주치는 어휘가 ‘투구를 쓴 게’이다. 투구는 전투를 할 때 쓰는 모자다. 연꽃을 볼 수 있는, 연꽃의 이런 이치를 깨달은 게니 전투를 하는 마음으로 선정에 돌입한다. 선가에서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한다 하지 않던가. 바다에 이르고자 게는 긴 뻘밭을 기어가는 고행을 감행한다.

뻘밭의 의미는 무엇인가. 뻘밭은 태초로부터 영겁의 미래까지 바닷물이 끊임없이 들고 또 나는 곳이다. 바다인가 하면 땅이 드러나고 땅인가 하면 곧 바다이다. 뻘밭은 모든 생명이 죽고 나는 곳이다. 갠지스 강의 모래보다 많은 미생물이 세포 분열을 하고 물고기들이 알을 낳고 양육을 하는 곳이자, 서로가 서로의 먹이가 되어 서로를 살리며 그리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드는 것은 나는 것이고 나는 것은 드는 것이다. 죽음이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다. 그러니 뻘밭이야말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場)이다.

바다는 들어갈수록 오묘하고 온갖 보배를 담고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이다. 달을 비롯하여 온갖 형상 가운데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수평을 이루고도 절대 평등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파도를 쳐대는 무등(無等)의 세계이다. 수천, 수만의 강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반야와 유식, 돈(頓)과 점(漸) 등 서로 다른 모든 쟁론(諍論)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일미(一味)의 세계이다. 시작도 끝도 없고 파도를 통해 지극한 끝자락만 보여줄 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이다. 그러니 바다는 일심(一心)이요 진여실체(眞如實體)다. 이를 향하여 게는 뻘밭을 기는 고행을 감행하여 바다에 이른다.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고행의 선정을 하는 수도승처럼.

마침내 게는 바다에 이른다. 고행을 하여 모든 삿된 집착에서 벗어나니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불가의 표현대로 파사(破邪)가 곧 진리의 드러냄, 현정(顯正)이다. 게는 뻘밭을 기는 고행을 통해 무념과 무상의 경지에 이르고 이는 자연스레 현정으로 이어진다.

허나 깨달음이 곧 집착이다. 깨달음이 집착임을 아는 데서 선은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한다. 집착을 깨고 바라보니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하늘이 바다라. 게는 사다리를 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붕에 이르려면 사다리를 오르되 사다리에서 내리라고 일렀던 비트겐슈타인이 떠오르지 않는가? 배든, 사다리든, 선에 이르려면 방편이 필요하다. 게가 방편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방편 삼은 사다리도 버려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순간에 있다. 사다리를 버려야만 지붕에 오른다. 언어는 방편일 뿐, 모든 말을 버려야 참에 이른다. 사다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게는 게좌(座)가 된다. 이제 지상을 떠나 우주의 운행에 따라 움직이니 게좌는 도(道)다,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가리지 않고 빛을 비추니 부처다. 그렇듯 깨달았다고 하는 순간 깨달았다는 그 생각조차 버려야 선은 진리에 이른다. 우리의 헛된 육신은 부처가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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