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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변호사의 실크로드 견문기]②

기자명 법보신문

천년 만에 깨어난 막고굴엔 과거의 영화가 가득

 
<사진설명> 세계 최대의 화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 막고굴(법보신문 자료사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점이었던 시안에는 화려했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것이 남아 있다. 특히 불교사원과 큰 규모의 탑이 많은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 유입과 당시 조정에서 불교를 숭상했던 상황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안은 뭐니 뭐니 해도 현장법사와 진시황제의 병마용, 양귀비로 친숙하게 알려진 곳이다. 그런 탓으로 시안에는 6, 7세기에 조성된 뜻 깊은 대찰이 하나 둘이 아니다.

시안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대안탑을 찾았다. 대안탑은 자은사에 있는 네모꼴의 탑으로 높이가 7층, 64m에 이르러 시안의 이곳저곳에서 쉽게 눈에 띤다. 원래 자은사는 당고종이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서기 648년에 조성한 절이다. 자은사(慈恩寺)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당서유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장법사 현장은 16년에 걸친 인도에서의 구도수학을 마치고, 서기 645년에 귀국하면서 많은 불상과 무려 657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와 직접 그 경전들을 한역했다.

이때 현장법사가 가지고 온 경전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지은 탑이 바로 대안탑이다. 그러나 현재 대안탑의 내부는 거의 비다시피 되었고, 안에는 맨 위층인 7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탑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시안 시내가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자은사에 대안탑이 있다면 천복사에는 소안탑이 있다. 천복사는 당중종이 그의 아버지 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기 684년에 지은 절이다. 소안탑도 중국의 고승 의정이 무려 20여 년 간이나 인도에서 구법수학하고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많은 불경을 보존하기 위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소안탑은 대안탑과는 대조적으로 수려한 곡선미를 지닌 여성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높이는 15층 45m였으나, 16세기 샨시성 지진으로 두 개 층이 무너져 지금은 13층 42m다. 이 탑은 상층이 무너진 뒤에도 보수를 하지 않아 당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흥교사는 당태종이 건립한 절로, 삼장법사 현장과 그의 2대제자 규기와 원측의 유골을 모신 곳이다. 흥교사의 정원에는 현장법사의 탑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고승 규기와 원측의 탑이 섰는데, 현장의 당삼장탑은 높이 23m의 5층 전탑이고, 규기탑과 원측탑은 각각 높이 7m의 3층 전탑으로 각각 기사탑과 측사탑이라 명기되어 있다.

실크로드 요충지 둔황에 도착 

<사진설명> 둔황석굴 건너편에 벌집처럼 파놓은 당시 수행승들의 동굴.


여기에 모셔진 원측(圓測: 613~696)은 신라 왕족으로 태어나 15세에 출가해 불법을 익히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가 고승들에게 사사하면서 수행 정진하였는데,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역경사업을 펼 때 그의 문하에 들어가 현장을 도와 역경에 종사했다. 원측 법사는 특히 유식론에 조예가 깊어 현장법사가 수제자로 아꼈을 뿐만 아니라, 칙천무후(則天武后)를 비롯한 조정의 신임도 매우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자은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명사에 주석하다가 세수 83세에 입적했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도승에게 고국과 속세의 혈육이 무슨 뜻이 있었을까 만은 7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이역에서 보낸 고단함이 오죽이나 컸을까. 1300여 년 전 이역만리에서 잠든 원측 대사의 명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시안 방문에서 크게 서운한 것이 있다면 법문사를 들르지 못한 일이다. 법문사는 부처님의 지골사리(指骨舍利)를 모신 절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시안에서 꽤 거리가 떨어졌고 다음 목적지인 둔황에 갈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시안에서 둔황까지는 시간 절약을 위해 비행기를 이용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지연되는 통에 적지 않은 고생을 하게 됐다. 원래 오후 7시에 출발 예정인 비행기여서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비행장에 나가 탑승구에서 기다리는데, 비행기가 4시간 지연돼 오후 11시에야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경에서 같이 온 안내자에게 준비 소홀을 항의했고, 그가 한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공항에 인접한 항공사의 호텔로 가서 쉬기로 했다. 호텔로 이동해 약 1시간 가량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곧 뜨니 짐을 챙겨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허둥지둥 내려가 다시 공항으로 가서 지정된 탑승구로 가니 이번에는 탑승구가 변경됐다고 한다. 변경되었다는 탑승구로 가서 조금 있자니 탑승구가 또 변경됐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흔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이곳에서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 후에 겨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다 보니 둔황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 날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였다.

다소 고생은 됐지만, 둔황에 왔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그곳의 삼대 명물인 막고굴, 명사산과 월아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둔황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의 동쪽 끝자락이 만나는 곳에 있는 사막 가운데 큰 오아시스다. 둔황은 실크로드가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 요충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거창한 둔황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둔황석실 또는 둔황천불동으로 불리는 막고굴은 1900년 6월 25일 그곳에서 수도하던 왕원록이라는 도인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약 10세기만에 잠에서 깨어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막고굴이 지닌 풍부한 불교미술과 문화사적 가치는 둔황학을 만들어냈다. 막고굴은 꽤 높은 사막의 모래언덕인 명사산의 동쪽 기슭 바위 층을 뚫어 만든 석실에 불상을 조성하고 벽화를 화려하게 그려놓은 곳이다. 둔황석실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경까지 조성된 인도의 아잔타석굴에 착안해 4세기부터 10여 세기에 걸쳐 약 1000개의 석실이 조성됐다.

둔황석실 가까운 곳에는 당시의 승려들이 거처하며 수행하기 위해 파놓은 조그마한 석실들이 마치 벌집을 연상시킬 정도로 많이 조성돼 있다. 당시 구도승들이 정진하는 모습이 아련히 눈앞을 스쳤다. 둔황석실을 둘러보면서 머리 한쪽을 스치는 것은 인도에 있는 아잔타석굴과의 비교에서 오는 느낌이다. 우리 범인들은 만사에 비교하는 습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탈이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아직도 그 비교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나로서야 어찌하겠는가. 3, 4년 전에 둘러본 아잔타석굴과 비교해 볼 때 석굴 자체만으로는 둔황석굴은 아잔타석굴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된 석굴 

<사진설명> 석굴속에 모셔진 초기 세존상.

우선, 석굴의 모양새가 그러했고, 암벽을 뚫어 석실을 천착(穿鑿)하는 조건의 어려움이라거나 석굴 안의 꾸밈 등이 그러했다. 아잔타석굴은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천 길 낭떠러지의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사원으로, 그 속의 기둥이라거나 불상은 모두 원래의 바위를 쪼아내서 조각한 것이어서 어느 하나 밖에서 만들어 들여간 것이 없다.

그에 비해 둔황석굴은 사막인 명사산의 뒤쪽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그 안의 불상과 구조물 등은 모두 밖에서 만들어 들여간 것 아니면, 석굴 안에서 나무와 석회석으로 조성한 것이다.

또 아잔타석굴은 기원전 1세기부터 약 400여년에 걸쳐 조상돼 석굴 안 불상과 벽화 등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반해, 둔황의 막고굴은 그 조성 연대의 탓도 있지만 후기불교의 작품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둔황석굴은 건조하고 더운 사막지대에 위치해 있는 덕에 불상이나 벽화의 색조가 비교적 온전히 보존돼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막고굴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둔황석실의 다른 이름이다. 사막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기 전 막고굴을 보기 위해서 일찍부터 서둘렀다.

이곳은 세 갈래의 실크로드가 만나는 교차점이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고, 둔황석실을 천착하게 된 것도 둔황이 차지한 실크로드의 중요한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곳에 수많은 석실을 천착하고 불상을 모시거나 벽과 천정에 불화를 그려 넣은 것은 주로 구도나 기복을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승려들의 구도의 목적에서 시작된 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후대작이나 부호들의 기복을 위해 또는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에 나간 사람의 안전을 빌기 위해 석굴을 파고 그곳에 불상을 모시거나 조소 벽화로 장식한 석실이 수를 더해가게 된 것이다.

때문에 둔황석굴은 수도와 경배의 도량인 사원의 의미에서부터 복을 빌고 가문의 번성을 비는 사당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에 깃든 의미가 다양하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하려는 연약한 사람의 심정의 발로였다는 점은 공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둔황석실 내의 불상이나 보살상과 벽화는 모두 후기 불교적인 것이고, 석굴에 모셔져 있는 보살상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당시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많이 닮은 듯한 보살상은 시주의 모습을 참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다. 아무튼 막고굴에 모셔진 불상이나 보살상은 거의 모두가 둥글둥글하며 심지어 굴의 천정조차 둥근 곡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얼굴이 그렇고 손도 도톰해서 둥글어 보이며 키가 일반적으로 작달막하여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상이 둥글다. 혹시나 모나지 않고 둥근 지구를 비롯한 천체와 우주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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