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변호사의 실크로드 견문기]③
[이상규 변호사의 실크로드 견문기]③
  • 법보신문
  • 승인 2008.01.2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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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사막 위서 불국토를 꿈꾸다

 

<사진설명> 막고굴과 함께 둔황의 대표적 명물인 명사산과 월아천. 명사산 안쪽 초승달 모양의 월하천은 3000년 동안 단 한 번도 모래에 덮인 적이 없다(법보신문 자료사진).

인상 깊었던 석실 몇 곳을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16호굴과 17호굴이다. 17호굴은 16호굴의 용도(甬道) 북벽에 위치해 있는데, 장경동(藏經洞)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막고굴 가운데 제일 먼저 발견돼 발굴한 곳이다. 17호굴을 장경동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곳에서 수 만점에 이르는 귀중한 경서(經書)와 문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바로 이 17호굴에서 발견됐다.

신라의 승려인 혜초는 20세 무렵인 서기 704년 구법에 뜻을 두고 당 나라로 건너가 인도 밀교승인 금강지 법사에게 사사했다. 스승의 권유로 723년 인도로 건너간 혜초 스님은 약 4년에 걸쳐 인도의 불교 성지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방을 두루 살피며 수행했다. 스님은 구마라집의 고향인 구자왕국을 거쳐 727년 다시 장안에 입성했다. 혜초 스님은 당시 장안의 여러 명찰에 머물면서 밀교 연구와 전파에 전념했으며 중국의 밀교 제6조로서 밀교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혜초 스님이 우리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중국 밀교의 6조로서 보다는 그가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중국의 서역을 돌아본 견문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의 기행문으로 남긴 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바로 이 기행문을 발견한 곳이 둔황석굴의 제17호실, 장경동이다.

석굴마다 가득한 佛法의 흔적

<사진설명>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 17호굴 장경동 입구.

발길을 옮겨 328호굴로 들어섰다. 이 석실에는 거의 완전하게 그 형태가 보존된 소상들이 위치해 있다. 전면에는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돼 있고 양쪽에는 마하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가 각각 협시해 서있다. 그 앞에는 많은 협시보살이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데, 부처님 당시 마하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가 대승기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과 함께 모셨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천정과 벽면에는 연화문과 많은 나한상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고, 그 색채가 비교적 그대로 남아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428호굴은 부처님의 수하설법 모습을 묘사한 곳이다. 전면에는 나무를 형상화한 부조가 있고, 그 아래 사각의 대 위에는 결가부좌하고 앉은 부처님의 설법상이 모셔져 있다. 이 곳 역시 부처님의 좌우 협시에는 마하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 서있다. 그 옆으로는 좌우로 줄을 지어 많은 보살들이 화려한 복식을 하고 자리했다. 수하설법도와 천불상이 벽화로 아름답게 표현돼 있는데, 그 아름다운 색채가 잘 보존돼 있어 보기에 좋았다.

248호굴에는 결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드신 부처님의 고행상이 봉안되어 있다. 무척이나 수척해 보이는 얼굴과 목에서부터 가슴 부위로 뼈가 앙상하게 들어난 것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고행상에는 어떠한 채색도 하지 않아 약간은 투박하게 느껴졌지만 그 좌우에 보살상을 세워 그런대로 분위기를 맞춰 놓았다.

둔황석굴을 둘러보면서 석실의 외부에 대한 손질이 너무 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층별로 석실을 잇는 회랑을 만들고 그 바깥쪽에 시멘트로 보호용 난간을 만들었는데, 멀리에서 보면 흡사 시골 호텔을 연상시켰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석벽에도 시멘트를 이겨 마치 근래의 건물 외관처럼 처리하거나 돌을 입혀놓아 석굴로서의 맛을 반감시켰다. 안내를 맡은 둔황연구소 연구원이라는 마 자오민 양은 석굴의 보존과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사산(鳴砂山)과 월아천(月牙泉)은 둔황의 명소 가운데 하나다. 명사산은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모래가 서로 부닥치고 날리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모래가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둔황 주변의 사막은 흙과 돌이 섞여 다져진 일반적인 토성사막과는 달리, 풀 한포기 없는 문자 그대로의 모래사막이다. 그렇기에 모래 언덕에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삽시간에 언덕의 모습이 변하고 만다. 그래서 움직이는 사막이라고도 한다.

명사산은 제법 높은 모래 산으로 되어 있고, 그곳을 오르는데도 꽤 힘이 든다. 나는 명사산의 정상 너머가 궁금해 함께 간 미국인 변호사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 너머는 크고 작은 모래 언덕이 망망대해를 연상하게 하리만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릎 가까이 빠지는 모래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꼴이 마치 장난기 많던 어릴 적을 연상케 했다.

월아천은 명사산 가까이에 있는 반달 모양의 조그마한 호수인데, 그 모양에서 온 이름인 듯 했다. 모래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월아천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로 곧 매몰되어버릴 듯 위태로웠지만 언제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월아천 곁에 녹지를 만들고 마치 일본식 건물을 연상하게 하는 제법 큰 건물을 세워놓았는데, 박물관으로 쓸 계획이라 한다. 현재 그곳에서는 차를 팔고 있다.

12시간을 달려 도착한 투루판

<사진설명> 고비 사막의 일출

둔황에서 투루판까지는 야간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워낙 거리가 멀고, 사막 한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밤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라는 설명이다. 특급열차를 탔지만 둔황에서 투루판까지는 12시간이나 걸렸다. 기차에는 식당차가 없어 우리는 둔황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나갔다. 우리가 타기로 한 기차는 둔황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시안에서와 같은 연발 걱정은 없어보였다. 사막의 밤은 매우 급격히 추워지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준비해간 옷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걱정은 단지 기우에 불과했다. 우리는 1등 침대칸을 탔는데 어찌나 난방이 잘 되는지 준비해간 옷가지가 오히려 짐스럽게 느껴졌다. 저녁 8시 20분 둔황을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투루판 역에 도착했다.

새벽에 용변을 위해 복도로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장관을 보게 됐다. 바로 사막의 해돋이를 본 것이다. 사막에서의 해돋이는 난생 첫 경험이었다. 아직 어두컴컴한 사막의 동쪽 끝이 마치 불이라도 난 듯 붉어지더니 그 한 복판에서 둥근 쟁반 같은 붉은 해가 서서히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은 과히 우주의 신비를 떠올리기에 충분할 만큼 더 없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카메라를 찾아들고 그 장관을 사진에 담았다.

투루판 역에 도착한 나는 짐짓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막 한 가운데 역 하나가 달랑 서있고, 주변에는 상가 비슷한 작달만한 건물들이 위치한 삭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현지인 안내자가 투루판은 그 위치가 워낙 낮아 철로를 부설하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이곳에 철도역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투루판 시가까지는 역에서 1시간을 더 가야한다고 덧붙였다.

투루판은 중국에서 네 가지가 제일인 곳이라고 한다. 가장 온도가 높은 곳, 표고가 가장 낮은 곳, 강우량이 가장 적은 곳, 가장 단 포도가 나는 곳이 바로 투루판이다. 특히 투루판 교외에 있는 아이딩후(艾丁湖)는 해면보다 약 150m나 낮고, 최고 기온은 섭씨 47.8도에 이르며, 지표의 최고 온도는 섭씨 70도까지 오른다.

투루판은 행정구역상 신지앙 위구르 자치구 가운데 하나인 투루판현의 중심인데, 이곳은 세 개의 큰 산맥과 두 개의 사막을 끼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 개의 산맥은 북쪽의 알타이산맥, 중간의 티안샨산맥과 남쪽의 쿤룬산맥이 그것이고, 두 개의 사막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이다. 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투루판이라는 곳은 대표적인 천험(天險)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베이징과 경도가 30도나 차이나 시간대가 달라야 하지만,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국 전체의 시간을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있어 실제로는 베이징 시간보다 두 시간 뒤진 시간을 쓰고 있다. 지방 시간이 일출이나 일몰과 맞아 생활하기에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역에서 내려 버스로 사막 가운데를 자로 그은 듯 반듯하게 난 고속도로를 약 1시간쯤 달려 투루판 시내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투루판의 외곽 약 40km 쯤 되는 곳에 위치한 가오창고성(高昌故城)은 4, 5세기에 세워진 가오창왕국의 성터를 가리키는데, 가오창왕국의 성곽은 13세기 말경 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사막 속에 묻혀 있다가, 근년에 발굴됨으로써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 사막 가운데 쭝긋쭝긋 솟아 있는 토담으로 된 성벽을 보고 당시의 규모와 왕가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은 내성(內城)과 자성(子城)으로 이뤄져 있고, 이들 전체를 둘러싼 성장(城牆)이 있었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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