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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44. 일상-충지의 ‘한중우서’ 〈끝〉

기자명 법보신문

하루 하루 부처처럼 사니 해탈 너머에 일상이 있다

배고파 먹으매
밥이 더욱 맛나고
잠깨어 마시매
차 맛이 새삼 달구나
외떨어져
문 두드리는 이 없나니
기쁘구나! 빈 암자,
한 감실에 부처와 있음이

飢來喫飯飯尤美
睡起茶茶更甘
地僻縱無人戶
庵空喜有佛同龕


<사진설명> 불교는 사후의 ‘천국’을 말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행복과 부처를 찾는다. 하루 해가 지는 이곳은 도솔천이다. 사진은 선암 스님 作.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내일 극락에 가는 것이 100% 보장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오늘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불교도가 얼마나 될까? 불교의 궁극 목표가 열반과 해탈, 깨달음, 혹은 부처가 되는 일일까?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갖고 기꺼이 자기 몸에 폭탄을 두르고 군중 속으로 뛰어든다. 다른 종교에선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 극단이 아니라도 신도들은 흔히 천국에 가려고 믿는다고 말한다.

우주 원리 규명 불교는 ‘과학’

하지만, 필자의 답은 단호히 “아니다”이다. 불교의 궁극 목적이 극락왕생에 있다고 하면 할수록 불교는 깨달음에서, 마음 공부에서, 참나(진아.眞我)에서 멀어진다. 대신, 중생을 허망함과 미혹의 늪에 빠지게 하는 혹세무민의 이데올로기와 가까와진다. 우주 130여 억 년 역사에서 인류의 문명사는 1년으로 환산하면 12월 31일 11시 59분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이 어찌 그 전의 모든 일을 다 전지전능하게 주재하신단 말인가. 이와 더불어 몇 가지 이유로 리차드 도킨스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만들어진 신’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그가 불교에 대해서는 칼날을 거둔다. 열반과 해탈, 부처가 되는 일마저 삿된 집착이라며 깨자고 하는 것이 불교의 한 차원 높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의 우주의 궁극 원리에 대해서도 규명하려 하고 그 원리를 깨닫는 것과 부처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과학’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이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바로 이곳이 도솔천이듯, 살아남은 자, 살아있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일상이다. 일상을 행복하게 잘 살라고, 일상에서 망령되고 삿된 것에 흔들리지 말고 깨달으며, 일상에서 부처처럼 살라고 부처의 말씀과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연기론과 공과 깨달음 등 그동안 이 연재에서 말한 모든 것을 죽음과 미타찰의 왕생이란 것에 응축하여 말하면서, 죽은 나무에 봄이 되면 물이 오르고 싹이 돋듯, 죽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듯 이 연재의 각 편들이 순환함을 보여주며 이 연재를 마치려 했다. 하지만, 바로 며칠 전 문득, 죽음과 해탈 저 너머에 일상이 있음을 깨달았다. 시를 통해 불교철학을 설명하려는 이 연재에서 깨달음과 죽음 다음에, 마지막 편으로 ‘일상’을 다루는 이유다.

옆은 충지(止)의 『원감록圓鑑錄』에 나오는 시, 「한가한 중 뜻밖의 글쓰기(閑中偶書)」다. 승찬(僧璨)이 선시로 표현한 대로 “말 많고 생각이 많으면/한층 진여에서 멀어지는 것이며/말을 끊고 생각도 끊으면/어디에 있든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多言多廬/轉不相應/絶言絶廬/無處不通)”이다. 선은 모든 말과 생각을 끊어버리고 그 너머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불에 달군 돌을 입에 물고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선정을 하고, 모든 삿된 것과 허망한 것을 산산이 부숨은 당연하고 부처도, 선사도 목을 치는 단호함으로 깨달음에 이르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 그것마저 집착이라 철저히 부수고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화로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자신의 팔을 자르고 수십 년을 면벽수도하는 그런 고행과 결단 속에서 선의 꽃은 피어났다.

하지만 선의 길이 그런 엄정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조는 평상심이 바로 도라 말한다.(平常心是道) 『조당집』 제5권 「용담숭신장(龍潭崇信章)」에 나오는 일화다. 용담이 도오(道吾) 선사를 여러 해를 시봉했는데도 별 가르침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 용담은 이에 어느 날 “화상께서는 불법의 심요(心要)를 가르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항의성의 질문을 한다. 그러자 도오 선사는 “자네가 온 이래 불법의 심요를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네.”라고 답하였다. 용담이 그게 무엇이냐고 재차 묻자, 도오는 “네가 차를 가져오면 나는 차를 마시고, 네가 밥을 가져오면 나는 밥을 먹고, 네가 인사를 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자네에게 심요를 보이지 않은 곳이 어디인가?” 용담이 그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하자, 도오는 다시 말하였다. “보려고 한다면 당장에 보거라.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그 일상에 바로 본래심이 있고 부처가 자리한다.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행주좌와하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장소다. 임제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隋處作主 立處皆眞), 곧 어디에 머물든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진리이다.”라고 말한다.

나 서있는 여기가 도솔천

진속불이(眞俗不二)란 말대로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중생 속에, 바로 내 안에 부처가 있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가 누구든 그 부처를 만난다. 이 순간 이 사바세계가 바로 해인삼매가 되며, 일상생활 자체가 법성 삼매가 된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다.

아직 덜 깨달은 자는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이 뭘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깨달음의 길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자고 싶어 자고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배고플 때 자연스레 밥을 먹으며 그 곳의 맛을 음미하니 일미(一味)를 깨닫고, 잠깨어 일어나 차가 당길 때 차를 마시니 차 맛이 더욱 달고 그 맛에 빠져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에 이르니, 조주의 ‘차 한 잔 마시게’ 공안을 알 듯하다. 외떨어져 홀로 일상의 맛과 의미를 즐기니 문 두드리는 이는 하나 없는데, 그 속에서 환희심에 이른다. 어린 아이가 봉을 쥐고 있으면 하루 종일 쥐고 있어도 아프지 않듯, 무위(無爲)에 처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는 자는 참나를 만난다. 수백 권의 경전으로도 자유로운 참나를 찾은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庵空喜有佛同龕! 직역하면 “암자는 비고 같은 감실에서 부처와 있음이 기쁘도다,”이다. 이를 시의 운에 맞게 “기쁘구나! 빈 암자, 한 감실에 부처와 있음이”로 의역하였다. 일상이 바로 도이고 무위의 참나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았으니, 물리적으로 부처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처가 되어 그 부처와 일상을 사는 내가 함께 한 감실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깨달음은 오위(五位) 중 겸중도(兼中到), 현상계와 진실이 완전히 어울리는 단계다. 다시 산이 산이요 물이 물인 경계다.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일상에서 아무런 장애도, 거리낌도 없이 자유로이 진아를 만난 자, 그가 바로 부처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재를 마치면서


무엇보다도 그동안 많이 모자란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매번 마감시간을 지나 간신히 금요일 저녁 조판 직전에나 원고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지면으로 만들어준 남수연 기자를 비롯한 법보신문 관계자들께도 감사한다. 이재형 기자에게 청탁을 받고 7년 만에 약속을 지킨 면에서는 마음이 흐뭇하다.
목적 대비 결과로 보면 허전하고 가슴 한 켠이 아리다. 불교의 개념을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하고 시라는 감성의 언어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보완하며, 시를 읽는 가운데 즐겁게 불교의 차원 높은 형이상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연재의 처음 목적이었다. 이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으리라 본다. 그 괴리는 아둔한 필자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마시고 슬기로운 독자 여러분의 자유로운 읽기로 채우시기를 바란다. 설정한 개념에 맞는 시를 찾지 못하여 필자가 직접 쓴 시를 몇 차례나 대상으로 하는 오만도 부렸다. 이 점 너른 마음으로 용서를 바란다. 읽는 독자들께서는 그렇지 않으셨겠지만, 매주 마감 전에 글을 보내는 일이 압박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개념에 맞는 시를 찾고 이를 해석하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부처님의 가피, 조판을 하는 순간까지도 원고 독촉을 하지 않는 부처님 같은 편집자의 너그러움, 전화나 이메일로 보내주신 독자들의 격려 때문이리라. 더욱 송구스럽고 감사한 마음이다.『유심』 지에 「詩와 禪, 비단꽃과 옥도를 주고받다」라는 글을 쓰면서 썼던 말로 마무리한다.
“옥도(선)의 예리한 칼날로 시를 자르고 잘랐네. 언어의 비수, 피를 흘린 뒤의 황홀감. 비단꽃(시)의 아름다움에 홀려 선을 맛보았네. 온 세포들의 떨림, 떨림 뒤의 텅 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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