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불교사] 47 ‘정화운동’의 법정 공방

기자명 법보신문

법정 공방 끝
정부에 의해
통합종단 출범

대법원 앞에 운집해 결의문을 낭독하는 비구승과 신도들 모습. 1960년 11월 대처측이 승소하자 비구측은 대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청사로 진입하였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승려가 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진제공=민족사
‘정화운동’은 1955년 8월 4일 ‘왜색승려는 물러가라’는 이승만의 제7차 담화 발표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비구승들은 8월 12일 조계사에서 문교·내무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헌을 개정하고, 설석우를 종정으로 추대한다. 당시 종정은 송만암이었으나 비구측에서 대처측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서 보조종조설을 주장하자 이러한 처사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비난하면서 사퇴했다. 그러자 비구측은 종정마저 불신임하였다.

승려대회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의 사찰 접수를 시작한 비구측은 1년여의 투쟁 끝에 많은 사찰을 확보하였다. 문제는 비구승들이 사찰을 확보한 이후 새로운 사찰을 관리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데 있었다. 당시 선학원 측에서 파악한 비구승의 수는 약 800여명이었는데 대처승과 싸워서 얻은 수백 개의 사찰에 주지로서 교학에 밝고 계율을 지킬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승려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비구승들은 전국의 전통 있는 623개 사찰을 골라 주지를 내정하였으나 실제로 문교부에 인가를 신청한 것은 19개 사찰에 불과하였다.

다음으로 비구승들이 당면한 문제는 식량난이었다. 쫓겨나는 대처승들이 절에 식량을 남겨 놓지 않아서 당국에 구호를 호소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사찰을 재단으로 하여 운영되는 기업체가 가동 중단의 사태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해방 직후 불하받은 적산재산 가운데 공장·극장·회사·운수업 등의 기업체는 알려진 것만 하여도 13개가 넘는데 이들 기업체의 인수는 교착상태에 빠지는 등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비구·대처의 분쟁은 1955년 하반기부터는 물리적 충돌에서 법정공방으로 전환된다. 대처측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 및 불교정화대책위원회의 결의가 무효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여 1956년 6월 15일 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이 결의가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을 들어 감독 관청의 간섭을 부당한 것으로 판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구측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서울 고등법원에 항고를 한다.

서울 고등법원은 대한불교의 정통이 비구측에 있느냐, 대처측에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비구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결국 이 문제는 대법원까지 넘어갔고, 대법원은 1960년 11월 24일 판결은 내리게 된다. 판결이 발표되기 전 17일부터 전국에서 모여 든 비구·비구니 약 1000여명은 ‘불법에 대처승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하는가 하면 밤에는 조계사 법당에서 단식투쟁과 철야정진을 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처측에 승소 판결을 내리고 사건을 재심하도록 고등법원으로 환송한다. 대법원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던 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데 있었다. 대처측은 비구측을 관변 단체로 규정하고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사태를 부정하였다. ‘정화운동’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이 무너졌으므로 무효라고 하였다. 따라서 종단은 분규가 발생하기 이전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법원의 판결이 대처측의 승소로 내려지자 비구측 승려들은 법정에 난입하였고, 이 가운데 333명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날 법정에 진입한 비구승 가운데 6명이 대법원장 비서실에서 대법관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할복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교계 내부 문제가 법정 소송으로 비화되어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오랜 시간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삼보정재가 소송비용으로 탕진되었다. 그간 물리적인 충돌로 악화되었던 양측의 감정은 법정에서 상대편을 비난함으로써 더욱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대처측에서 종권회복을 위해 반격에 나선 것을 보도한 1960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4·19혁명의 여파로 정국과 불교계의 상황이 혼미한 가운데 1961년 5·16군사 쿠데타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무너지고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정국을 장악하고 불교계에서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75건에 달하는 소송을 일체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군사정군은 종교단체 등록 법을 적용하여 해결하려고 하였으니 비구·대처 양측은 모두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등록을 신청하였기 때문에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불교계의 분쟁 수습을 위해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여 해결하기로 한다. 불교재건위원회는 양측에서 추천한 자 가운데서 종교단체 심의위원회가 제청한 자 5명과 심의회에서 추천한 자 3명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발족 후 1개월 내에 불교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여 모든 분쟁을 수습하기로 하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1월 12일 불교계 분쟁을 자체 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할 기회를 부여하겠지만 만약에 이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묵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경고가 담긴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에 불교재건위원회는 양측에서 각각 15명씩으로 불교재건비상종회 구성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불교재건비상종회는 2월 22일까지 새 종헌을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고 종명·종지 등 제반사항은 합의를 도출하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승려 자격 문제를 놓고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당국에 일임하고 말았다.

문교부는 승려 자격을 사찰에 독신으로 상주하면서 수도와 교화에 전념하는, 가족 부양에 책임이 없는 자만을 승려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완전한 권한을 가질 수 없는 비정상적인 승려로 인정한다고 규정하였다. 비정상적인 승려는 포교사 및 주지 서리 등 직책에만 취임할 수 있고, 정상적인 승려가 가지는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결국 승려 자격 문제는 대처측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에서 1962년 4월 비구·대처가 함께 참여한 통합종단이 탄생하였다. 통합 종단의 종명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며, 종헌에 신라 도의국사를 개창조로 하고, 고려 보조국사를 중천조로 하며,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한다고 천명하였다.

종정에는 비구측의 이효봉이, 총무원장에는 대처측의 임석진이 선출되었으며 간부들은 양측이 동일하게 나누었다. 통합종단을 구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불교재건비상종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종회가 구성되는 시점에서 의석 배분 문제를 놓고 비구·대처측은 또 다시 격돌하였다. 의석 배분을 32:18로 비구측이 과반을 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되자 대처측은 격분하여 종회에 불참하고 종단의 간부들도 사퇴하였다. 나아가서 통합 이전의 상태로 환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처측이 서대문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을 설립함으로써 종단은 또 다시 양분되었다.

이 갈등은 대처측에서 1964년 8월 불교재건비상종회의 결의안이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법정에서 시비를 다투게 된다. 처음에 비상종회는 비구·대처측 각각 15명씩으로 조직되었으나 양측 의원 수가 같은 관계로 종헌을 의결할 수가 없었다. 문교부는 대안으로 비구 5명, 대처 5명, 사회인사 5명으로 의원 수를 감축하는 회칙을 개정하였다. 그 후 대처측은 사태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동년 3월 22일에 개최된 종회에 불참하여 비구측과 사회인사 5명이 참여한 가운데 종헌을 제정하고, 종정을 추대하였다.

법원은 1심에서 종회 의원을 30명에서 15명으로 감축한 것은 문교부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이며, 의원도 아닌 문교부 문예국장이 참석한 점 등을 들어 원고측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비구측은 항고를 하였고, 고등법원은 비구, 대처, 사회인사로 의원을 감축하는 비상종회에 대처측도 참여하였으므로 그 후에 대처측에서 불참하였다고 하더라도 종회 결의는 유효하다고 판결하였다. 대처측은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비구승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통합종단은 불교계 분쟁을 교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공권력이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위협에 못 이겨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와해될 위험이 내재 되어 있었다. 더구나 법정 공방이 지속되면서 불신의 벽이 두터워져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렇게 양측 대립의 골이 깊어가자 비구·대처측은 화해와 타협의 방안을 찾기 위해서 1965년 3월 화동위원회를 만들어 대화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