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칼럼]타력과 자력은 불이(2)
[김형효 칼럼]타력과 자력은 불이(2)
  • 법보신문
  • 승인 2008.07.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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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기도는 神人合一 철저히 부정
1인칭 사라지고 2인칭만 남는 게 불교

기도는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이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쉬운 방편이다. 그 기도가 님을 부르게 한다. 간절히 님을 찾는 인간은 중생(불교)이고 죄인(기독교)이다. 한국 선불교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너무 쉽게 설파한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은 본질적인 차원의 이야기지, 실존적 차원의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실존적 중생의 수준에서 종교를 믿는다.

박세일 교수는 불교가 중생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옳은 말이겠다. 그의 주장은 한국불교가 공급자 중심의 과거식 불교가 아니라, 소비자 중심의 미래적 대중불교로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나는 이 칼럼을 통하여 한국불교가 너무 선근본주의(선원리주의)에 젖어 일시에 확철대오하려는 일에 매달려 어려운 득도의 그날을 겨냥하다가 한계상황의 구체적 제도(濟度)를 외면하여 대중들을 뜬 구름 속에 헤매게 하는 공허함에 빠지게 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선의 수행법을 결코 등한히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곧 선이라는 청화(淸華) 큰 스님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기도는 필연적으로 무한한 힘인 인격적 님을 그리워한다. 그 님이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도덕적 복종을 요구하는 님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합일을 요구하는 님이다. 전자는 님과 자아와의 사이에 주종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전제하고, 후자는 존재의 융합을 가리킨다. 전자가 기독교적 기도의 구조고, 후자가 불교적이다. 철학적으로 기독교는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기독교는 각각 개별적인 존재자로서 주재자인 하나님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내가 종속인으로서 하나님에게 도덕적인 절대복종을 바치는 대가로서 나는 나의 결핍된 욕망을 보상받는다고 여긴다. 기독교는 타력종교로서 오로지 소유론적 욕망의 형태를 떠나지 못한다. 소유론적 욕망은 꼭 물질적인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정신적인 욕망도 소유론적이다. 영생이 복종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사고방식도 영생을 내가 목적(목적어)으로서 소유하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기도는 신인(神人)합일을 철저히 배척한다.

불교적 기도의 극치는 소유론적 욕망의 결핍이 채워지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다. 소유론적 욕망은 일단 충족되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갈증을 낳는다. 돈과 명예도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남녀의 정신적인 사랑도 새로운 욕망으로 이전하든지, 아니면 사랑의 새 요구를 까다롭게 내놓는다. 두 연인간의 사랑도 낭만주의자들의 공상과는 달리 영원히 합일되지 못한다. 소유론적 욕망은 늘 더 큰 욕망을 낳는다. 불교는 소유론적 욕망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 아니고, 내가 오직 부처님과 일체가 되는 불인합일의 존재론적 욕망만이 진정한 기도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존재론적 욕망은 내가 내면적으로 부처님과 합일되는 간절한 발심을 말한다. 거기에서 일인칭 나는 사라지고, 나는 부처님처럼 이인칭이 된다. 도덕종교에 불과한 기독교는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일어섰다. 그러나 존재론적 종교로서의 불교는 자기가 이인칭 ‘그대’가 되면, 내 이웃만이 ‘그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일체 존재가 다 ‘그대’로서 하나의 공통적 존재방식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존재자적으로 하나님/인간/동물/식물/자연물 등이 개별적으로 나누어지지만, 불교에서 삼라만상이 다 ‘그대’로 여겨진다. 우주에서 일체가 일체에 대하여 ‘그대’로 보는 우주심은 우주법으로서의 삼인칭 단수 중성대명사 ‘그것’과 다르지 않다.(계속)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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