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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과 의의

기자명 법보신문

계속된 소송과 항의…해방 후 30년 만에 일궈낸 쾌거

1945년 미군정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날을 공휴일로 지정
교계, 통합종단 출범 이후 줄기차게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 촉구
1973년 용태영 변호사 독자 소송…목숨 걸고 박정희 결단 이끌어 내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는 ‘대한불교’ 기사와 경축 강연회. 사진제공=민족사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소송 공판을 마치고 조계사를 참배한 불자들의 기념사진.

‘부처님오신날’은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어 불교도들은 사찰을 찾아 등을 밝히고,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불법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해방 후 30년 세월이 걸려서 이루어 낸 쾌거였다. 크리스마스는 해방되던 1945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는데 그것은 해방군으로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한 미군정이 미국의 축일을 그대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3%에도 못 미쳤다. 크리스마스는 해방 되고 수립된 제1공화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기 때문에 여전히 공휴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었고,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던 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은 공휴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형평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의 공휴일 제정에 관한 논의는 해방 직후부터 있었다고 한다. 조계종단에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운동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인 1963년이다. 총무원은 1963년 1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제정 건의문을 정부에 발송하였으나 당시 주무 부처인 문교부로부터 불가 회신을 통보 받았다. 답변 요지는 국교가 없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나라에서 특정 종교의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 것은 범세계적인 추세인 까닭에 현실적으로 대내외적인 여건을 고려해서 제정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교부의 회신을 받은 조계종단은 초종파적으로 이 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청담 스님을 선출하였다. 추진위원회는 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그 해 5월까지 50만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전달하였다.

1964년 2월 추진위원회는 명칭을 ‘부처님 탄일 공휴일 제정운동 추진위원회’로 정하고, 부위원장 약간 명과 총부·기획·재정·선전·섭외부 등을 두는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양력으로 할 것이냐, 음력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불교계 내부에서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진각종과 원불교에서는 양력으로 봉축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결국 광범위하게 각 계 각 층의 설문을 조사한 결과 음력으로 결정이 되었다. 음력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이견이 있었으나 이미 추석이 음력 8월 15일로 정해진 까닭에 절차상의 문제는 없었다.

추진위원회는 건의서를 종교계를 관할하는 주무 부서인 문교부와 공휴일을 지정하는 주무 부서인 총무처에 함께 제출하기로 하고, 언론사에도 보도 자료를 배포하였다. 이런 가운데 1966년 4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김선흥이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 중 기독교 성탄절 무효 확인 소송’을 서울 고등법원에 제소하였다. 소장의 요지는 성탄절을 공휴일로 제정한 것은 대미 종속 관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청년들의 성 풍속의 문란을 조장하며, 기독교 보다 신도가 훨씬 많은 부처님오신날은 공휴일이 아닌데 기독교의 성탄절만 공휴일인 것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정신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불교신문」은 5월 22일자로 ‘불탄일을 경축일로 정하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교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정부 당국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 재판의 판결은 결국 원고에게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원고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이 없기 때문에 재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선흥의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교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불자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과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용태영이라는 변호사가 등장하며 그로 인해서 이 사안을 관철될 수 있었다. 용태영은 김선흥이 소송에서 실패한 까닭이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취소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고, 그 보다는 원고가 얻고자 하는 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소송의 주역 용태영 변호사.

1968년 초파일을 앞두고 조계종 봉축준비위원회는 주요한 사안 하나를 결정한다. 그것은 ‘부처님오신날’의 명칭이 통일한 것이다. 종래 ‘석탄일’·‘불탄일’·‘부처님 탄신일’·‘석가세존탄일’ 등 다양하게 불리던 명칭을 앞으로는 ‘부처님오신날’로 부르기로 공식적으로 합의를 하였다. 1970년 7월에 개최된 임시중앙총회에서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이 운동을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지만 조계종단에서 진행하던 이 일은 타결책을 찾지 못하고 탄력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1973년에 들어서서 불교계는 한 사람의 의인을 만나게 되는데 용태영 변호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한국 변호사협회 회장이었던 그는 3월 24일 서울 고등법원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등 확인 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그는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사람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동생이 폐병에 걸리어 공부를 계속하기 힘들게 되자 동생의 책을 받아서 1956년 1월에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그는 필수과목이던 국사를 공부하던 중에 한국 사상의 원류는 불교에 있으며, 문화재의 80% 이상이 불교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어려운 사법시험의 관문을 불과 200여일 준비한 끝에 그 해 연말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그는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 풀리지 않는 현실을 보고 서울 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초기에 그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 어려운 투쟁을 외롭게 전개하였다고 한다. 9월 26일 2차 공판이 있은 다음 10월 21일자 「불교신문」은 사설을 통하여 모든 불교인들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법정 스님이 썼다고 하는 이 사설은 말미에서 외롭게 투쟁을 전개하는 용 변호사를 글 쓰는 사람은 글로써 말을 할 사람은 말로써 시간이 허용하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또는 법정의 방청석에 나가서 그를 격려하고 위안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설이 도화선이 되어 3차 공판이 진행되던 10월 31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 온 2,000여명의 불자들은 법원으로 몰려갔으며 이후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부산, 울산, 광주 등에서 신도들이 성원을 하였다. 11월 28일 총무원장 경산은 19개 종단이 참여한 한국불교회장 자격으로 보조 참가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소송은 용태영 개인 차원을 넘어 모든 불교계가 동참하는 집단 소송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불교법조인회가 1974년 3월 28일 서울 고등법원에 동일한 건이지만 별도의 소송을 제기해 주었다. 법원은 이 건을 용 변호사 건과 함께 심리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계불교도연맹(W.B.F) 일본지부와 재단법인 일본불교회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결의문을 법원에 제출하였다. 이 결의문은 당시 일본에 있던 김지견 동국대 교수를 통하여 용 변호사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은 국제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10월 30일 서울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각하시켰다. 그 까닭은 사법부는 행정권의 행사가 있은 이후에 그 적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원고가 먼저 행정부에 공휴일 제정 신청을 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그 위법성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태영은 즉시 상고를 단행하였지만 그 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한다. 더구나 어떤 사람은 그에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불교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세상인심의 야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서를 보낸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시국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던 시기였다.

그는 시국사법으로 구속된 203명을 즉각 석방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시국 사법은 대학 교수·목사·대학생들이었지만 이들은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가톨릭과 기독교계는 경악하였다. 자신들이 엄두도 못낸 일을 이교도인 용태영이 목숨을 내놓고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계는 용태영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하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건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용태영은 박정희를 궁지로 몰면서 기독교를 껴안은 것이다.

이 건의서는 일본의 아사히(朝日)·마이니치(每日)·요미우리(讀賣) 신문 등 유력 일간지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되지 못한 것은 가톨릭과 기독교계 그리고 미국의 압력이 강한 측면이 있었는데 그들이 지지 성명을 내었으니 정부 당국으로서도 마음이 가벼워진 셈이었다. 박정희는 1975년 1월 14일 심야에 관계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부처님오신날과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제정할 것을 통과시키고 이튿날 발표하게 하였다. 부처님오신날의 공휴일 제정은 불교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불교계에서 부탁을 한 적도 없는 법명도 없고, 절에 나가지도 않은 한 의인의 활약으로 이루어 진 셈이다.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불자가 되었다고 하며, 이 공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으로부터 2007년 불자대상을 수상하였다. 인사가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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