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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랑 박사의 율장 속 부처님 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다인어(多人語)-승가의 다수결 원칙

다수가 동의해도 여법하지 않을 땐 부결
정법 통해 화합 이루려는 승가 이념 반영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에 다수결의 원칙이 있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로, 각종 이익 단체가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선(善)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수적인 의미에서 다수가 동의하는 이익이 선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 한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승가에도 대립하는 사안에 대해 출가자들이 투표로 결정하는 다수결의 원칙이 존재한다. 7멸쟁법(滅諍法) 가운데 하나인 다인어(多人語, yebhuyyasika-)인데, 율에 따라 다멱비니(多覓毘尼)라 표현하기도 한다. 율장에 의하면, 승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쟁사(諍事)는 4종으로 각 쟁사의 내용에 따라 7가지 해결법이 있다. 이 다인어는 주로 법과 율에 관한 해석의 차이를 둘러싸고 발생한 쟁사에 적용되는 것으로, 기본적인 멸쟁법으로 의견 조정에 실패했을 경우 투표를 통해 쟁사를 가라앉히고자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투표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일견 현대의 다수결 방법과 유사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인어의 경우, 무조건 다수의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 아닌, 반드시‘여법설자(如法說者)들의 의견’이 다수가 되었을 때만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 때 여법설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인물은 바로 승가의 갈마를 통해 엄격한 기준 하에 선발된 행주인(行籌人), 즉, 투표를 실행하는 사회자이다. 이 행주인은 자신이 여법설자라고 판단한 비구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돌아가도록 투표 결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마하승기율』에서는, 투표 결과, 비법설자의 수가 많으면 해산시켜야 하는데, 만약 비법설자들이 그것을 눈치 채고 해산하지 않으려고 하면 정사 근처의 빈집에 불을 놓아 모두 흩어지게 한 후, 그 틈을 타서 다시 근처에 사는 여법설자들을 불러 모아 투표를 해야 한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다수의 여법설자에 의해 해결된 쟁사의 결과만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강고한 입장이다.

다수의 의견을 채택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행주인이라는 특정한 비구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반영하는 이 방법은 한 개인의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일견 공정하지 못하게 느껴지며, 또 그로부터 야기될 위험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승가는 부처님이 남긴 법과 율을 최고의 선으로 삼고 수행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아무리 다수의 의견일지라도 비법비율(非法非律)일 경우에는 타협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아무리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교법과 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때는 소수가 다수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가는 용기로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승가 다수결의 원칙인 다인어야말로 특별한 기준 없이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지배해 버리는 현대의 다수결에 비해,‘여법(如法)’위에서 화합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승가 공동체의 이념이 잘 반영된 멸쟁법이라 생각된다.

이 다인어라는 멸쟁법을 통해 우리는 승가에서 법과 비법, 율과 비율을 명확히 구분하여 승가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탐·진·치나 두려움과 같은 삿된 감정에 사로잡혀 비굴하게 사욕을 부리지 않고, 오로지 법과 율에 근거하여 냉철하면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감을 잃지 않고 항상 빛을 발하는 사람, 그런 훌륭한 지도자가 곳곳에서 승가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고 싶은 때이다.

이자랑 도쿄대 박사 jarang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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