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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한국 불교계의 굴욕 10·27법난의 진상

기자명 법보신문

전두환, 쿠데타 집권 후 불교계 희생양 삼아

 
1989년 10월 27일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개최된 10·27법난 진상규명을 위한 실천대회. 사진제공=민족사

80년 조계종총무원을 비롯 전국사찰 군화로 짓밟아
고문으로 없는 비리 조작…죄없는 스님들 감옥 보내
교계, 6월 항쟁 이후 진상 촉구…민중 불교운동 계기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서 계엄군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해서 전국의 사찰을 일제히 수색하였다.
그들은 군화를 신은 채 법당을 유린하고 승려들을 연행하였다. 다음날 신문 지상을 통하여 발표한 명분은 대공 용의자와 사회정화 차원에서 비리·범법자 승려를 검거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군부는 ‘45계획’이라고 명명하였고, 불교계에서는 10·27법난이라고 규정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정부 당국의 사과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한다.

10·27법난은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자 군부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불교계를 희생양으로 삼아 본때를 보이겠다는 위협의 산물이었다. 10·27법난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내인과 외인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내인으로는 1954년부터 시작된 비구·대처승의 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불교계가 1970년 분종 이후에도 비구 승단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던 데 있었다.
1976년부터 시작된 소위 개운사파와 조계사파의 내홍은 결국 법정시비로 이어졌고, 결국 종단이 양분되어 두 개의 총무원으로 분립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분규는 1980년에 들어서 양측의 합의 과정을 통하여 개운사파가 주도권을 확보하고, 종회가 구성되어 총무원장에 송월주, 종회의장에 황도견 스님을 선출하고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정치권에서 간섭을 하여 조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동안 분열된 모습을 보여준 불교계가 군부 정권에 개입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당시 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 국보위) 상임 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각계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불교계에도 보안사령부 소속 군인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서 초안을 들고 두 차례나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월주 스님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월주 스님은 불교계의 수장으로서 5·18광주민주화 항쟁의 현장을 방문하여 위문금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빌미가 되어 불교계는 군부의 눈 밖에 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외인으로는 전두환이 12·12사태를 통하여 계엄군 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제거하고 하극상을 통하여 집권한 까닭에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대학가에서는 연일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던 차에 서슬 푸른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불교계였다. 불교계는 천주교처럼 로마 교황청이라는 후원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신교가 전 국민의 90%에 달하는 미국과 같은 보호 세력이 없는데다가 해방 이후 극심한 내분을 겪은 까닭에 내부 결속이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파악한 군부가 수사에 착수한 계기는 불교계의 비리를 수사해달라는 투서가 불교계 내부에서 쇄도한 데 있었다고 한다. 이 투서는 훗날 무고로 밝혀져 투서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았다.

 
10·27법난 사태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0·27법난의 지휘 계통은 국보위에서 합동수사본부(본부장 : 노태우)로 내려졌고, 집행 실무책임자는 김충우 합수단장이었다. 이들이 불교계 수사에 착수하여 밝혀낸 죄상과 대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승려들의 부정 축재 행위를 밝히고 자금을 환수한다. 둘째, 사음 행위한 승려를 색출하여 사회를 정화한다. 셋째, 범죄자들의 은닉처로 활용되는 사찰을 검색하여 불량배를 소탕한다. 이러한 명분으로 수사를 시작하여 나타난 결과는 이러하다. 송월주 총무원장은 불교계의 수장으로서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점을 물어 강제로 퇴임시켰다. 부정 축재 승려들 46명을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이들에 대한 처벌은 형사입건 17명, 정화위원회 회부 32명 훈방 104명으로 집계된다.

수사관들은 조사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에게 죄수용 군복을 입히고, 군화발로 걷어차면서 욕설을 퍼붓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갖은 악형을 가하여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하게 하여 비리를 조작하였다. 군부 정권은 승려들을 감옥에 수감시키거나, 삼청교육대로 보내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감내하게 만들었으며, 체탈도첩을 시켜 산문출송을 하게 만들었다. 군부가 불교계를 이처럼 짓밟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불교계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군부 정권의 이러한 탄압에 맞서서 불교계는 10·27법난의 진상규명에 나선다. 그 시기는 서슬 푸른 5공화국 정권이 지나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확보하고 들어선 10·27법난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때이다. 법난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계기는 총선에서 야당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하여 국회에서 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된 데서 마련된다. 1988년 8월 3일 5공 비리특위는 10·27법난을 국회 차원에서 조사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국회에서 불교계의 법난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를 천명하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8월 22일 개운사에서 10·27법난 진상촉구연합대회를 개최하였다.

불교계는 1988년 11월 10·27법난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 송월주)를 결성하고, 진상 규명 작업에 착수하였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책임자들로 하여금 법난의 입안과정과 수사과정 등의 진상을 국민에게 공개하고 참회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동 위원회는 진상규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같은 해 11월 민주당과 김영삼 총재를 방문하고 12월에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였다.
종단은 1988년 12월 14일 서의현 총무원장이 청와대와 문화공보부·국방부·보안사령부 등에 10·27법난 사태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정부는 1988년 12월 30일 강영훈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사과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담화문에는 진실로 사죄하는 내용이 담겨 있지 않고 ‘불교계의 자존에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든지, 피해자를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것과 불교계의 현안 사안을 해결해 주겠다는 내용은 없고, 그저 유감이라는 실속 없는 것이었다. 국회 5공 특위는 10·27법난을 공식 안건으로 채택하였으며 1989년 3월 24일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피해를 입은 송월주·이혜성·김경우·서윤월 스님 등과 법난 입안자인 이학봉·김충우 등을 증인으로 채택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 서의현)는 10·27법난이 국회 청문회에서 거론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공문을 민정·민주·평민·공화당 앞으로 발송함으로써 법난의 청문회는 무산되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서의현은 피해보상 요구 조건으로 중앙승가대학을 4년제로 승격시켜 줄 것과 불교방송국 개국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국회 청문회는 국회의원들이 정부의 책임자를 불러 놓고 실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책 수립을 요구하며 그 결과를 점검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런 자리에 10·27법난의 책임자를 세워 놓고 진상을 밝혀 불교계의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현안 사안을 해결하려는 계기로 활용하려는 총무원장의 행위는 불교계를 두 번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 불교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계가 10·27법난의 진상을 규명하려고 노력하는 그 시기에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여의 세월 동안 백담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백담사에 머무는 동안 불교계는 갖은 편의를 제공하고 법회를 열어주는 아량을 보였다. 자비는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이 평안을 얻는다는 점에서 상대와 자신이 화해하는 아름다운 덕목이다.

그러나 용서를 하려면 먼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한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고 더 큰 죄를 짓는 것을 방조하는 것이 된다. 후일 10·27법난으로 총무원장 자리를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송월주 스님은 사석에서 전두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월주 스님은 전두환에게 10·27법난을 지시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전두환은 실무자들이 판단해서 진행한 일이므로 자신은 모르며 백담사에 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신문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였던 그 사실을 대통령이 몰랐다니 말이 되는가. 전두환은 단 한 번도 10·27법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를 한 적도 없으며,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그런 자를 용서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불교계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이것은 자비가 아니고 만용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10·27법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불교계의 민중운동이 싹트는 계기를 맞게 된다. 민중불교운동은 19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회가 구성되어 기관지 『민주법당』을 발간하고 민중적 기반 위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불교의 건설을 지향함으로써 본격화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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