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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사찰패러다임_낙산사서 찾는다]②다 아는 복원, 몰랐던 의미

기자명 법보신문

540일 ‘거북이 발굴조사’로 1300년 퍼즐-청사진 완성

2005년 6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된 원통보전지.

2005년 6월 낙산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를 비롯해 건축학자, 고고학자 등 문화재관련 전문가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낙산사를 주시했다. 두 달여 전인 4월 발생한 화재로 잿더미가 된 원통보전. 그 안타까움을 가슴에 쓸어 담고 이제 그 잿더미 아래 간직돼 있는 낙산사 천년의 역사를 조심스레 열어보기 위한 역사적인 첫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산불이 낙산사를 덮쳐 원통보전이 화마에 휩싸이고 동종이 녹아내리며 전 국민의 가슴도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각에서는 ‘복원’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낙산사를 화재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 하려면 얼마의 시간과 얼마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는 식의 추측과 제안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낙산사 측은 서두르지 않았다. 화재로 남은 어마어마한 잔해를 치우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아래 간직돼 있는 낙산사의 역사를 올바로 밝히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라도 기다릴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도 인간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낸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은 “겉모습은 어느시대 누구라도 복원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낙산사의 역사와 원형을 찾아 후대에 전하는 일”이라며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곧바로 문화재전문가와 고건축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낙산사복원자문위원회가 구성되고 문화재청에서도 발굴조사단이 꾸려졌다. 1, 2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는 2006년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진행됐다.

발굴조사의 결과는 놀라웠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낙산사(洛山寺)’라는 명문이 뚜렷한 고려시대 기와를 비롯해 수많은 도기,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되기 전까지 낙산사는 다섯 시기에 걸쳐 중창되었으며 조선 초기 세조시대 낙산사의 규모가 최대에 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는 그 동안 문헌 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지던 낙산사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법맥을 유지하고 있는 천년 고찰임을 명확히 확인시킨 소중한 성과였다.

무엇보다도 발굴조사 결과는 낙산사 복원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본 토대가 되었다. 원통보전지에서 진행한 1차 조사와 원통보전 주변 건물지의 가람배치-규모 등을 면밀히 조사한 2차 발굴조사 결과, 그리고 낙산사 복원자문위원회의 자문을 토대로 2006년 12월 낙산사는 도량을 조선 초기의 가람배치 형태로 복원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는 단원 김홍도가 1778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 중의 하나인 ‘낙산사도’와 흡사한 형태였다. 겉모습만이 아닌 역사와 전통까지도 복원하는 뜻 깊은 결정이었다.

콘크리트 옹벽과 흙더미를 걷어내고 자연암반을 복원한 홍련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홍련암에 대한 복원이 서둘러 진행됐다. 복원은 홍련암 아래 절벽을 뒤덮고 있던 콘크리트 옹벽을 걷어내 홍련암을 지탱하고 있는 자연 암반을 되살리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콘크리트 옹벽과 쏟아져 내린 흙더미를 걷어내자 자연 암반의 웅장함과 함께 암반에 새겨져 있던 명문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된 홍련암을 접한 참배객들은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이곳에 홍련암을 창건할 당시의 모습이 이와 같았을 것”이라며 기쁨을 함께 했다. 홍련암 주변으로는 해당화 수천그루가 식재됐고 참배객을 위한 탐방로는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아 조성됐다.

발굴기간 1년 6개월, 현장조사일수 360여일, 출토유물 200상자. 낙산사의 복원은 새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리는 모습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671년 창건한 이래 1300여년 동안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큰 화재를 겪었다. 산불, 몽고-임진왜란 등 외세의 침입, 한국 전쟁 그리고 2005년 또다시 발생한 산불까지. 원통보전만 간신히 화마를 피한 적도 있었고 때론 도량이 전소되기도 했었다. 우여 곡절을 겪느라 사세가 축소되기도 했고 조선 세조 때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사세를 키우기도 했었다. 지난 1년 6개월간의 발굴조사는 이러한 낙산사의 발자취,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소중한 1300년 역사의 기록이었다.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은 “지난 역사를 발굴하는 것은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토대로 미래의 역사를 계획하기 위함”이라며 “발굴조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로 인해 낙산사 복원 기간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세대만을 위한 도량이 아닌 천년을 이어 후세에까지 전해질 도량을 짓는다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1년 6개월의 발굴조사는 낙산사 1300년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를 통해 낙산사는 미래 천년에 대한 꿈의 청사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밝혔다.

‘초고속’을 외치는 시대, ‘빠른 것이 곧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요즘, 낙산사가 복원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우리에게 역사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지키는 길, 그것을 올바로 이어가는 길은 무엇이며 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양양=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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