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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승 기자의 야유보완 스리랑카]6. 역사 속 사람들.〈끝〉

기자명 법보신문

욕망의 끝은 파멸뿐임을 역사 속 슬픔이 후대에 전하다

 
높이 195미터에 이르는 시기리야 록(Rock). 이 바위는 정상에 펼쳐진 바위궁전으로 유명하다.

“스리랑카 문화 삼각지라고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그리고 캔디를 말해요.”
“그런데요?”
“시기리야는 문화 삼각지 한 가운데 있습니다.”
시기리야는 스리랑카 ‘문화 삼각지’라 불리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캔디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9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산 정상에 펼쳐진 바위궁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그래서 스리랑카 여행 중 가장 구미(?)를 당기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

바위궁전이 있는 일명 시기리야 록(Rock)은 정글 속에 생뚱맞게 우뚝 솟아있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이 바위를 발견한 순간 아찔했다. 한참을 올라가야 바위 정상에 닿을 것 같았다. 막상 바위 근처에 다다르니 걱정은 더했다. 깎아지를 듯 한 절벽에 약간 녹슨 철제 계단을 통해서만 바위궁전에 오르는 중간 지점에 갈 수 있단다. 예전에는 꼭대기까지 1200개의 대리석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올라가지 못해 멈춰 서고야 말았다.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던 차에 현기증까지 밀려왔다. 멈췄던 발을 다시 뗄 수 있던 이유는 시기리야 바위궁전에 대한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시기리야 바위 위에 궁전을 지은 것은 기원전 5세기, 당시 이곳의 왕 카샤파 1세다. 그는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저수지를 만든 다투세나 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지 모를 그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동생 목갈라나가 있었다. 비극은 태생적인 차이에서부터 시작됐다. 그의 어머니는 평민이었던 반면 동생의 어머니는 왕족이었다. 그 역시 쉽게 욕심내고 화내며, 어리석은 전형적인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노심초사 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잠을 설치고 뒤척이기 일쑤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 그 어리석은 마음을 놓지 못한 그는 결국 왕을 감금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 혹여 목숨을 잃을까 동생 목갈라나는 인도로 몸을 숨기고 만다. 형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에 대한 복수 등 서슬 퍼런 독기를 품은 채.

카샤파 왕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 다투세나에게 심지어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 숨겨 놓은 왕실 보물들을 다 내놓으시지요.”
다투세나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권력도 모자라 재물 욕심에 눈이 먼 아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헛된 욕심을 본 것이리라. 다투세나는 말없이 카샤파 왕을 자신이 만든 칼라웨와 저수지로 데려갔다. 그리고 저수지를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 아들아.”

 
농염한 ‘시기리야 레이디(사진 아래 좌)’를 거쳐 사자상 입구(사진 위)를 지나면 바위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엔 감옥터(사진 아래 우)도 남아있다.

저수지는 비가 적은 아누라다푸라 백성들에게는 농업용수와 식수를 해결해 줄 생명줄이자 보물창고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보물에 눈이 먼 카샤파 왕은 결국 부하를 시켜 다투세나를 조용히 살해하고 만다. 이때부터 카샤파 왕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이성을 잃어 갔다.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동생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양심을 옥죄어왔던 것이다. 기원전 477년, 그는 거대한 바위 위에 궁전을 짓기로 결심한다. 양심과 두려움, 죄책감을 그곳에 숨기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사에 투입됐다. 갖은 건축자재를 바위 정상으로 옮기기 위해 계단을 만들었고, 밤낮을 쉬지 않고 궁전을 지었다.

많은 이들이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을 것이고, 그 중에는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형제자매, 누군가의 연인이었던 백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된 노역에 백성들은 쉬이 지치고 쉬이 병들어 갔으리라. 그러나 왕의 광기서린 바위궁전 건립을 누구하나 막지 못했다. 7년 여의 공사 끝에 왕은 절벽으로 된 바위 정상에 누구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바위궁전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사실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만든 셈이다. 그는 이곳에서 11년 동안 지내면서 외부 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끼던 무희들을 데리고 잦은 축제를 열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지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복동생 목갈라나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백성의 피와 땀으로 지은 궁전

카샤파 왕은 코끼리에 올라 전장으로 향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살육의 현장은 피의 축제에 가까웠다. 고막이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가 바위궁전을 감쌌다. 그러던 중 카샤파 왕의 코끼리가 그만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왕은 바닥에 나뒹굴게 됐다. 코끼리 등 위가 아닌 바닥에 내려와서야 자신의 욕심이 부른 비극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가오는 동생의 군대 앞에서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18년이라는 고통의 기억들을 단박에 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목갈라나는 바위궁전을 승단에 보시했다. 바위궁전에 얽힌 원한과 그 영혼들을 위로할 심산이었을 것이다. 목갈라나는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푸라로 옮겼고 바위궁전은 오랫동안 스님들의 수행처로 사용되다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순례자의 기억 속 바위궁전은 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슬픈 역사로 남을 것 같다.

계단을 오르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든 경력의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통가’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

계단을 다 오르니 거대한 바위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정말이지 바위궁전을 만든 스리랑카 사람들의 고생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순간 순간 아찔함을 느끼며 한참을 올라가니 좁고 긴 통로에 일명 ‘거울 회랑’이 등장했다. 바위 절벽을 마주하는 높이 3미터의 황토 빛 벽은 벽돌에 칠을 먹이고 그 위에 달걀흰자와 꿀과 석회를 발라 표면을 문질러 사물이 비치도록 했단다. 벽면에 옛 싱할라 문자로 쓰인 글들이 무수히 많았다.

나선형 철골 계단을 타고 수직으로 올라가니 민망한 그림들을 마주했다. 미인도 벽화다. 풍만한 젖가슴을 과감하게(?) 드러낸 여성을 중심으로 역시 과감한 시녀들이 화려한 장식과 옷을 갖춰 입고 시중을 들고 있다. 오랜 기간에도 또렷한 색과 농염한 모습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주인공은 천상의 요정 압살라라고 한다. 원래 이 바위 둘레엔 500명의 미인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남았다. 스님들이 가만히 둘리가 없지 않은가! 아버지를 죽인 카샤파 왕이 참회의 심정으로 제작했다지만, 술과 환락의 세계에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잊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드디어 바위궁전을 향한 두 번째 입구에 도착했다.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곳을 지나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 바위궁전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진짜 사자를 옆에 두고 만들었다는 입구. 머린 없어졌지만 아직도 사자의 앞발톱이 금방이라도 할퀼 것 같았다.

급경사의 철골 계단을 오르자 탁 트인 시기리야의 전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위궁전 안내인에게 무려 2달러나 지불하고 나서야 들은 얘기로는 카샤파 왕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바로 그 아침의 첫 태양빛이 바로 비추도록 왕궁의 방향과 형태를 만들었단다.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으며 높은 옥좌 위에 앉아 저 넓은 밀림을 보면서 카샤파 왕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훗날 승단의 수행처로 사용

1만 6000㎡ 넓이의 바위 정상엔 저수지, 정원, 연회장 등 왕궁의 옛 건물터를 볼 수 있었다. 카샤파 왕이 앉아 무희들의 춤을 즐겼다는 대리석 의자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저런 대리석 의자가 왜 욕심이 났을까. 왕은 이곳에 앉아 무희들을 보며 잠시라도 죄책감과 두려움을 덜 수 있었을까. 갖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다시 탁 트인 시기리야 전경을 바라봤다. 스리랑카 마지막 순례지를 눈과 가슴에 담았다. 카메라에, 수첩에도 기록해 가방에 담고 지퍼를 잠갔다. 천년 넘게 이곳을 지나다니며 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거센 입김으로 알려주는 바람은 남겨두었다. 천년을 불어온 바람이 앞으로 천년 동안 찾아 올 순례자들을 맞이하도록.

“아유보완(안녕), 욕심이 빚은 바위궁전이여. 아유보완, 스리랑카.”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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