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칼럼]도덕적 마음과 예술적 마음으로서의 불상
[김형효 칼럼]도덕적 마음과 예술적 마음으로서의 불상
  • 법보신문
  • 승인 2008.12.0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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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상, 선-복락 융성 기원 목적 담겨
색-공 무애하게 표현한 한국불상과 달라

한국불교사에서 고승이면서 그 행적에 속인들이 쉽게 잘 이해가 안되는 그런 분들이 계신다. 원효대사와 경허대사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 원효대사는 미증유의 불교대학자이고, 이른바 요석공주와의 파계이후에 더욱 심산대천에서 수행정진을 가행하였고, 시중에서 생활불교를 가르쳤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에 의하면 파계이전에는 대단히 유식한 ‘아는 승려’의 화신이었으나, 파계이후에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보살승려의 화신’으로 일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리의 갑남을녀를 만나면, 원효는 그들의 괴로움을 삼제(芟除)해주는 관세음보살로 살았고,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의 요청에 의하여 군사작전을 도와주는 군사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알 수 없는 다방면의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일연스님 같은 분도 원효대사를 어떻게 정의하기가 어려워 ‘원효불기(元曉不羈=원효 얽매이지 않음’라고 표기했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자기를 스스로 무애인(無人)이라고 읊었고, 그의 불교정신을 스스로 규명하기를 무애도(無道)라고 표명했다. 무애도는 요사이 말로 자유라는 뜻이겠다.

원효는 무애도를 두 가지의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중긍정의 논리적 구조요, 또 다른 하나는 이중부정의 논리적 구조다. 이중긍정은 무애의 자유가 일원론적인 외곬의 의미 단정이 아니고, 이중부정은 무애의 자유가 아무 의미가 없는 허무의 심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중긍정은 색(色)의 존재가 자기동일성을 향유하고 있는 명사적 단일성을 띤 존재자가 아니라, 그 색은 이미 다른 색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충남 서산의 미륵 삼존마애불은 인간의 유위적 의지가 근육의 힘을 실어 바깥에서 단단히 또박또박 새겨 넣은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마애불은 수억겁의 세월동안 바위 속에 부처님으로 은둔해서 살아오셨는데, 보신불이 삼라만상에 온갖 모습으로 나투신 것과 같이 바위 표면에 피어나신 것 같다. 그러다가 이 풍진세상의 비바람과 흙먼지에 덮여 있던 것을 어느 신심 깊은 산골노파가 입고 있던 옷의 천으로 흙먼지를 털고 닦아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불상은 나라가 평안하고 재앙이 사라지고 선과 복락이 융성하기를 기원하는 커다란 도덕의식이 뭉쳐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서산에 있는 백제의 마애불은 나라의 큰 원력이 하나로 응집된 뚜렷한 목적의식과 도덕의식이 부각되어 있지 않다. 저 마애불은 길고 긴 인고(忍苦)의 세월 속에 부처를 그리워하는 석공의 마음이 드디어 노사나불의 미소로 변하여 그 부처의 미소는 만인에게 깊고 깊은 무애의 가피를 나누어 주고 있다. 나라가 국태민안 해지기를 기원하는 선의 목적의식이 하나로 집합된 도덕의식이 안 보이는 근육으로 뭉쳐진 불상과 달리, 서산 마애불과 같이 목적이 없는 목적, 유창한 말이 없는 설법,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얼굴의 표정 등을 우리는 예술적 불상이라고 부른다. 목적이 뚜렷이 부각된 불상은 무애의 불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더구나 무애의 불상은 얼굴에 목적의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속의 기쁜 표정과 슬픈 표정을 다 지운 이중부정의 무한대로 넉넉한 표정이 거기에 스며들어 있다. 무한히 넉넉한 표정은 무한대로 많은 노사나불을 다 안고 있는 공(空)과 다르지 않겠다. 예술적 불상은 색과 공을 무애하게 표현하는 자연이어야 한다. 예술이 도덕보다 더 차원이 높고 깊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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