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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 1. 희미한 첫 예감

기자명 법보신문

독방에서 100일 참선 후 화엄개벽의 길 예감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김지하 시인은 불교의 화엄사상과 동학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대전환을 맞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화엄개벽의 길’로 명명하고 있다. 「법보신문」은 2009년 1월 1일자부터 한없이 넓고 깊은 화엄사상에 푹 빠져 동학의 실천적 양상을 화엄으로 풀어낸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길’을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김지하 시인은 오대산 월정사 뒷방에서 ‘화엄세계 전체에서 남쪽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사진은 월정사 전경.

박경리 선생은 나의 장모님이다.
장모님 사십구재가 오대산 월정사에서 있었다.
그날, 예정에도 없던 유족 인사를 내가 하게 되었다. 인사 중에 불쑥, 그야말로 예정에 없던 촛불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불교의 원만 중도, 대작 『토지』와 중도변혁사상의 한 비유였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마침 특집 취재차 와 있던 조·중·동 기자들이 화들짝 놀라 즉각 철수해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장모님 기념사업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손해를 끼칠까 싶어서다.
장모님 평생 애인이 두 사람이다. 맏손자 원보(圓普)와 갑오혁명 때의 유명한 동학 두령 김개남(金開南)이다.
역학자이신 한웅빈(韓雄彬) 선생의 작명 취향도 취향이려니와 원보란 이름은 누가 봐도 철저히 불교적인데, 개남은 갑오당서 최고의 과격파로서 『토지』 서사(敍事)의 첫 샘물이기도하니 조금은 기이한 느낌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가 있다.
‘남쪽 별자리 원만하면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南辰圓滿 北河回)’.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후천 개벽을 말하고, ‘남쪽의 원만’은 다름 아닌 ‘대화엄(大華嚴)’이다.
그러면 ‘별’이 무엇일까?
‘남쪽 별’이 무엇일까?
‘개남(開南)’인가?
‘개남’의 뜻은 물론 ‘남조선 해방’이겠지만 사실은 옛 부터 내려오는 남조선 사상사의 핵심주제인 ‘만국을 살릴 계책이 남조선에서 나온다(萬國活計 南朝鮮)’의 뜻이다.
그렇다면 별은 이 말을 꺼내든 강증산(姜甑山)을 말하는가?
강증산. 하기야 강증산은 비폭력·평화의 개벽, 즉 ‘정세개벽(靖世開闢)’을 주장한 사람이다.
강증산을 따르던 차경석(車京石)의 보천교(普天敎)에는 ‘보천지남(普天指南)’이란 말이 있었다는데 보천을 대화엄사상의 한 실현체로서의 ‘보문(普門)’으로 해석한다면 보천교 자체가 곧 화엄사상의 남조선 개벽운동이 되기도 한다.
‘정세(靖世)’가 다름 아닌 ‘화엄’의 또 하나의 뜻이고 보면 이 또한 심상치 않다. 보천교에는 남도(南道)사상, 즉 ‘남조선’이 결국은 중도(中道)사상 또는 ‘중조선’에서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뜻의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 중도사상이 곧 불교라면 중조선은 다름 아닌 신라 자장(慈藏) 이후의 오대산(五臺山)이 될 것이다.
그만큼 원만하다는 것이니 오대산을 ‘화엄성지(華嚴聖地)’라고 부르는 것에 그 나름의 깊은 역사적 필연이 있는 듯 싶기도 하다.
나는 지난 여름 오대산 월정사를 방문하는 차 속에서 두 가지 기억을 뚜렷이 떠올린 일이 있다.
하나는 정읍에 있던 보천교 교당의 거대한 재목들을 뜯어다 지금의 조계사 건물을 지은 일과, 다른 하나는 보천교 최고 간부의 아들인 탄허(呑虛) 스님이 뒷날 오대산에 들어가 한암(韓岩) 스님 밑에서 『화엄경』을 본격 공부한 뒤 분명치는 않으나 ‘화엄적 개벽의 국가비전’을 여러 번 비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화엄경』도 언젠가 전강(田崗) 패밀리의 한 땡초 스님이 선물한 탄허본 23권 짜리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니 이 또한 심상치 않은 인연이다.
역순(逆順)으로 하나 묻는다.
『화엄경』의 체제로 보아 도입부는 아무래도 좥입법계품(入法界品)좦인데 주인공 선재(善財)의 구법여행(求法旅行)은 어째서 맨날 남쪽(南遊)으로만 향하는가?
화엄세계 전체에서 남쪽은 무엇인가?
월정사 뒷방에서 내가 거듭거듭 물었던 의문도 바로 이것이다.
오늘부터 일년 반 여에 걸친 기인 여정으로 떠나는 ‘화엄개벽의 길’에서 맨 먼저, 그리고 계속 뒤이어 제기될 이 의문에 대한 답이 어쩌면 결국은 나의 화엄개벽 공부의 결론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혁명 거치치 않는 개벽이
우주대불로 가는 길이며
참다운 ‘화엄개벽의 길’

혁명을 통과하지 않는 개벽. 그야말로 ‘정세개벽’만이 ‘우주대불(宇宙大佛)’과 ‘세계무릉(世界武陵)’으로 가는 길, 이른바 ‘참다운 화엄개벽의 길’일 것이다.
그것이 ‘남쪽’의 참 뜻이고 ‘선재남유(善財南遊)’의 거듭된 의미일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개벽에 의해서만 화엄이 비로소 현실화되겠지만 대화엄의 원만한 별이 뜨지 않고는 마침내 개벽이 참혹한 종말로만 끝날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심(侍)’, ‘모심의 개벽’, 그리고 ‘개벽적 모심’으로 다지고 다져야 한다는 나의 결심이 그래서 도리어 정각(正覺)에 가까이 갈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다.
‘등불이 물위에 밝으니 의심 낼 여지가 없으나 기둥은 다 낡은 듯 보이지만 아직도 힘이 남았다(燈明水上 無嫌隙 柱似枯形 力有餘).’
등불은 후천(後天)이고 새로운 실천으로서의 ‘개벽’이나 기둥은 선천(先天)이요 어쩌면 변함없는 옛 마음으로서의 ‘화엄’이겠다. ‘남쪽’이 내겐 아직도 ‘빛(離)’인 까닭이다.
주역(周易)이 다 끝난 듯 하지만 아직도 힘이 남은 그 까닭이기도 하다.
백여 년 전 남쪽을 하늘(乾)로, 북쪽을 땅(坤)으로 선포한 정역(正易)에 거대한 감동과 뜨거운 박수를 계속 보내면서도 동시에 남쪽을 빛(離)으로 북쪽을 그늘(坎)로 보는 주역을 아직도 내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까닭이다.
눈부신 흰빛임에도 그 안에, 그 바탕에 철저히 암소를, 검은 그늘을 함께 키우지 않으면(畜牝牛吉) 대화엄의 무궁한 ‘한울 마음의 달(天心月)’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흰 그늘(影動天心月)’을 창조할 수 없으며, 북쪽이 비록 새로이 새 땅(坤)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이월춘분(二月春分)의 여율(呂律) 쪽에 가까운 협종율(夾鐘律)이라 하더라도 남쪽의 옛 하늘(乾) 십이월동지(十二月冬至)의 율려(律呂) 그 자체이고 황종율(黃鐘律)의 누른 곤룡포를 일단은 정중히 입는 전통적 대행(代行)의 격식을 갖춰야만 진정으로 실력 있는 재상으로서 개벽의 대 혼돈 속에 감추어진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무늬, 수많은 털구멍 속의 그 자유로운 부처님의 해탈문을 새 시대에 맞게 드러낼 수 있는(黃裳元吉 文在內也) ‘팔려사율(八呂四律)’의 혼돈적 질서(chaos mos)가 현실 그 자체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 까닭이다.
‘흰 그늘’과 ‘누른 곤룡포’.
하나는 숨은 차원이요, 하나는 드러난 차원인데 두 차원은 목하 엇섞여 생성하고 있다. 경락학(經絡學)에서 이른바 ‘복승(復勝)’이라 이름 부르는 교차생성 현상이다. 퍽 어려운 시절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현대의 뛰어난 풍수(風水) 최창조(崔昌祚) 씨는 언젠가 한반도 안에 있는 여러 명산 가운데 가장 넉넉하고 원만한 덕산(德山)으로 오대산을 높이 칭송한 적이 있다.
그 화엄성지에서 어느날 아침 잠이 깨어 마치 동쪽으로 말달리며 서쪽으로 화살 날리는 고구려 무사의 저 반궁수(叛躬手) 모냥 난데없이 예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종교차별 때문에 시끄러운 때다. 동서문명의 화해와 융합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고 일부 개신교의 결정적 오류에 대해 신구 기독교 전체가 책임을 지고 문명사 대전환의 초점을 찾도록 권유하기 위해서도 유신 반대운동 과정을 샅샅이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기독교 이야기’라는 편지 형식의 원고를 쓴 것이 바로 그때다.
그때 기이한 한 사실에 새삼 크게 눈을 떴다.
개신교 쪽 강연에서도 여러 번 강조한 적이 있지만 그 융합과 대전환의 길은 곧 다름 아닌 ‘화엄개벽’이라는 것.
불교, 기독교, 이슬람, 동학과 정역 등은 ‘화엄개벽’안에서 충분히, 그것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융합 가능하다는 것.
다만 종말적 대혼돈 앞에 목숨을 건 선(禪)적인 개벽의 모심을 어떻게 결단하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이라는 것.
그랬다.
그때, 옛 반유신운동시절의 그 기인 독방살이 가운데 내 나름의 목숨을 건 모심선(禪)의 과정에서 ‘화엄개벽’의 첫 예감에 접했던 일을 뚜렷이 기억해냈다.
나는 그 무렵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카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고발되었고 사형선고 뒤 무기징역, 감형, 석방, 재구속, 양심선언, 그리고는 기나긴 독방살이였다.
그들은 긴 세월 책은 물론 성경조차도 주지 않았다.
텅빈 적막만이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적막과 공허가 쇠창살 밑에 자라는 잔 풀의 푸르름에서, 봄날 창 틈으로 날아드는 흰 민들레 씨에서 도리어 신령한 생명의 약동을 눈뜨게 했다.
텅빈 신령함. 신령한 무(無)!
뒷날 성경이 들어오고 책이 들어왔을 때 되풀이 되풀이 읽은 신구약과 창조적 진화 과학의 거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으로부터 우주진화의 삼대법칙 중 처음 두 가지인 ‘안으로 의식, 밖으로 복잡화’의 원리로부터 수운동학(水雲東學)의 모심(侍)의 참뜻을 비로소 발견했을 때, 그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란 말이 다름 아닌 창조적 진화의 기본법칙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하여 증조부이래 우리집안이 슬픈 피투성이 신앙인 동학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때다.
‘모심(侍)’의 대상이고, 그리하여 창조적 진화의 주체인 그 ‘님(主)’, 즉 ‘한울(天)’에 대한 수운 자신의 해설이 단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며칠을 밤낮으로 소름이 끼쳐 놀라고 또 놀라 쾅쾅쾅 발로만 발로만 마루를 굴렀다.
그렇다.
텅 빈 신령함. 신령한 무(無)!
동학의 한울님은 신이며 또한 부처였다. 신선(神仙)의 주체는 ‘한’이면서 ‘울’인 ‘님’, ‘텅 빈 영원한 푸른 하늘(無窮, 無極, 無限)’이었다.
오랜 독방수행은 정신질환의 시작이다. 북에서 온 간첩님들도 5년 시한이 지나면 반드시 몇 달간은 일반 도둑님들과 합방시키는 그 까닭이다.

종말적인 대혼돈 앞에서
목숨 건 禪적 개벽의 모심
어떻게 결단할지가 문제

나의 독방살이는 시한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들었다.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싶고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고 싶어진다. 벽에 붙은 모니터에서 내 거취를 24시간 보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득달같이 달려와 각서를 요구한다. 항복문서다.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되었다.
결가부좌하고 백일 참선에 들어간 것이 그때다.
나는 참선 이후 엄청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 중 어느날 내 앞에 여자의 시커먼 자궁이 나타났다. 점점 커지는 그 자궁에서는 퀴퀴한 정액과 더러운 고름이 한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면의 소리가 핥으라고 명령한다. 끝없이, 끊임없이 핥고 또 핥았다. 목숨을 건 참으로 참기 어려운 지옥이었다.
열흘 째던가, 점심 직전 하아얀 가을 햇살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자궁으로부터 새하얀 맑은 샘물이 콸콸콸 터져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 샘물을 꿀꺽꿀꺽 한없이 마시며 커다랗게 가가대소하면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한 소식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로써 끝. 모든 것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참선도 그만 파장났다. 꼭 백일 째 되는 날이다.
바로 그 이튿날 정오 박정희 피살 소식이 소내 특별방송으로 알려졌다. 그때 내 가슴 밑바닥에서 문득 세 개의 풍선이 이어서 떠올라왔다.
첫째 풍선의 이름은 ‘인생무상’.
둘째는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는 ‘나도 뒤 따라 갑니다’.
며칠 뒤 역시 특별방송으로 장례식 조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첫 마디는 ‘인생무상!’.
소름이 끼쳐오지는 않았다.
다만 고요한 가운데 뚜렷하게 이것이 다름 아닌 ‘모심’이라는 것.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화엄개벽’의 예감이 왔다.
‘인생무상’에서 의상(義湘) 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박정희와 내가 똑같이 떠나야 할 운명, 그 운명적인 화해에서 동학주문 ‘모심’의 마지막 뜻인 ‘한세상 사람이 서로 옮기되 옮길 수 없는 화엄적 융합을 각자 각자 제 나름 나름으로 깨닫는다(一世之人 各知不移)’의 개벽적 신비의 직감을 느낀 것.
‘옮기되 옮길 수 없음’즉, ‘불이(不移)’는 송나라 주자(朱子)가 ‘화엄’을 유교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이 ‘화엄개벽’에 대한 나의 희미한 첫 예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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