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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③ 별이 무엇인가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을 개벽할 경륜은 ‘화엄경’ 안에 있다

 
김지하 씨는 지난해 서울시청광장에 켜진 촛불을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켜진 ‘화엄개벽’으로 보고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선재의 소명은 ‘묻는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먼저 할 일도 ‘묻는 것’이다.
선재가 남쪽으로 끊임없이 떠난 것은 문수(文殊)의 가르침이다.
선재의 선세(先世)의 신종(信種), 조상의 믿음의 씨앗도 다름 아닌 문수다.
지금, 여기, 우리의 화엄개벽의 길을 찾는 우리에게 문수, 그 문수 아닌 문수는 어디 있는가?

그 별은 어디 있는가?
역시 『화엄경』 안에 있다.
화엄을 개벽할 경륜이 다름 아닌 『화엄경』 안에 있다는 말이다.
선재에게 남쪽을 가르킨 문수의 손가락. 그 별은 바로 초발심(初發心)인 것이다.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에 ‘초발심한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도 없으며 설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은 시방세계의 무수한 중생을 오랫동안 공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보살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을 일으켰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모든 세계는 스스로 청정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중생을 구하고 깨달음을 열고자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의 번뇌와 그 오염,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 마음의 움직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명언하고 있다.

이어서
‘개부일체수화주야신(開敷一切樹華主夜神)’에서 개벽의 힘인 해탈문의 방편의 모습을 일종의 시대경륜이기도 한 역학(易學)의 차원에서까지 그리고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 ‘풍우가 고르지 못해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동산에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죽었다. 백성들은 궁핍하고 질병이 많아 의지할 데 없이 사방으로 떠돌다가 서울에 모여들어 울부짖는 소리’에 대해
‘가엾어라, 중생이여’를 발하는 우주적 생명정치, 요즘 말로 해석하자면 ‘우주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까지도 열어놓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자신이 주역(周易)과 정역(正易)의 십무극(十無極), 오황극(五皇極), 일태극(一太極)의 영역들을 모두 다 아우르고 있으며 후천개벽의 경우 보살의 빈 마음의 측면인 ‘무위존공(戊位尊空)’과 중생의 민생정치의 측면인 ‘기위친정(己位親政)’까지도 함께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남쪽별이 원만하면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에서 별은 본디 날카로운 것이지만 우주적인 것이고 별이 떠야만 열리는 지상의 꽃은 눈부신 것이지만 도리어 원만하다.
개벽역(開闢易)인 19세기 한국의 정역(正易)에서 선천(先天)의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의 ‘십오일언(十五一言)’과 후천(後天)의 미성년, 여성, 쓸쓸한 중생의 ‘십일일언(十一一言)’을 나란히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니 『화엄경』에서 말하는 초발심의 두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의 관계가 곧 개벽이니 개벽은 ‘열면서(開) 동시에 피하는 것(闢)’이다.
무엇을 열고 무엇을 피하는가?
이는 불교에선 흔한 이중성의 어법이니 굳이 설명 안 한다.
우리의 의문은 일단 경전 안에서 해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묻는다.
선재의 ‘위없는 보리심’의 근거인 ‘선세의 신종’ 즉 그 조상들의 오랜 믿음의 씨앗은 화엄개벽을 찾아 남조선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길 위에 뜬 그 어떤 별인가?
우리들 자신의 별의 역사 말이다.

그것은 과연 있는가?
선재의 그 끝없는 보리심의 근거와 그 이해력과 상상력의 거대한 복덕에 비교할 만한 그 나름의 큰 씨앗이 우리민족과 동아시아 문명사 안에 이미 있었는가?
물론 보리심, 초발심의 근거를 서양과 같이 머나먼 곳의 옛 신종(信種)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오히려 바람직할 수조차 있다.
나는 작년 초 광장에 켜진 촛불을 인류역사에 처음 켜진 화엄개벽이라고 보는데, 이때에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이를 예외 없이 서양사상이나 서양지식으로 이해하고 해명하기 위해 무척 애쓰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는 있다.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이해와 해명에 단 한번이나마 성공했는가?

선재의 ‘위 없는 보리심’
그 근거인 선세의 신종은
우리의 길에 어떤 별인가

수많은 서유선재(西遊善財)들이 맑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벤야민, 비트켄슈타인, 네그리 등을 빌려다 설명하려 애쓰고 레닌의 직접 민주주의니 68 프랑스 문화혁명을 끊임없이 거론하며 또 하나의 이식(移植) 현상으로 해명하려 하지만 단 하나만이라도, 조금만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는가?
모략중상 아니면 이용, 악용의 결과뿐이지 않았던가?
오히려 극소수이지만 광장의 젊은이나 여성들 속에서 화엄이니 개벽이니, 그것도 지나가는 말로 잠깐씩 나왔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실패현상 자체에 대한 본격적 연구 검토가 뒤따라 나와야겠지만 우선 그 원인은 우리자신의, 특히 우리의 신세대 미성년과 여성들의 보리심의 밑바탕에 있는 우리 나름의 ‘선세의 신종’을 자각하지 못한 탓이다. 우리의 보리심의 정체다.
나 역시 모자라긴 마찬가지였다.
애써 접근한 것이 주역과 정역, 동학과 증산, 그리고 약간의 불교적 지혜 정도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수 천년 전부터의 ‘선세의 신종’그 자체인가?

촛불의 화엄개벽, 동학운동과 함께 현재 진행중인 대혼돈과 금융위기로 인한 문명사 변동은 인류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서양식으로 충분히 해명할 수 있겠는가?
우선 우리는 이것에 관해 묻는 방식 자체를 잘 모른다.
별 말이다.
나 역시 고민이 심했다.
내가 끝없이 집착한 것은 역시 동학이다. 그리고 동학의 13자, 또는 39자 주문이다. 솔직히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별은 동학의 주문으로부터 떠오르는 것 같다. 비록 아직도 희미하긴 마찬가지이지만 ‘화엄개벽의 길’이라는 이 공부노트도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은 전혀 법문이나 설교류가 아니라 공부노트요 여행의 기록일 뿐이다.
동학은 유불도 삼교와 기독교와 진화론 등 현대 과학의 계시적 깨달음에 의한 융합이다. 특히 주역과 함께 후천개벽역인 정역과는 샅샅이 바로 직결돼 있다.
그리고 수 천년 전 고조선의 생명사상인 천부경(天符經)의 현대적 압축인 셈이다.
그런데 동학 주문 13자 또는 39자 안에는 기이하게도 화엄사상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화엄개벽적인 그 나름의 참선실천의 지혜로 만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별이 참으로 뜰 것인가?
오늘의 화엄개벽으로 가는 구체적 지남침(指南針)인 그 별 말이다. 고민하였다.
이때 좁디좁은 내 공부방 안에 웬 낯선 책 한 권이 탕- 하고 떨어져 들어왔다. 최근이다.
‘구선’ 스님의 ‘『십이연기와 천부경』’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생애 최후의 가장 큰 깨달음이라는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과 총 81자로 된 수 천년 전 ‘천부경(天符經)’을 비교 연구한 노작이다.
이 책은 앞으로 크게 연구되고 높이 논의돼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 노트는 아직 그저 노트일 뿐이고 ‘문제제기학(問題提起學)’ 차원의 제안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엄개벽의 길을 걸어가는 오늘의 선재인 우리의 현실적 테마, ‘생명과 평화’라는 걸음걸이에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심법(心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십이연기법과 천부경은 서로 같으면서도 서로 다르다. 먼저는 ‘무명’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지만 다음은 ‘시작 없는 한’에서 시작해서 ‘끝이 없는 한’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하나는 생명을 ‘어둠’과 ‘죽음’으로, 하나는 ‘하나’에서 ‘하나’로 보는 전 우주생명의 생성관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화엄개벽의 길’에서 ‘무’와 ‘유’ 사이의 상호 보완적인 생명심법(生命心法)의 도반(道伴)인 셈이다.
개체 발생이 종(種) 발생을 반복한다. 개체생명과 심법의 코드가 온 우주생명의 무궁 확산과 그 다양한 심법의 코드들을 압축한다.
그것은 더군다나 컴퓨팅의 수학적 조건인 ‘1과 0’, 그리고 우주 역법(曆法) 및 지구 간지(干支)의 기초인 ‘12’, 나아가 미래 컴퓨팅과 콘셉터의 영적 시스템의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9×9=81’의 수리적 신비를 모두 안고 있고 나아가 ‘화엄개벽’의 영적 우주생명과학의 총괄을 가능케 할 ‘오역(伏羲易-文王易-正易-燈塔易-天符易)’을 촉발시킬 수 있는 참으로 귀중한 비교연구라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이다.

선재의 ‘선세의 신종’은 또 있다.

엄청난 문명의 변동기에
그 중심에 들어서고 있는
이땅 선재들이 묻게 될 것

이미 두 번이나 강조해 말한바 있는 개벽부분에서 주역의 빛(離)과 그늘(坎), 정역의 하늘(乾)과 땅(坤)의 남북 등 여러 괘상 사이의 상호교차 관계, 무극·황극·태극의 삼극(三極)관계, 그리고 보살과 중생사이에서 가장 민감한 개벽적 상관관계라 할 수 있는 정역의 ‘열 닷새 보름달과 열 엿새 초승달’사이의 이른바 ‘포오함륙(包五含六)’이니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기성정치권의 보완적 대의 민주주의의 ‘공(空)’ 또는 ‘아무위(我無爲)’의 원리와 새로운 대중정치세력의 화백(和白)적 직접민주주의의 ‘색(色)’ 또는 ‘무불위(無不爲) 또는 민자화(民自化)’ 사이의 ‘오운육기(五運六氣)’의 이상정치, 시장에서의 ‘동진불염(同塵不染-티끌 속에 함께 하되 물들지 않음)’의 원리인 ‘호혜(互惠)와 교환(交換)과 획기적재분배(劃期的再分配)’의 상호 결합, 문화에서 남성적 질서의 원리인 ‘율려(律呂)’와 여성적 혼돈의 원리인 ‘여율(呂律)’ 사이의 상호 연속성과 함께 패권(覇權)의 이동(移動) 등이 모두다 ‘화엄개벽의 길’에서 선재의 질문을 결정하는 무궁한 보리심의 토대들이다.
특히나 디지털 세대는 이 모든 보리심의 발동이 뇌과학(싸이버문화)이나 디지털 네트워킹의 ‘예스-노’의 이진법, ‘1과 0’의 상호적 양가성을 비롯한 새로운 개벽적 무궁화엄수(佛刹微塵數)의 ‘월인천강(月印千江)’의 그 숱한 해체적 흐름을 탈것이 분명하다.
또 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두 가지나 더 있다.
976번에 걸친 외국침략에 끝없이 저항하면서도 오히려 거의 모든 외국문화를 흡수 소화한 민족 본래의 깊고 깊은 갈증차원의 향심(向心-진리를 향한 근원적 호기심), 그것을 영적, 이성적, 감정적인 전 방면의 문화창조로 작품화하는 타고난 재능의 발동력으로서의 끝없는 요청.
그리고 현대 서양최고의 지혜자인 ‘루돌프·슈타이너’의 유언과 같이 전 인류문명사의 근원적 전환점인 현대에 타고난 성배(聖杯)의 민족으로서 다가오는 새 시대 새 삶의 원형(原型)을 제시해야 할 생득적(生得的)인 민족이상(民族理想)인 ‘홍익인간이화세계(弘益人間理化世界)’의 가장 탁월한 차원으로서의 ‘화엄개벽’은 이미 태생적으로 민족성원 모두의 지대한 탐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엄청난 문명변동기에 지금 막 결정적으로 바로 그 변동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는 이 땅에서 수많은 선재는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다.
‘화엄개벽의 길’이 어디냐고.
그 첫 조짐인 ‘남조선’으로 우리를 인도할 별, 그 별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만약 이 별을 찾지 못한다면 화엄개벽의 길을 찾을 수 없고, 정말로 그것을 못 찾는다면 『화엄경』은 학덕 높은 이판(理判) 스님들마저도 비명을 내지르는 한낱 시끄러운 심층의식 자랑하기 페스티발의 야단법석에 불과하게 될런지도 모르며, 그렇게 된다면 목전에 다가온 후천개벽은 그저 ‘2012년’이라는 마야달력의 검은 저주처럼 서양인 모두가 치를 떠는 바로 그 참혹한 종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될런지도 모른다.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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