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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⑤ 모심의 역사

기자명 법보신문

수운 화엄개벽사상의 첫 씨앗은 원효다

 
김지하 시인은 수운 최제우가 가진 화엄개벽사상의 첫 씨앗이 원효〈사진 왼쪽〉로 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의상〈사진 오른쪽〉의 ‘몸’ 발언이 『묘법연화경』과 함께 이제 시작되는 현대세계의 비전이 화엄개벽 모심의 핵심이자 기본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모심(侍)’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동학사상의 개벽실천의 브랜드다. 그리고 그 내용의 깊이와 그 실천의 광활함은 수운 선생 자신이나 천도교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대로 인정한다고 했을 때 문자 그대로 ‘금불문 고불문 금불비 고불비(오늘에도 못 들어보고 옛날에도 못 들어본, 오늘에도 비교할 바 없고 옛날에도 비교할 바 없는)’의 그야말로 적극적인 윤리요 개벽적인 사상이다. ‘그렇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니다’이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원효의 논리로 非然) 그래도 비슷한(역시 원효의 논리로 似然) 것은 이미 줄기차게 있어왔다. 화엄개벽의 선(禪)적인 한 실천형식으로서의 그 점부터 살펴보자.

우선 원효 자신의 사상이다.
원효의 저 유명한 저작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화엄세상 전반에 대한 한국학적 인식과 그 실천의 대전제가 되는 사상이다. 예컨데 수운 동학의 개벽주문을 기준으로 한번 살펴본다면 ‘화엄적 융합의 개별적 인식(各知不移)’의 전 단계인 창조적 진화의 전개과정, 즉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음(內有神靈 外有氣化)’에 정확히 대응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게 된다.

‘연기(緣起)’와 ‘성기(性起)’의 상호 연속관계가 그것이고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생극·복승(生克·複勝) 관계가 또한 그것이다. 그러나 막상 동학 주문의 이 창조적 진화와 화엄인식의 총괄어인 ‘모심(侍)’에 대비한 원효 자신의 총괄개념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너무나 깊고 넓고 높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번역어인 ‘귀명(歸命)’, 즉 ‘목숨에 돌아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심’은 근본에서 다름 아닌 ‘목숨을 들어 목숨으로 돌아감’인 것이다. 개벽, 후천개벽의 조건이자 동력인 ‘모심’은 곧 영적 생명운동이요 생명평화운동이기 때문이다. 호주 생태학자 발플럼우드의 주장대로 현실세계의 생명 대혼돈을 극복할 유일한 길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존재를 거룩한 우주공동주체로 들어올리는 모심의 문화, 모심의 생활로 삶을 대 변혁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귀명’은 곧 ‘귀명삼보(歸命三寶)’다. ‘부처, 부처의 진리, 그 진리를 따르는 승가(佛·法·僧)의 영적 생명성에로 돌아감’인 것이다. 물론이거니와 삼보는 화엄사상의 기본구조다.

그렇다면 화엄개벽의 길은 지금여기 곧 이어서 모심으로부터 시작되는 후천개벽 실천 전과정의 압축인 13자 또는 39자의 내용과 ‘귀명삼보’ 전 체계의 ‘성기-연기론’과의 철저한 비교 공부에 바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더욱이 ‘화엄과 선’의 결합에서 ‘연기와 성기 사이의 관계’에 원효와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는 고려시 보조지눌(普照知訥)과의 비교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글은 ‘문제제기학’ 차원의 공부노트에 불과하다. 당연하지만 다음기회, 본격적 차원, 그리고 다른 전문적인 분의 작업에로 넘긴다.

그럼에도 한마디 붙인다면, 거기에 더하여 원효의 무애(無碍)와 천부경과의 사이, 화쟁(和諍)과 동학에서 정역, 남학, 소태산에 이르기까지의 남조선 개벽사상사 전체를 관통하는 무궁(無窮), 지기(至氣), 귀공(歸空), 존공(尊空), 간태합덕(艮兌合德)과 삼팔동궁(三八同宮), 금강(金剛), 학명산천(鶴鳴山川), 유리(), 용화(龍化), 정세(靖世), 통일신단(), 조화정부(造化政府), 일원상(一圓相), 사은(四恩) 등을 비교한다면 풍요한 평화세상의 대지(大地)에 이를 것이다. 목하 불이 붙고 있는 생명평화운동을 화엄개벽의 길을 열어 제키는 확고한 철학에로 이끌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첫 샘물이 모심이요 귀명일 것이니 어쩌면 원효의 생애 전체가 바로 모심이요 생명평화와 화엄개벽의 탁월한 예언이자 예감의 단계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다 아는 일이지만 원효와 당대의 화랑 출신 스님들이 선도 풍류의 영적 생명사상에 기초한 화엄실천은 오늘 깊이 착안해야 한다. 이것이 ‘신종’이다. 더욱이 ‘몸으로 읽는 『화엄경』 예고편’인 법화경 해설은 어떠한가?

원효의 생애 전체가 모심이니
화엄개벽의 탁월한 예언이자
예감의 단계가 아닐까 생각

원효는 분명 남쪽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남도가 곧 전라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야말로 망상이다. 기실 19세기에 일어선 남조선 개벽사상사의 첫 샘물은 분명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이고 그의 이른바 선세의 신종은 바로 옛 선도 풍류이외에 원효, 의상, 자장, 고운 최치원과 일연, 의천, 지눌, 묘청, 신돈 및 퇴계, 남명과 경주 가암 최씨 집안의 가학(家學)인 영남학이다. 격암유록이나 정감록마저도 그 씨앗이다. 이 모두에 대한 ‘모심’이 시작이다. 거기에 주유천하 이후의 여러 가지 섭렵이 또한 그 바탕일 것이다. 가히 화엄이겠다.
수운의 화엄개벽사상의 첫 씨앗을 원효로 보는 그 이유다.

다음은 의상(義湘). 이 글이 너무 어렵고 딱딱하다는 중평이 있는 듯 하다. 그래서도 더욱 한 마디 한다.
나는 평소 의상의 화엄사상을 생각할 때마다 왠일인지 저 아름다운 여인 선묘(善妙)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버릇이 돼 있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생각할 때는 우선 황해의 그 거친 파도가, 그 파도를 멈춰 사모하는 의상 스님의 무사귀국을 비는 선묘의 저 지극한 원력(願力), 그리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용이 되어서 바다를 잠자게 했다는 한 여인의 필사적인 ‘모심’안에 도리어 화엄일승법계도 전체의 숨겨진 의미망이 별 뜨듯 개벽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혹은 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의상이 직접 일으킨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밑 S자형의 석룡(石龍)은 곧 선묘여인이라는 전설을 나는 사실 자체로 믿는다. 사실은 바로 이런 종류의 믿음이 다름 아닌 ‘화엄개벽의 길 그 자체인 모심’의 구체적 형태일 수 있다. 요즈음의 유행인 생명과 평화의 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평화의 길.
그것이 곧 아미타부처에의 길이므로 다름 아닌 원효의 귀명(歸命), ‘나무아미타불’이요 화엄개벽의 실천으로서의 ‘연기적성기(緣起的性起)’이며 긍부(肯否)를 다 안은 역동적 ‘환멸연기(還滅緣起)’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지난날 시청 앞 촛불의 주체인 어린이, 미성년, 여성과 쓸쓸한 대중 그들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선묘야말로 한 중생의 연기를 통한 성기,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꽃다운 혜명(慧命)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치열한 중생개벽의 시대에 있어 의상의 한국적 화엄학은 당연히 낙산사 관음굴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의 261자 관음사상 안에 당연히 서려 있을 ‘선묘적(善妙的)’인 ‘화엄개벽적 모심’을 밝혀 억압당하고 소외당한 수 천년의 ‘기위(己位)’요 ‘남은 조선 사람’이요 ‘소외된 네페쉬하야’이며 극도의 천대 속에 아직도 배회하는 여성들의 저 ‘시커먼 자궁의 정액과 고름’ 속에서 바야흐로 콸콸콸 솟아오르는 새하얀 샘물과 같은 순결한 촛불을 켜 응당 제 본래의 자리인 친정(親政) 위치를 회복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열정적으로 연구되고 날카롭게 평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가 일으켰다는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화엄사, 해인사, 보원사, 갑사, 화산사, 범어사, 옥천사, 국신사 등 화엄십찰의 가람배치 안에 어느 구석에서라도 비록 쬐끄맣게라도 서려 있을지도 모를 선묘의 ‘모심’과 ‘관음사상’이 뚜렷이 밝혀지는 것 역시 화엄개벽의 한 길이 될 것이다.

의상의 그 무수한 제자들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장(道身章),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등의 기록 속에서마저 또한 ‘화엄적 여성성이나 독특한 연기의 흔적’등을 새 시대답게 밝혀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상 자신이 화엄학의 비밀을 한마디로 잘라 ‘부동한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가 가진 뜻(不動吾身 印是 法身自體之義)’이라고 말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주와 생명, 영성과 세계의 변화는 오늘 그야말로 파천황이다. 화엄학이 이 치열한 몸의 시대, 이 거대한 글로벌 시대에, ‘편한 마음 찾기’나 ‘심장적구(尋章摘句)’만일 수는 없다.

오늘의 화엄개벽은 중생의 몸 자체, 여성의 몸 자체, 그 자체 안에서 진행된다. 나아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의 일체존재의 몸 그 자체 안에서 진행된다. ‘모심’이 바로 그것이다. 의상의 이 ‘몸’발언은 『묘법연화경』과 함께 이제 시작되는 현대세계의 비전인 화엄개벽 모심의 핵심이자 기본 내용인 것이다.

의상 화엄사상에서 선묘의 깊은 의미는 오늘날 마땅히 화엄개벽의 길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화엄경』「입법계품」의 구파여인 부분과 마야부인 부분에서 현대 여성학적 컨테스트에 전면확대 방향으로 탁월하게 해석되어 마땅하다. 이때에 아마도 틀림없이 인류사상사 전체에, 생명평화사상사 전체에 일대 천둥이 터질 것 같다. 이어서 동녀동자, 선지식과 창녀의 순으로 이어져 가면 이는 곧 오늘 우리의 촛불이 안고 있는 화엄개벽적 의미에 그대로 연결된다.

그렇지 않다면 의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선묘는 왜 목숨을 던져 그를 모신 것인가? 단순한 치정(癡情)일 뿐이었던가?
신라의 호국불교 하면 자장(慈藏)이요 자장 하면 율사(律師)다. 그런데 그 율사가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첫 화엄의 씨를 뿌렸다.

우리가 첫 회 이후 내내 집착해왔던 남조선, 그 중에도 전라도 쪽의 그 수많은, 그리고 끈질긴 화엄개벽운동의 첫 신종(信種), 즉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율사 마라난타다. 이제 우리는 화엄개벽의 첫 씨앗인 ‘모심’을 바로 오늘의 ‘중생부처(三八同宮)’의 관점에서 온갖 율장(律藏), 갖은 규범(規範) 안에서까지도 찾아내 그것을 활기차게 ‘살림’일반에서 역동화, 생활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것 자체가 화엄개벽 운동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모심의 역사’요 ‘모심의 역사’가 실은 ‘화엄개벽의 역사’다. 따라서 이 역사는 반드시 현저한 ‘연기-성기’의 파동인 정치, 경제, 사상문화와 기후, 삶의 생태 등 당대 역사와의 복합적이고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의 깊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아 ‘화엄개벽사’ 탐구가 열렬히 착수되어야 할 것 같다. 바로 그 사관이 ‘연기-성기사관(緣起-性起史觀)’ 또는 동학식으로 말하면 ‘기화-신령사관(氣化-神靈史觀)’ 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 『화엄경』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이같은 사관의 전범인 것 같다.

모심을 ‘중생부처’ 관점과
율장·규범 안에서 찾아내
생활화 함이 화엄개벽 운동

그러나 ‘화엄개벽사관’은 분명 그리 간단하고 소박한 것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입법계품을 비롯한 『화엄경』 여러 곳에서 불성(佛性)의 화엄(華嚴)과 개벽(開闢) 진화, 그 넓이와 지속성, 그 지혜의 실천행을 효력, 종류, 주체, 대상, 방면, 시발, 원력, 조건 등등 무수한 복잡성 속에서 원칙적으로 검토한다.

나는 일단 그 복잡한 화엄개벽의 사관이 동학 주문 안에 그 여러 원칙성 나름으로 대중적으로 잘 압축돼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현실에 있어서 매우 효력적이고 또한 요청적이기도 하다. 『화엄경』 연구와 동학 주문에 대한 비교검토도 이제쯤은 필요한 시점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천부경과 십이연기법,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반망환진(返忘還眞)과 유전·환멸연기의 역동적 이중성이 또한 비교 검토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이런 번쇄한 과정이 필요할까? 고조선이래 한국사상사 일반의 뿌리 깊은 특징인 ‘개벽관(開闢觀)’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세계와 삶의 복잡성이 단순한 ‘연기-성기관’ 하나로 세세히 해명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수련과 역사만 아니라 인문과 과학일반에서 다 그러할 것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의 ‘모심’의 강조는 여성, 어린이, 쓸쓸한 대중의 경우 치명적이다. 생태학자 발플럼우드의 생태학적 모심 주장은 되풀이 할 필요조차 없겠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만 신돈개혁 실패 이후 500년 당취사 전체를 관통한 그 나름의 ‘화엄선’과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의상(義湘)의 ‘화엄적 몸(吾身法身)론’ 그리고 생명사상 자체인 선도풍류(仙道風流), 오늘 신세대의 ‘몸’ 담론과 우주적 글로벌리슴, 미국 뇌과학의 전신두뇌설의 연관을 밝혀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 흐름의 연관 위에서 ‘연기 보다 성기 쪽을 강조한, 그럼에도 중생관이 도리어 치열했던’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정통 화엄사상의 미묘함을, 한발 더 나아가 화엄의 대의(大義)를 명백히 전제함에도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 선교화합(禪敎和合)의 복합성에 문을 열어놓은 의천(義天)의 천태학(天台學) 공부에도 여유를 보이는 그야말로 모심과 화엄개벽의 길이 활짝 열리지 않을까?

다른 말 아니다. 내가 이제부터 그렇게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 금융위기로 인한 절망이나 열패감에 연관된 듯, 서구에 불기 시작한 난데없는 챨스다윈진화론의 에코·파씨슴 열광과 뜬금 없는 남성, 이성, 질서, 관념 중심의 전체주의 지배철학인 헤겔·칸트 찬양이 결코 심상치 않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모심’이나 여성성, ‘화엄개벽’, 그리고 우리의 저 슬기로운 ‘촛불’과는 너무도 확고하게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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