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미술가 강순형의 미륵사탑 사리구 깊이 보기]

기자명 법보신문

사리병-족집게 수 놓은 당초-비늘무늬
세계 최고 수준이던 백제 공예술 증명

  연재 순서

1. 늘 다시 써야 하는 백제
2. 어디, 어떻게 차려졌나
3. 언제, 누가, 왜 차렸나
4. 어떤 유물이 나왔나
5. 유물이 말하는 것

6. 서동과 선화공주는 전설?
7. 마무림


4. 어떤 유물이 나왔나

①. 먼저, 가장 눈에 띄는 주인공인 뚜껑 덮인 금으로 만든 빛나는 사리외병外甁을 들어야한다. 당당한 몸매形態 및 연꽃잎과 당초의 무늬들에서 보이는 화사·미려·운동감에서, 이 병은 그 부피감과 힘참 및 세련된 솜씨가 그대로 드러난 특징에서 겨우 높이 13×어깨너비 7.7㎝라는 한계의 크기를 뛰어넘고 있는 놀라운 작품인 것이다.

굽 없는 넓은 민바닥에 큼직한 살찐 호형壺形 몸매에다, 굵고 긴 목에 넓은 전이 돌려진 큰 입廣口 위로, 등이 살짝 부른 듬직한 뚜껑에 만두·찐빵꼴 꼭지의 굵은 손잡이가 선 사리병이다.

온몸에 가득찬 무늬는, 뚜껑과 꼭지·목과 아랫도리에는 연꽃잎을, 어깨와 가슴·배에는 당초가 가득 새겨져陰刻 있다. 그러면서도, 가슴께는 옆으로 굽이치는 당초매듭을, 배쪽에는 둥근 당초매듭을 만들며 속에다 바로와 거꾸로를 번갈은 3잎당초꽃을, 도들띠 목걸이까지 돌린 어깨는 (하향한) 3잎당초꽃잎만 돌려 달리했음이 눈길 잡는다.

모든 꽃잎과 줄기에는 빗금櫛目무늬=깃羽毛무늬를 새겨 입체감을 나타낸 것도 놀랍다.
바탕은 모두 무수한 동그라미무늬魚子·魚卵·雨點文찍어圓(頭)釘 빈틈이 없이 메꾸었다.

안에는 뼈가루 같기도 한 회분灰粉이 단단하게 많이 차 있고, 그 위로 구멍 뚫린 작은 구슬들도 제법 보인다. 가루 속에 구슬들과 사리내병이 X-ray로 또 잡히고 있다.

②. 동쪽 윗모서리 채 못간 구슬더미 위에 놓인 작은 금족집게(5×0.8㎝, 1점)도 처음 보는 놀라운 것이다. 살짝 부른 거죽에 온통 반달半圓꼴 비늘무늬를 정으로 새겼고 테두리도 처음 보는, 도드라지게 에워낸 버들잎무늬를 촘촘하니 놓았다. 등에 박은 연꽃받침 고리에다, 금실을 총총 감아 돌린 긴(40㎝) 천끈 걸이도 처음인,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솜씨의 작품이다.

③. 금사리병의 남쪽에, 글자마다 적색 안료(辰砂=鏡面朱砂=朱砂=HgS)인 붉은 칠朱漆을 넣은 글월銘文이 가득 새겨진追刻·釘刻 빛나는 금종이(金板, 15.5×10.5×0.1㎝)가 처음으로 나와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하자만, 뒷면 글씨는 칠을 넣지 않아 궁금증 일기도.

앞은 11줄에 9자씩의 99자, 뒤는 같은 11줄에 9자 중심의 94자인 모두 193자로 된 최고의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다. 백제 무왕武王 40해인, 639. 1. 29이란 때와 절일佛事이 꼼꼼히 새겨진 것!
행서가 엿보이는 깔끔端正·端整·날씬長美한 맵시의 해서체로 뚜렷한 필력과 서각書刻 솜씨까지 돋보인다.

④. 작은(1.3×2.5㎝) 금덩어리 4덩어리와, 좁고 길며 얇게 편 금조각(金片, 8×1.5㎝)이 18점이나 나왔다. 금조각 3점에는 동참한 시주자들이 다스리는 곳과 벼슬·이름들까지 또한 새겨져 있어 눈길 잡는다.

곧, 철필鐵筆 연장道具으로 힘주어 힘차게 그은, 「中部 德率 支受(栗?) 施金 壹兩(?)」-중부의 덕솔 벼슬인 지수(율?)가 금 1냥 시주 및 「下(=部)(鈹?)夫 及 父母妻子 (뒷면)-同 布施」-하부의 비피(?)부와 부모처자가 같은 (금) 보시함이라는 내용들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금조각의 글銘文에 보이는 보시·시주한 금이 같이 나온 금덩어리를 말하는 것인지, 금조각 그 자체들을 말하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⑤. 얇은 은판을 겹쳐 오려만든 꽃가지무늬의 은꽃관치레銀花冠飾도 2점 공양되었다. 1단과 2단짜리의, 끝이 길고 뾰족한 하트꼴 꽃봉오리 줄기가 붙은 6급 이상의 백제 벼슬아치들이 쓰는 섬세한 은꽃관(4.8×13.4㎝)인 것이다.

⑥. 은허리띠銙帶치레 2점도 나왔는데, 허리띠에 붙인 고리판銙板과 드림새垂飾다.

⑦. 사리홈舍利孔 가에 돌려둔 6점 원합圓盒. 속이 무엇으로 꽉 차 있는 은합 5점, 놋합 1점으로 납작하며 고식古式이다,
3점은 뚜껑 모서리를 오목깎기內灣로 돌린 치레, 1점은 뚜껑 등을 높인 돋을 치레, 1점은 몸매 거죽을 살짝 오목깎기內灣로 휘돌린 주름치레, 놋합 1점은 위아래를 자연스레 모죽임하고 뚜껑의 가는 3줄, 가운데는 작게 2줄의 동심원同心圓을 새긴陰刻 치레들이 눈길 잡고 있다.

⑧. 위쪽에 돌린 3뭉치의, 겹비단으로 감아싼 칼집刀鞘속의 손칼刀子들도 첫 자료다.
싼 비단은 천끈을 촘촘 감았고 더우기, 4점을 감싼 북쪽 유물은 금실金絲로 감았다. 주위에 흩어진, 비틀어 꼰 금실도 눈 뺏는다.
나무白骨로 된 날렵한 칼집은 옻칠을 하고 금까지 입혔다. 칼자루 고리環頭 속에는 금3고사리무늬를 끼었고 칼집끝도 금모자 치레를 한 놀라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을 싼 비단보 또한 짜임과 염색에 눈길 머물고, 옆 칼고리에는 낭자머리같이 땋은 칼끈이 꿰어져 있어 다회(廣)多繪 자료로 바로 다가온다.

⑨. 사리홈에 맨바닥에 그냥 놓여, 사리차림의 받침이 되는 유리판 자료도 여기서 처음 보이는 것! 엿판같이 손手製으로 만들어 아주 고르진 못하나 큼직한, 정네모(23×23㎝)의 두툼한(1.0㎝) 맞춤 유리판이다.
옅은 하늘빛 알칼리유리가 아닌가 하며, 1,300해가 훌쩍 넘는 오랜 세월에 탓에 백태白苔가 끼이고, 금이 가 8조각이 났다.

⑩. 가로 돌린 원합들 사이사이로 채워진 크고 작은, 희고, 푸르며, 파랗고, 붉고, 노란 유리·옥·진주·호박이나 마노같은 구슬들이 460점이나 나왔다.
새 구슬들과, 뚫린 구멍이 닳거나 꿰인 끈토막으로 보아 목걸이 따위를 너도나도 자비희사慈悲喜捨한 공양품들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자그만 천연진주 14알이 팔찌꼴로 놓여 눈길 모았다.

⑪. 이밖에, 둥근細環 금귀고리 1점과 놋고리靑銅環 1점도 함께 있었다.


5. 유물이 말하는 것

위에서 살펴본 미륵사 서돌탑 심주석에 나온 사리차림·사리갖춤은 하나같이 새롭고 놀라운 것이다. 사리를 차리는 곳場所과 갖춤새·꾸밈새 뿐만 아니라 나온 유물까지 그러하다.
금종이쪽에 새겨진 세련된 글씨로 쓰여진, 「잘 쌓은 공덕으로, 이승에 더구나 왕궁 태어난 부처님이 남긴 신령神靈·神異한 사리를, 역시 오랜 공덕을 잘 쌓아善因 태어난 백제왕후 좌평 사탁(택)沙乇적덕 따님이 깨끗한 재물淨財을 희사하여 절 짓는 사리로 639(무왕40)년 1월 29일에 받들어 맞이하여奉迎(돌탑에 넣어) 모셨다.

공양동참자들을 기록한 금조각편.

이 공덕으로, 대왕폐하의 장수와 홍법·교화弘法敎化 및 선정善政을 바라고 나아가, 왕후의 영원한 복덕구족福德具足으로 다함께 성불成佛을 이루자」는 글월이 나타난 것이다.
나아가 새겨진 금조각金片에서, 백제 8대성國中大姓八族 가운데 1품 정승인 사택沙乇 ·沙宅·砂宅씨를 비롯한 고위직과 중앙의 귀족인 중부中部·하부下部를 다스리는 4품 덕솔德率 벼슬아치들까지도 함께 동참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곧, 중부中部의 덕솔인 지수支受(栗?)가 금 1냥 시주施金 壹兩(?) 및 하부下(신라에서도 쓰인 部의 약자)의 비피부(鈹?)夫와 그 부모처자父母妻子도 같은 (금) 보시함同 布施이라는 내용들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꽃봉오리가 1단과 2단짜리 은꽃관이 공양되어 있어 또 다른 급수의 벼슬아치도 동참했음이 확인되었다. 6품 이상 벼슬아치가 쓴다고 알려진 은꽃관은 부여·나주·남원을 비롯한 백제무덤에서 나오던 것.

이렇듯, 발원자·시주자·공양자들의 모습을 제대로 잘 보여주는 으뜸 자료다.
아다시피, 639(武王 40)해는 무왕(600-641)의 말년이고, 무왕이 부여를 벗어나別都說 익산 금마 땅에 이 미륵사를 중심으로 왕궁사王宮寺·官宮寺·제석사帝釋寺를 지어 새로운 자리首府를 잡으려한 때이다.

중국은 당(唐, 618-907) 2대 태종(太宗, 626.9-649)(태종14)이며, 현장법사(玄奘, 602-664)가 인도로 떠난지 10해째이기도 하다.

양나라를 비롯한 남북조를 거쳐 수를 지나 당에 이르는 중국과의 영향과 교류가 가까웠다. 특히, 621(무왕22)해부터서야 무왕은 해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626(무왕27)해는 고조高祖에게 명광개明光鎧라는 빛나는 황칠黃漆갑옷를 받쳤으며, 같은 해 2대 태종 즉위(9.4)를 맞아 12월에도 사신을 보내고 있다.

637(무왕38)해에는 갑옷鐵甲과 아로새긴 도끼雕斧를 받쳤고,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모신 같은 해 10달 뒤(639.10)에도 또한 금갑옷金甲과 아로새긴 도끼雕斧를 보냈음이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와 있다.

여기서 보듯, 백제의 공예는 이미 국제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이를, 미륵사 사리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갖은 구슬과 손칼刀子을 비롯한 유물은, 무령왕릉(525)에서 왕흥사(577, 위덕왕24)를 거쳐 왕궁사에 닿는 자료에서, 금사리병의 큰입廣口과 꼭지, 뚜껑과 몸매器形들도 왕흥사의 금·은사리병을 잇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수를 이어 당나라 초기의 영향 받음도, 몸매와 무늬에서 잘 읽혀지고 있다.
글자에 붉은朱砂=HgS朱漆을 넣은 것도, 왕궁사 금동사리·금강경외함 거죽의 붉은 칠 나아가,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654) 머리의 봉황무늬에 넣어진 붉은 칠로 이어지고, 이는 벽사辟邪 구실이 된다.

더구나, 금사리병의 배를 비롯한 어깨에 보인 3잎당초꽃잎무늬는 왕궁사 돌탑 금사리외합의 뚜껑과 녹유리사리병의 금은받침에 난 무늬와 같은 틀形式이어 얘깃거리다. 또한, 빗금櫛目무늬=깃털羽毛무늬와 바탕의 동그라미무늬魚子·魚卵·雨點文도 같은 틀이다.

금사리병과 왕궁리탑 금사리합에 같이 보이는 3잎당초꽃잎무늬와 빗금 및 어자무늬.

따라서, 같은 백제계 전통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왕궁사쪽 무늬가 더 거칠고 엉성하여 시대는 좀 뒤로 두어야 하겠다.

미륵사 사리갖춤새는 뜻밖에 아주 단출하다. 유물을 바깥함外函이나 보자기같은 걸로 싸지도 않고 사리홈에 그냥 넣고있어 갸웃거려진다.
금사리병 속에 (금속?)사리병이 들어있음이 밝혀져, 유리판→공양품과 명문판→금사리병外壺·外甁→사리병의 4겹차림으로 볼 수 있겠다. 구슬더미 위에 사리병을 놓은 것도 왕궁사와 같아 눈길 끄는 것이다.

바닥에 유리판받침을 놓고, 맨 위쪽에는 칼들을 돌려놓은 차림새도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풀어야할 거리.
끝으로, 밝혀진 사리봉영기에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미륵신앙에 대한 말이 전혀 없어 궁금증이 매우 크다. 하지만, 부처님의 힘을 빌어 「(백제)왕후」와 「대왕폐하」라고 내세운 것에서는 여러가지를 읽어낼 수가 있겠다.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