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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4.맑은 영혼의 땅 라싸의 첫인상

기자명 법보신문

관세음보살님 받든 연화좌대가 이 같으리

 
라싸를 둘러싼 해발 4000m의 고봉들은 연화좌대의 연잎을 닮았다. 포탈라궁에서 바라본 라싸시내는 중국의 난개발로 대한민국의 여느 도시를 보듯 번잡스러워보인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란 세 가지 독(毒)은
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상이 없다네
바라밀과 삼학(三學)을 깨닫지도 못했는데
‘나’를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신통력이 있다네

삼독이 내 마음에 찰나(刹那)라도 머물면서
망상을 일으키고 나를 해하는데도 방일(放逸)하네
그에 맞서 싸우려하지 않고 기꺼워하는 것은
삼독의 노예로 살아감을 기뻐하는 ‘치욕’이라네
                                          『입보리행론』

무소유(無所有)와 소욕지족(少慾知足), 이 두 가지 가르침이 갖는 불교적 의미는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우리 불자들에게는 계율과 선정, 지혜(三學)를 증득하기 위한 제일의 바라밀이요, 삼독에 휘둘려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나’를 청정한 ‘나’로 정화하기 위한 백신(vaccine)일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이러한 진리를 잘 알고 있기에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을 보면서 ‘무소유’란 백신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그렇게 살아가지 못함을 깊이 참회하고 있다. 어느 어느 종교라는 분별의 마음을 벗어던진 채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도, 인권 운동가들도, 민초들도, 방종한 권력자들도 추기경의 선종 앞에 머리를 숙이고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것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높이’ 만을 쫓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왔음에도 추기경의 ‘마이너스’가 된 통장과 수십 년 손 때 묻은 안경, 낡은 미사 제구에 담긴 무소유의 가르침에 귀의하려 수십만 인파가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서너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추기경의 선체(善體) 앞에 머무를 수 있는 단 몇 초의 짧은 시간을 얻었음에도 사람들은 전혀 불평을 들어내지 않았다. 그러한 번거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에너지의 원천들은 물질에 의한 행복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맑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두터운 업장에 의해 그러한 마음이 감추어져 있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사천성 북서부의 청두 역을 출발해 3360km를 달리는 내내 칭장(靑藏) 열차는 팔만사천 설산들 사이를 지나쳐 오면서 티베트의 때 묻지 않은 자연들과 고봉들의 영상들을 선사했다. 설원들과 고산의 호수들이 눈앞에 맑게 펼쳐질 때면 어렸을 적 공책에 낙서를 하듯 설원과 호수 위에 물음표를 끼적였다. 그리고 문득문득 일어나는 의문들을 써 대곤 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들은 티베트의 옛 모습에 관한 것들이다.

‘자원이나 기후는 비록 심혹하지만 과연 그들은 건강한 무소유 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중국이 뿌려놓은 삼독의 씨앗은 지난 반세기 동안 라싸의 맑은 영성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中 침탈 반세기, 라싸는 여전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라싸의 사찰을 참배하는 시간에도, 주색(酒色)으로 찌들어있는 홍등가가 즐비한 신시가지를 지나면서도 마음에 문신처럼 짙게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조상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고 삼독에 끌려 다니는 젊은 티베트인들을 만나더라도 그러한 의문이 자꾸 일어난 까닭은 티베트의 맑은 영성에 대한 끝없는 신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하더라도 라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곳은 힘없는 노인과 어린이, 여성을 존경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농경공동체의 모범 그 자체였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단 한 명의 거지도 없었던 ‘은둔의 샹그릴라’였다. 순례를 통해 그들 고유의 불교적인 심성과 의지로 완성한 ‘샹그릴라’를 친견할 수 있으리라.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었던 그들은 완벽한 협동공동체를 일구어 그 틀을 1000년 이상 유지해 왔다. 중국의 욕망을 상징하는 칭장 열차에 몸을 싣고 라싸로 향하면서 팔만사천 설산 보살님과 산신님께 의지해 그들의 옛 모습이 온전하기를, 그들 스스로 옛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복원할 수 있기를 절절히 기도했다.

11월 5일,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해발 4000m 고지에 내리 쬐는 햇볕이 너무나 강렬해 눈은 자꾸 열차 내부로 향하곤 한다. 이제 열차는 포탈라궁과 조캉 사원의 사진들을 보면서 상상해 왔던 라싸의 관문인 역사로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있다. 드디어 라싸에 도착한 것이다. 라싸역은 육중한 칭장 열차를 단숨에 집어 삼킬 만큼 그 규모가 대단했다. 역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눈 덮인 고봉들의 위엄에도 라싸역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을 만큼 위압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라싸역 앞, 티베트인들을 감시하는 중국 공안과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마치 티베트와 중국의 현재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역사에선 힘을 앞세운 삼독의 개발로 라싸의 기운을 단박에 누르려했던 중국의 패권주의가 강하게 느껴진다. 라싸역 플랫폼을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으려 하자, 역사의 공안들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가로저으며 사람들을 역사 밖으로 쫓아내느라 열을 올렸다. 아마도 2008년 3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라싸를 비롯한 티베트 전역에서 일어난 독립 봉기가 그들의 심기를 잔뜩 불편하게 한 듯하다. 그러한 짐작은 조선족과 티베트인 가이드들의 설명을 들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라싸는 지금 질서를 재편하고 있습니다. 가이드 없이 밤에 홀로 라싸시내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으며 공안이나 군인의 사진을 찍으면 절대 안 됩니다. 포탈라궁은 물론 주요 사원의 내부를 허락 없이 촬영하면 사진기를 빼앗길 뿐 아니라 공안한테 끌려가 취조를 받아야 합니다.”

질서를 재편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협박과도 같은 당부, 그것도 티베트인 가이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의 그러한 협박(?)은 중국인들의 강압에도 전통을 유지해 온 티베트인들의 영혼이 여전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아 일면 반갑기도 하다.

빌딩 숲, 포탈라궁을 포위하다

급히 역에서 빠져 나와 라싸역을 바라보았다. 역사의 겉모습은 서울 복판의 초현대식 건물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했다. 과연 ‘중국’스러웠다.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인지라 눈은 자연스레 라싸 시내로 향했다. 역시 실망스러웠다.

지난 50년의 세월을 강제로 침탈하면서 중국이 신들의 땅에 빼곡히 세워 놓은 빌딩들과 조형물들은 거대한 숲을 이루어 티베트의 절망적인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티베트의 상징이자 최고의 성지인 달라이라마의 포탈라궁은 빌딩과 송신탑, 철주에 완전히 포위를 당해 신음하듯 위태롭게 서 있었고 티베트의 사원들은 라싸를 둘러싼 고봉의 초입에 소박하게 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 라싸에서 볼 수 있는 티베트만의 온전한 모습이라곤 라싸의 자연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광경은 라싸역 인근에서 중국 공안과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티베트인들을 감시하는 티베트인 공안들의 열성(?)적인 활동이었다.

그 모습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겪었던 아픔을 빼닮았다. 티베트인 공안들은 중국의 공안들보다도 더 열심히 티베트인들을 괴롭혔고 더 크게 소리 질러 티베트인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졸개가 된 그 티베트인들의 머릿속엔 달라이라마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을 대신해 중국의 중화사상(中華思想) 만이 가득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라싸와의 첫 만남은 미간을 일그러질 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고 가슴을 아리게 했다. 한국의 여느 도시를 옮겨 놓은 듯 욕망이 가득해 보였고 번잡스러워 보였다. 티베트의 옛 아름다움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라싸의 전체적인 풍광과 자연은 이곳이 왜 신들의 땅이었는가를, 염소를 기르는 울타리라는 소박한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포탈라궁이 앉아있는 곳은 자연이 빚은 연화좌대처럼 보였으며 라싸를 포근히 감싸 안은 고봉들은 바로 연잎의 형상이었다. 티베트인들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라마가 포탈라궁에 영원토록 상주하리라고 확신했을 것이며 라싸 전체를 달라이라마와 함께 극락으로 타고 갈 ‘반야용선’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티베트의 순례자들이 코라(성지돌기)와 오체투지를 통해 라싸의 기운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가꾸어야 할 이유이며 라싸는 그들의 신앙으로 신들의 땅이자 영혼의 성지로 환생할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달라이라마가 상주했던 50년 전 그 때를 상상하니 잔잔한 영상들이 떠올라 들쭉날쭉한 마음을 차분하게 돕는다.

 
왼쪽 송신탑 옆에 있는 포탈라궁(언덕 위 붉은색 건물)이 빌딩에 포위 당해 왜소해 보인다.

룽다는 여전히 바람에 휘날리고

“포탈라궁 주변에는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받으려는 듯 야트막한 티베트 전통의 가옥들이 올망졸망하게 어울려 있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사람들은 야크와 함께 보리밭을 갈고 있다. 보리밭을 끼고 있는 신작로에선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이 포탈라궁을 오른쪽 어깨에 둔 채 시계방향으로 나아가며 정진하고 있다. 염소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아이들은 실개천 진흙 구덩이에서 장난을 친다.”

‘무소유와 소욕지족의 공동체’인 라싸의 미래는 희망인가, 절망인가. 티베트인들은 희망이란 말에도, 절망이란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조상님들이 늘 그러했듯이 그들 역시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영성을 맑게 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기도하고 정진할 뿐이다. 라싸의 산과 들녘에선 누군가 걸어 놓은 ‘룽다’(경전을 적은 오색의 천)가 중국의 침탈에도 여전히 티베트의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다. 룽다는 티베트 불교의 영원(永遠)을 노래하듯 멈추는 법이 없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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