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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남은 경구]화가 이호신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의 참 모습은 진리를 보는 일”

형상으로서 부처를 구해서는 안된다.
형상은 참된 부처가 아니다. 참된 부처는 깨침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을 이룬 자만이 참된 부처를 볼 수 있다. -화엄경

 

위의 경구를 떠 올릴 때마다. “부처의 참 모습은 진리를 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지하다시피 부처의 실제 모습을 보고 전한 자는 없다. 역사적으로 불타 열반이후 500년이 지난 기원 후에야 경배의 대상으로 불상이 제작되었기에 그 시원(始原)은 인도의 마투라, 간다라 불상이었는데 여러 불교국으로 전파되며 지역의 특성과 형식을 갖게 된다. 이른바 시대가 불상을 낳았고 인류의 종교 예술 중 불교 조각, 불화의 편년과 양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껏 경배해 온 불상은 이처럼 당대의 시대성과 제작자의 성향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 불상과 불화는 어떠해야 할까?

삼세(三世)의 인연으로 천불(千佛)을 그리게 된 나로서는 이 물음 앞에 간절한 서원으로 잠겨 있다. 모든 것이 열린마당이요, 인류가 지구촌인 상생(相生)의 시대에 걸맞는 인류애를 향한 불화는 어떠해야 할지를 화두로 삼게 된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실크로드와 돈황, 인도, 파키스탄, 중국의 석굴 등을 살펴본바 초기 양식이 훨씬 다양하고 다채로운 불화였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긴 누가 애초에 부처를 보았다고 이르던가. 오늘날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획일적으로 공급되는 불상과 불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여 세상의 부처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는 천불도(千佛圖)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던 경전(법구경)을 설하는 수화(手話) 부처님으로 나투게 되었다. 자연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형식을 요망함에 천불의 배경은 삼라만상, 화엄의 세계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인의 성불을 염원하는 행위로서 개성과 무애(無碍)로 빚어진 숭고함을 진리의 모습, 즉 불타로 상징 하려는 까닭이다.

부처님 위해 여러 형상 세우거나
부처님 상 조각한 이들 모두 성불했고,
칠보나 놋쇠나 백동, 납, 주석, 쇳덩이나 나무,
진흙으로 만들거나 교칠포(膠漆布)로 치장하여
부처님상 장엄한 이들 모두 다 불도(佛道) 이루었고,
백복(百福)으로 장엄한 부처님상 그릴적에
제가 하거나 남 시킨 이들 모두 다 성불했고,
아이들 장난으로 풀, 나무, 붓이나, 꼬챙이로 부처 모양 그린이들.
이 같은 모든이들 공덕을 점점 쌓아 큰 자비심 갖추어 성불했네.
  -『법화경』 이운허역(동국대학교 역경원 1990, PP67-68)

사실인즉 장엄한 불화 못지않게 천진한 아이들이 그린 부처를 볼 때마다 나의 붓길은 망설여 진다. 이처럼 ‘세상의 부처’를 그리는 마음엔 어떤 분별도 있을 수 없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가 없는 무아(無我)의 행위인 것이다.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아니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그 ‘진리의 숲’을 찾아 오늘도 붓을 든다.

화가 이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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