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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가 강순형의 미륵사탑 사리구 깊이 보기]

기자명 법보신문

선화 공주는 발원자 ‘사택 녀’는 시주자
완공에 오랜 세월 … 서동요 생생한 역사

6. 서동과 선화공주는 전설?

 아다시피,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600-641)인 서동薯童왕자와 신라 선화善花·善化공주의 사랑매듭자리 열매結實로 이름나 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꼼꼼 잘 적혀 있어서다.

 그런데, 이번 서탑에서 나온 글월舍利奉迎記에는 이게 1톨도 비치지 않아 말이 많다. 해서, 이제 그만 못믿을 전설과 설화로 던져버릴 걸로 얘기 나고 있다. 과연果然 그럴까.
 잘 알듯, 유사권2, (紀異2), (21)「武王」에는 서동왕자·선화공주 얘기가 3쪽으로 펼쳐져 있다. 곧, 1. 태어나 자라며, 마薯蕷를 캐 팔아 살아가는 쪽, 2. 신라에 들어가 서동요薯童謠를 퍼트려 진평왕(眞平王, 579-632)의 아리따운 셋째딸三公主 선화와 맺어 마누라로 데려오는 쪽, 3. 임금 때 비夫人가 바라는所願 큰절大伽藍 미륵사彌勒寺를 지었다로 엮어져 있다.

 여기서 3째인 미륵사를 세운, 임금과 비가 함께 본 못 속에서 솟아난出現池中 미륵3존彌勒三尊을 모실 법당과 탑을 3씩 세웠다는殿塔廊廡各三所創 것은, 오늘의 미륵사에 그 자취3殿3塔가 그대로 나타나 있으니 할 말 없다.
 다음은 2째의, 선화공주를 데리러 신라에 가 아이들羣童에게 퍼트린唱之 서동요가 적혀있는 것을 살펴보자.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통하고서)
  薯童房乙 (서동방을)
  夜矣卯乙 抱遣去如 (밤을 안고 나간다)

 보다시피, 이 노래「歌樂」는 신라 향찰鄕札 곧, 이두吏讀가 들어가 있어 신라(·백제) 때 것임을 누구도 발 걸지 않는다.
 더구나,  8구체→10구체가 아닌 앞선, 4구체인 원시·초기형식 단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본질적인 민요의 노래이자, 내용과 표현도 그야말로 직설을 벗어나지 못한 초보 민요인, 아이들이 부른 동요童謠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동요는 가장 오래된, 글로 남아오는 첫最初·最古 향가鄕歌인 것이다.
 더더구나, 이는 백제가 아닌-서동이 신라에 가서 퍼트려-신라에서 불러진 것이지, 백제서 불러진 노래가 아니다! 곧, 백제쪽이 아닌 신라쪽의 것인 신라 향가=사뇌가(詞腦歌·詞腦=동방)=신라요·신라노래로 지어지고, 신라서 불러지고, 퍼졌기 때문에 어떻게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서탑에서 나온 639(무왕40). 1. 29때의 「我 百濟王后 佐平 沙乇積德 女」인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1. 이 글 그대로, 이는 선화공주와 다른 왕비이다. 그렇다면, 효성·형제애 오롯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린 무왕 맏아들元子·太子 의자왕(義慈王, 641.3-660)이 임금된 뒤, 모후國主母가 죽자(642.1) 그녀가 낳은 (아우)왕자 교기翹岐 弟王子와 그 여동생 및 고위 관리 40여명을 추방시켰다(『日本書紀』, 「皇極天皇 원년(642). 2월」)는 속의 그 국주모인 것이다.

 곧, 의자왕의 어머니 아닌 계비가 또 있었던 것이고, 그녀는 가장 센 권벌·세도가로 왕실 외척관계까지 맺은 사택沙宅·沙乇씨 집안의 정승佐平 사탁(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자왕이 무왕(600.5-641.3) 말년(무왕33)인 늦은 632해에야 태자가 된 것도 이해될만한 것이다.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 爲太子-『삼국사기』, 「 백제본기」
 따라서, 의자왕은 어머니가 선화공주이고, 그녀의 아들-맏아들元子義慈 爲太子임도 밝혀진다.

 2. 아니면, 일부의 말대로 百濟王后佐平 沙乇積德 女를 따로따로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왕후는 그야말로 미륵사를 발원한 선화공주가 되고, 권문세가 좌평의 딸은 시주자 그것도 서탑의 주 시주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탑(석탑)·목탑·서탑(석탑)으로 나란히 선 3탑에서, 가운데의 나무탑 주인공은 당연히 발원자로서의 선화공주가, 동탑은 또 다른 주 시주자가 있음을 읽게 된다. 
 바로, 백제왕후인 선화공주가 주인공인 발원자가 되어, 중앙의 높은 권문세가들이 시주자가 되고 나아가, 서탑에 공양된 금쪽金片에 새겨진 4품인 덕솔를 비롯한 남부·중부들을 다스리는 중앙 및 은꽃관銀花冠飾들을 공양한 고급벼슬아치들이 함께-동참한 거국 불사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보이는 639. 1. 29의 좌평佐平 사탁적덕沙乇積德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641(의자왕1). 11에 죽은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智積과 또, 한참 뒤의 654(의자왕14, 594?). 1. 9에 비砂宅智積碑를 세운 사택지적砂宅智積들은 어떤 사이(같은? 아우나 형? 아들 사이도?)인지도 눈길 끄는 것이다. 
 3. 그러면 이제, 서동은 어떻게 된 것인가? 어찌해 마나 캐며 서울 부여 남쪽 못가京師南池邊에 살았고, 신라에 가 선화공주를 데려오고 또, 임금이 된 것인가?
 잘 아다시피, 성왕(523-554.7)의 맏이元子인 위덕왕(창왕, 525~554.7-598.12)이 30살에 임금이 되니 아우二子 혜왕은 저절로 권력다툼서 멀어져야 되고 더구나, 형 위덕왕이 74살까지나 임금자리에 있게되니, 70객이나 된 아우 혜왕과 그 아들(50대? 법왕)은 더욱 오래 권력에서 떨어져 멀어지고, 멀도록 밀어낸 견제 속의 야인으로 있었겠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아들 가족(50대 법왕과 30대? 아들 서동)도 마찬가지로 그냥 별볼일 없었을 것. 이에, 그만큼 보다 자유로운 서동은 왕족신분이니 걸림없이 살게되어 여러 일들로 이어져 마침내 선화공주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위덕왕을 이을 자식 없어지니(아좌태자는 597해에 일본 감) 이은 늙은, 아우 혜왕(598.12-599)과 그의 맏이長子 법왕(599-600.5)도 1해만에 돌아가 덜컥 그만 무왕(600.5-641.3) 차지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무려 42해동안이나 자리를 지켰다. 
 때문에, 이러한 희한한 천명임을, 사마천이 『史記사기』에 적은 것을 빌려 『삼국유사』에 일연스님도 말했다시피紀異叙, 괴력난신을 뜻하려는 게 아니라 이러이 남다름「異」을 표현한 것이다 했으니, 결코 설화나 신화·전설로 몰고 가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욱, 눈 불켜 그 속에 숨어있는 것을 제대로-올바로 잘 찾아내야 할 일이다.

 
사리봉안기에 새겨져 있는 ‘사택’ 명문. 

7. 마무림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간추려 보면,
 ①. 금종이金板에 새겨진 글월銘文에 의하여, 백제왕후 사택적덕 딸沙乇積德女이 보시捨淨財하여 절을 세움에造立伽藍, 639(己亥年, 무왕40). 1. 29에 부처님 사리를 (서쪽 돌탑에 넣어) 모셨다奉迎舍利.
 이 공덕으로, 대왕폐하의 장수와 홍법·교화弘法敎化 및 선정善政을 바라고 나아가, 왕후의 영원한 복덕구족福德具足으로 다함께 성불成佛을 이루자는 내용이 밝혀졌다.
 여기서, 가람 곧, 절은 법당을 먼저 세우고, (서)탑을 세우려 탑의 1층 심주석心柱石에 사리를 모셨다고 봐야 하겠다. 그것은, 이보다 10해 앞서는 기축(己丑, 629)이라 도장 찍힌 기와印章瓦를 비롯한 앞선 시기가 나왔으므로, 가람이 북남으로 둔 전·탑殿·塔을 1짝으로 하여 동서로 나란히 3(동·중·서)씩이 마련3殿3塔되어있어 적어도 가운데의 전과 탑(목탑)이 당연히 먼저 세워졌다고 보아서 그렇다.
 따라서, 동탑(돌탑)도 세운 때가 서로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②. 「백제왕후 사택적덕 딸」은, 왕후인 사택적덕 딸로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백제왕후와 사택적덕 딸을 따로 보아, 백제왕후는 발원자發願者로서 선화공주인 왕후로 보고 좌평인 사택적덕 딸은 이 탑의 (주) 시주자施主者로 보고자 한다.
 이는 무왕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을 열어두고자 함이기도 하다. 곧, 절터의 발굴조사로 수막새기와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도 엿보이기도 한다하거니와, 연못같은 습지에 절이 세워졌음도 밝혀져, 『삼국유사』에 나오는 못을 메우고 신라에서 장인百工을 보내 도왔다는 것과 맞아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③. 사탁적덕沙乇積德의 사탁沙乇은 백제 8대성의 권문세가인 사택沙·沙宅·砂宅씨를 당시에는 같은 발음이겠고, 뒤에 붙은 乇·宅들은 그 성沙·砂이 살았던 자리·장소沙宅=모랫가를 뜻해 붙은 자취로서 결국 복성이 되게 된 것이다.
 ④. 그밖에도 공양된, 중부·하부中部·下部의 4급 달솔벼슬과 이름이 있는 중앙귀족이 적힌 금쪽金片과 은꽃관銀花冠飾으로 상급관리들의 동참이 있음을 보여주며, 하부下部의 부는 阝의 약자인 卩(절)로 쓰였는데 이는 신라에서도 같이 써인 것이어 눈길 끄는 것이다.
 ⑤. 금쪽金片에 달솔 등이 보시布施한 금1냥壹兩은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며, 양은 초서로 쓰였음도 중요하다.

 ⑥. 탑에서 나온 글舍利奉迎記에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미륵신앙에 대한 말이 전혀 없어 궁금증이 매우 크다. 하지만, 부처님의 힘을 빌어 「(백제)왕후」와 「대왕폐하」라고 내세운 것에서는 천자관·자주성 등 여러가지를 읽어낼 수가 있다.
 ⑦. 이밖에도, 법왕法王·8곡八斛·보시布施·선인善因·절이竊以를 비롯한 낱말의 쓰임새와 출현은 주목되는 것이다.

 ⑧. 사리홈에 넣어진, 여러가지 빛과 감의 구슬과 둥근細環 금귀고리·금족집게·손칼刀鞘들의 공양물치레는 전통적인 구성이다. 너도나도 공덕(푼야)과 발원과 믿음信仰을 탓으로 걸고, 끼고 있던 옥목걸이나 금은-가락지·귀고리까지 앞다투어 내어놓는데 한마디로, 이를 자비희사慈悲喜捨라 하는 것이다(『梁書』·『南史』등에, 刹下 及王侯妃主百姓富 至所 捨 金銀環釧鑷等 諸雜珍寶 充積, 남인도 실론의 大·小史經에도 佛陀遺骨納於…並以種種 寶玉供養·供養 瓔珞王冠環釧 及其他 極多 裝身 供養).
 미륵사탑에서도 바로, 이런 자비희사가 나타난 좋은 예다. 또, 나온 다종다양한 만큼-나라·왕실에서 세우는 절답게 동참한 많은 왕족의 남녀권속을 비롯한 귀족 중심의 귀중한 보화들이 공양된 것이다.

미륵사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 

 ⑨. 천연진주팔찌와 금사리병·원합들을 비롯한 작품에서 백제의 편년·기준작이 될뿐만 아니라 수→(초)당의 영향과 나아가, 인도→중앙아시아→남북조를 이어 최신 미술 유행을 신속히 흡수하는 백제문화의 솜씨와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사리병에 보이는 수·당풍의 당당한 부피감 몸매와 굵은 보주꼭지 및 무늬와 그 솜씨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아다시피, 639(武王 40)해는 무왕(600-641)의 말년이고, 무왕이 부여를 벗어나別都說 익산 금마 땅에 이 미륵사를 중심으로 왕궁사王宮寺·官宮寺·제석사帝釋寺를 지어 새로운 자리首府를 잡으려한 때다.
 중국은 당(唐, 618-907) 2대 태종(太宗, 626.9-649)(태종14)이며, 현장법사(玄奘, 602-664)가 인도로 떠난지 10해째기도 하다. 양나라를 비롯한 남북조를 거쳐, 수를 지나 당에 이르는 중국과의 영향과 교류가 가까웠다. 특히, 621(무왕22)해부터서야 무왕은 해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더불어, 626(무왕27)해는 고조高祖에게 명광개明光鎧라는 빛나는 황칠黃漆갑옷를 받쳤으며, 같은 해 2대 태종 즉위(9.4)를 맞아 12월에도 사신을 보내고 있다. 637(무왕38)해에는 갑옷鐵甲과 아로새긴 도끼雕斧를 받쳤고, 미륵사 서탑에 사리를 모신 같은 해 10달 뒤(639.10)에도 또한 금갑옷金甲과 아로새긴 도끼雕斧를 보냈음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잘 나와 있다.
 여기서 보듯, 따라서 백제의 공예는 국제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이를, 미륵사 사리유물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⑩. 더구나, 금사리병의 배를 비롯한 어깨에 보인 3잎당초꽃잎무늬는 왕궁사 돌탑 금사리외합의 뚜껑과 녹유리사리병의 금은받침에 난 무늬와 같은 틀形式이어 얘깃거리다. 빗금櫛目무늬=깃털羽毛무늬와 바탕의 동그라미무늬魚子·魚卵·雨點文도 또한 같은 틀.
 ⑪. 자그만 금종이金板쪽에 줄지어 쓰여진 글월銘文의 글씨가 매우 뛰어나다. 곧, 최고의 글과 글씨 솜씨를 지닌 높은 선비의 것이다. 사·덕·승자에서는 흘림기草書까지 보여주고 있다.

사리봉안기의 서각은 당대 최고 서각가의 솜씨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또한, 최고의 서각가書刻家가 익은 솜씨로 획 따라 그대로 정을 두드려鎚刻내 잘 새긴 글이기도 하다.
 더구나, 글씨가 가늘고 긴 데서 그리고, 유의 책받침, 능, 불가不可, 사使자들에서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특히 76살에 쓴 가장 이름난 「구성궁 예천비명九成官 醴泉碑銘(632. 여름, 태종6, 무왕33)의 글씨 특징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어 놀랍기만 하다. 물론 또, 같은 4·6병려체문체.
 「정서제일正書第一」 글씨로 칭송받는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당 태종이, 더더구나 100사리탑을 세운 수 문제文帝의 인수궁仁壽宮을 고친 구성궁九成宮에 세운 비석 글씨다.
 구양순의 글씨는, 북위北魏·北碑글씨의 골격을 지녀 칼과 도끼날같은 날카로운 맛의 모나고도 둥글어 온화하고도 힘차다.
 따라서, 미륵사탑의 명문에서도 남조글씨가 아닌 고구려 등에 보인 유행 지난 6세기의 북주체가 드러난다. 곧, 금강金剛의 剛자에서 보이는 광개토대왕비의 같은 고자인 剛자나 폐·민자에는 점획이 하나 더 들어가 있는데서 그러한 것이다.

 뒤이은 654해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도 4·6병려체문체의 구양순체여서 이 시기의 유행을 잘 말해주고 있다. 
 때문에, 같은 해이자 10달 뒤(639.11)에 번개로 불탄 제석사의 7층탑의 사리유물 및 구리종이銅作紙로 만든 것과 그에 새긴 금강경金剛波若經 글씨체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⑫. 그러나, 미륵사 사리갖춤새는 뜻밖에 아주 단출하다. 유물을 바깥함外函이나 보자기같은 걸로 싸지도 않고 사리홈에 그냥 넣고있어 갸웃거려진다.
 금사리병 속에 (금속?)사리병이 들어있음도 밝혀져, 유리판→공양품과 명문판→금사리병外壺․外甁→사리병의 4겹차림으로 볼 수 있겠다. 구슬더미 위에 사리병을 놓는 것도 왕궁사와 같아 눈길 끄는 것이다.
 바닥에 넓은 유리판받침을 놓고, 맨 위쪽에는 칼들을 돌려놓은 차림새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도 풀어야할 거리다.

-사진 등의 자료를 제공해준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에 감사 드림.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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