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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8.그들만의 서방정토 포탈라궁 [下]

기자명 법보신문

천3백년 순례 지금도 이어져
中 반세기 침탈은 촌각일 뿐

‘깨달음’은 두 가지 방법으로 완성할 수 있다. 하나는 명상과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일상으로 관찰하면서 매 순간을 깨끗하게 정화해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웃을 위한 상(相)이 없는 사랑을 실천해 이 세상을 맑고 자비롭게 장엄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성과 영성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완성된 꽃(부처)을 피울 수 있다.

포탈라를 순례하는 길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길이다. 매우 가파르거나 편안한 마루가 반복되는 포탈라 길은 티베트의 민초들이 발원해 온 정토세상과 환생, 윤회, 자비에 관한 가르침들을 파노라마처럼 차례로 일깨운다.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직선도로가 아니라 지그재그로 오가는 이 길의 종착은 달라이라마가 상주하는 붉은 궁전이다. 그들이 발원해 온 정토세상이 최종 목적지인 셈이다. 이 순례 길은 인간의 마음을 더욱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면서 하심(下心)을 깨닫게 한다. 오르는 내내 더 가쁘게 숨을 몰아쉬게 하고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고 구부리는 고통을 익숙하게 한다.

 
포탈라를 둘러싸고 있는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 티베트 불자들의 순례는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윤회를 확신하는 그들에게 반세기 동안 이어진 중국의 강압적인 고통은 순간일 뿐이다. 사진제공=한국식물사진가협회 정회원 심창현

마치 뒷짐을 진 노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도 잠깐이다. 오르막의 끝은 늘 잠시 쉴 수 있는 평평한 골목 마루로 이어지고 미로처럼 얽힌 골목의 입구에는 티베트를 지켜주는 불보살들과 사천왕, 신장들이 좌우에 서서 자비로운 눈빛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포탈라는 한 단계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순례자가 받았을 법한 작은 아픔까지도 어루만지듯 평평한 쉼터를 선물하면서 잠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라고 권유한다. 그런 뒤에는 또 고통스런 미로로 순례자를 이끈다. 때로는 힘들 때도 있으나 때로는 행복할 때도 있는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과도 같다.

오르는 중간 중간의 좌우 벽면은 티베트 불자들이 보시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천이 가지런히 포탈라를 감싸고 있다. 그 천은 티베트의 보배로운 가축인 야크의 털로 짠 것이다. 굵은 야크 털로 짠 초대형 천에는 인드라망을 상징하는 커다란 무늬나 백색의 법륜, 복덕을 기원하는 다양한 형태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꾸밈이 없는 문양들은 투박하지만 단조롭고 순수하다. 문양의 선들은 일체의 생명들이(頭頭物物) 서로 의지하면서(相依相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연기(緣起)의 원리를 보여주듯 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포탈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장엄물들이 티베트 민초들이 발원해 온 정토세상의 일부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포탈라의 미로들은 대단히 비밀스럽다. 다음 순간에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라며 은근히 기대감을 갖게 한다. 소년 달라이라마 역시 자신의 자서전에서 수년 동안 머물렀음에도 포탈라의 비밀스러움을 다 알지 못한다고 회고하면서 그 곳이 무척 답답했다며 투정하듯 토로하고 있다.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기에 어둡고 침침한 겨울 궁전 포탈라는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강하게 자극했을 것이다.

포탈라 순례 길은 깨달음의 길

지난 반세기 동안 라싸를 침탈해 온 중국은 포탈라에서 제14대 달라이라마인 텐진 갸초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려 했다.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머물지 않았던 시대로 시간을 되돌려 티베트 사람들의 기억에서 텐진 갸초를 지우려했을 터이다. 티베트의 전부이면서 귀의의 대상인 텐진 갸초의 역사는 과거에만 존재했을 뿐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음을 티베트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포탈라에서 달라이라마 14세의 자취는이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티베트인들이 살아있는 한 중국의 욕심은 욕심일 뿐 실현 가능하지 않다. 달라이라마를 기억하면서 포탈라를 순례하는 티베트 민초들의 행렬은 지금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비록 달라이라마 14세의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쉼 없이 포탈라를 순례하고 있으며 검붉은 그들의 얼굴엔 여전히 행복의 미소가 깃들어 있다.

그 언젠가는 달라이라마가 환생하시어 다시 귀환할 것이라는 윤회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생을 생의 마지막으로 본다면 중국의 속셈이 틀리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윤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억측이다. 티베트인들이 있는 한 달라이라마 1세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운 달라이라마 14세나 같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기에, 중국의 욕심은 결코 다음 생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독재나 폭력에 의한 강압이 100년을 넘긴 일이 없지 않은가.

1000개 방사는 풀리지 않는 비밀

이제 포탈라의 정상인 붉은 궁전 아래에 있는 광장이다. 궁전에 오르는 나무 계단은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순례자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다. 한 쪽은 일반인들의 행렬로 북적이지만 달라이라마를 위한  오른편 계단은 텅 비어있다. 주인 잃은 포탈라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이 계단을 지나면 역대 달라이라마의 초르덴(불탑)과 불상들이 봉안돼 있는 법당이다. 순례자들이 행여나 포탈라의 사진을 찍을까 감시하는 티베트인 승려(?)와 중국 공안의 눈길이 차갑게 다가온다.

 
제5대 달라이라마 롭상 갸초의 영탑, 역대 다른 달라이라마의 영탑에 비해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금으로 장엄한 이 탑은 높이만도 12.6m에 달한다.

그들의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듯 아무렇지도 않다. 조금 전 새하얀 계단을 지나 도착한 너른 마당에서도 귀퉁이의 망루에 서 있던 중국 공안들이 쏘아보는 눈길과 마주 쳤었다. 그들 역시 지금 이 시간, 라싸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일 뿐이라고 생각을 돌이키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어두컴컴한 붉은 궁전의 법당에 들어서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라마의 존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겔룩파를 상징하는 노란 법왕 모자를 쓴 채 커다란 눈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제5대 달라이라마 롭상 갸초, 그의 낯빛은 온통 황금색이었다. 자신의 죽음마저도 13년 동안 비밀에 부친 끝에 지금의 이 포탈라를 완성해서였을까, 존상의 규모나 얼굴의 형상은 다른 달라이라마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의 눈은 유난히 컸고 다른 존상에 비해 규모도 비할 바가 아니다. 그의 영탑 또한 다른 영탑과 비교해 보면 배 이상은 커 보였다.

순금으로 장엄한 롭상 갸초의 영탑은 높이는 12.6m에 넓이만도 7.65m에 달한다. 그 무게는 무려 3218g으로 규모가 놀랍고 신이할 뿐이다. 포탈라를 다녀간 수많은 이방인들은 수백, 수천g의 금이 들어간 달라이라마의 영탑 앞에서 “티베트 불교가 결국은 민초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다”며 혀를 차곤 한다. 충분히 그런 의심이 들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은 티베트 불자들의 보시와 윤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정교(政敎) 합일의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제도가 시행된 이후 성숙하지 않은 어린 달라이라마를 이용해 민심을 어지럽히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했던 섭정과 정치승들이 역사 속에 분명 존재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포탈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것들은 티베트 민초들의 정성스런 인연에 의해 이곳에 봉안되었다. 조상들의 정성스런 발원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대대손손 1000여년 동안 자신들의 서방정토인 포탈라를 완성하는 일에 지심(至心)으로 마음을 냈다.   

1000개의 방사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포탈라를 순례하는 것은 윤회하는 육도(六道)의 세계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달라이라마가 상주하는 곳은 천상일 것이며 궁전의 초입은 고통이 상주하는 중생계일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윤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일체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배운다.

나 이외의 생명들과 나의 인연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들 모두는 그 어느 생엔가는 부모와 형제 혹은 형과 아우, 한 동네의 이웃사촌으로 만났으며 또 다른 어느 생엔가는 비록 인간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자연을 이루고 있는 뭇 생명 중 하나였을 터이다. 야크의 똥구덩이에서 헤매는 작은 곤충을 맨손으로 건져내고 사람을 괴롭히는 모기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것은 윤회에 대한 확신이 티베트인들의 인식에, 생활 속에 항상(恒常)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화신은 열반의 다양한 경지를 성취했거나 부처님이나 보살, 아라한에 오른 존자들이다. 화신은 오로지 중생들이 열반을 향하여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이 땅에 다시 그 모습을 나툰다. 즉 중생들을 향한 끝없는 자비의 발로 혹은 강한 연민의 에너지에 의해 중생계로 돌아온다.

달라이라마 역시 이곳 포탈라에서 윤회의 법칙에 따른 환생과 생멸의 원리를 깨닫기 위한 명상과 수행에 열중했다. 이제 갓 10대에 접어든 달라이라마는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수행을 통해 환생과 윤회에 대한 믿음이 불퇴전에 이를 만큼 강해졌다. 그는 어렸을 때 배웠던 부처의 환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처도 여러 다른 생명에 깃들어, 그것도 동시에 환생할 수 있다. 이는 달이 한 순간에 여러 곳을 두루 비추는 이치와 같다. 뭇 생명으로 환생할 부처는 그들 스스로 환생할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으며 환생 후에도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전생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역대 여러 달라이라마의 영탑과 존상들이 봉안돼 있는 법당은 여전히 금과 화려한 보석, 순례자들이 보시한 정성스런 성보들로 가득하다. 금빛과 보석들은 여느 때처럼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마음 한편에선 서글픈 기운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서글픔의 바탕에는 분명 포탈라의 주인인 달라이라마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수 없이 많은 티베트의 영혼들을 대신해 달라이라마께 여쭈었다.

“1300여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을 순례하면서 티베트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보시해 완성한 포탈라가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라싸의 다른 곳에 비해 일찍 햇볕이 비껴가는 포탈라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를 보다 보니 이제는 영영 붉은 궁전에서 오색 꽃비를 내리는 달라이라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 포탈라를 빠져나오는 내리막길에선 이런 불경스런 마음을 경책하듯 한 티베트인이 돌 판에 새긴 경전을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표정으로 염송하고 있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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