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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9.노블링카서 만난 달라이라마

기자명 법보신문

청년 달라이라마, 벽화에 남아 라싸를 지키다

 
달라이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의 작은 연지에 있는 정자, 공간미와 조형미가 완벽할 정도로 아름답다. 달라이라마는 노블링카를 생애 가장 행복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는 티베트 사람이지만 티베트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네팔에서 태어난 망명 2세입니다. 80년대 중반이던가요, 아버님은 어머니와 형, 누나, 사촌들과 함께 라싸를 탈출해 네팔에 정착했습니다. 히말라야의 험준한 길을 따라 네팔로 향하던 중 아버님은 몇 명의 가족을 히말라야의 설산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요.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은 가족들을 눈 속에 묻어 두고 온 것이지요. 네팔이나 인도에 정착한 티베트인들은 장사를 아주 잘 했습니다. 아버님 역시 세계 각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판매하셨는데 장사가 잘 되어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어렸을 적,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우리 집 보다 못 사는 네팔 사람들도 집을 척척 사는데 ‘왜 우리 집만 허름한 집에서 세를 얻어 살아야 하는가’ 였어요.

우리 집엔 왜 땅이 하나도 없는가 답답했지요. 울상을 짓는 저에게 아버님은 늘 ‘달라이라마 성하께서 라싸로 돌아가시면 우리도 바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언제든 이곳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단다’라고 타이르시더군요.”

20대 달라이라마 초상화 궁전에 남아

나라를 잃은 티베트인들의 고통이 어디 그뿐이랴. 세계 곳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티베트인들의 아픔들 중 하나이리라. 라싸에 딱 한번 다녀왔다는, 이제는 어엿한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성장한 망명 티베트인 2세는 “그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그것은  고단한 망명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비타민이라고 설명했다.

2004년 겨울, 다람살라에서 만난 이 티베트인 청년은 “라싸를 탈출한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티베트 망명정부에 자신과 가족들을 빠짐없이 등록하는 일”이라며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에는 여느 티베트인처럼 한 생(生)을 촌각쯤으로 여기는 여유로움이 배어 있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이지만 자신들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달라이라마의 보살핌 아래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동포들이 있기에 절망이 아닌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 청년은 다람살라의 차가운 겨울바람에 세차게 휘날리는 오색 룽다(경전을 쓴 천)를 가리켰다. 룽다가 멈추지 않고 펄럭이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표정이었다. 다람살라의 룽다가 그러했듯이 오색 룽다가 다시 춤을 추고 있다. 다람살라에서 보았던 그 룽다가 라싸의 노블링카 입구에서도 쉼 없이 경전을 염송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펄럭이는 룽다, 티베트인들에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에게 룽다는 만물의 상징이며 우주이며 영혼의 본체(佛性)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일의 보배로운 도구가 바로 ‘룽다’이다. 룽다가 노래를 한다.

백(白)색의 룽다가 허공을 만듭니다
황(黃)색의 룽다는 생명의 대지입니다
녹(綠)색은 감로수가 흐르는 강입니다
청(靑)색의 룽다는 푸른 하늘입니다
적(赤)색은 달라이라마 성하입니다
오색의 룽다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티베트인들의 기도도 ‘쉼’이 없습니다

룽다가 맞이하는 달라이라마의 여름 궁전 노블링카, 그곳의 첫 느낌은 겨울 궁전인 포탈라궁과는 확연히 달랐다. 노블링카가 ‘밝음’(明)이라면 포탈라는 ‘어두움’(暗)이라고나 할까. 소박하게 정비돼 있는 정원과 작은 연지 그리고, 달라이라마가 주석했던 여름 궁전…, 천천히 소년 달라이라마가 걸었을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정원을 가로 지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원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돌, 이름 모를 풀에서도 달라이라마의 발자취가 느껴진다.

노블링카는 1755년 7대 달라이라마가 조성하기 시작해 8대 달라이라마와 13대 달라이라마, 14대 달라이라마에 의해 증축되고 정비되었다. 달라이라마는 음습한 포탈라보다 생기 넘치는 노블링카를 훨씬 더 좋아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했던 소년기의 달라이라마는 어두운 법당에 역대 달라이라마와 고승들의 불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포탈라를 ‘감옥’에 비유한 반면 노블링카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추억들이 깃든 궁전으로 회고하고 있다. 더 없이 즐거웠던 기억들이 남아있는 노블링카에서 소년 달라이라마는 동포들과 티베트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59년 3월 18일 밤, 달라이라마는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중공군을 피해 극적으로 노블링카를 탈출했다. 당시의 긴박함과 절박함은 그의 뇌리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에게는 군복과 모피 모자가 제공되었고 밤 9시 반경 나는 승복을 벗고 그것을 입었다. 중공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것을 입어야만 했다. 군복을 입은 채로 나는 마지막 기도를 위해 평소 기도하던 방사로 향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기 있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던 구절에 이를 때까지 경전을 읽었다.
                                                                           『달라이라마의 회고록』 중에서

달라이라마와 노블링카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노블링카의 담벼락에 드리운 어둠에 의지해 그곳을 탈출하던 순간, 달라이라마는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일체의 감정을 잃어 버렸다. 노블링카의 기도방에서 나올 때 복도를 울리는 걸음소리는 물론 적막함 속에서 재깍거리는 시계소리까지도 들을 만큼 그는 극도의 긴장에 휩싸여 있었고 탈출을 향한 절박함은 침을 마르게 하고 가슴을 태웠다. 달라이라마로 거듭나기 위해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집중 수련을 받았음에도 탈출 순간 그는 견딜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수십만 동포들의 생사가 그의 탈출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와 티베트를 지키려 온몸으로 중공군의 박격포와 총칼에 맞서려 했던 수십만 동포들의 생명들은 달라이라마에게 탈출 이외에 다른 선택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법복을 벗고 군복을 입은 채 가장 행복한 순간들만 기억하고 있는 노블링카를 속절없이 떠나게 했다. 노블링카는 달라이라마가 떠난 직후 중공군이 쏜 포탄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했으나 그 옛날의 우아함만은 완벽하게 복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中, 벽 훼손할 수 없어 제거 못해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전부였기에 그가 노블링카를 떠나던 날의 슬픔은 600만 티베트인들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자, 절망이었다. 노블링카에는 티베트 민족의 역사적인 고통을 말해주는 유물(?) 하나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유물은 다름 아닌 둥근 원형의 평범한 시계다. 달라이라마의 집무실이 있는 궁전 입구의 벽에 걸려있는 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9시를 가리키고 있다. 구식 아날로그 시계인지라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 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탈출하기 위해 노블링카를 떠난 시간인 1959년 3월 18일 밤 9시를 가리키며 멈추어 서 있다.

중국의 일관된 달라이라마 말살 정책을 생각한다면, 매우 이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싸에서 제14대 달라이라마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린 중국이 굳이 이 시계를 노블링카의 궁전에 남겨 둔 까닭은 무얼까. 아마도 중국은 이 시계를 통해 티베트의 마지막을 널리 홍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화인(中華人) 가이드들의 이 시계에 대한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겠으나 그들은 노블링카에 온 각 나라의 관광객들에게, 티베트인 순례자들에게까지도 달라이라마의 시간(역사)이 멈추었음을 선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얄팍한 욕심일뿐이다. 중국은 티베트인들에게 절망을 말하고 싶어 겠지만 이 시계를 보고 절망을 느끼는 티베트인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시계 앞에 선 어느 티베트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옴마니 반메훔’ 진언을 올렸다. 진언을 올리는 그의 표정에서는 시계가 다시 움직이리라는 서원이 담겨 있는 듯 지극함이 묻어난다.

궁전 2층 법당에서 내려다 본 노블링카의 정원은 달라이라마가 말했듯이 작지만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푸른 하늘 아래 비친 작은 연지 위의 정자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완벽한 공간미와 조형미를 자랑했다. 달라이라마는 겨울 동안 포탈라에 주석하다가 겨울이 끝나는 3월 초, 그러니까 대지에 뿌리를 둔 생명들의 새순들이 막 돋아 오를 때부터 9월 초까지 노블링카에 머물며 수행을 하고 티베트 불자들을 맞이하면서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티베트 정부의 행정을 관장했다.

노블링카의 궁전에는 달라이라마의 집무실과 기도방, 티베트 역사관, 침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 궁전에서 특히 흥미로운 곳은 티베트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방사로, 티베트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표현한 300여개의 벽화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역시 달라이라마의 초상화였다. 50년 전의 14대 청년 달라이라마, 얼른 보기에도 어렸을 적 그의 얼굴이 분명했다.

라싸에서, 그것도 달라이라마의 여름 궁전에서 청년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14대 달라이라마의 자취가 사라졌을 거라 여겼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중국이 분열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달라이라마의 초상화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방치(?)한 까닭은 초상화가 벽에 직접 그린 벽화였기 때문이다. 벽에 그린 초상화를 없애면 티베트 역사 전체의 그림이 훼손되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블링카의 궁전 안에 있는 청년 달라이라마의 초상화. 라싸에 남아있는 유일한 14대 달라이라마의 얼굴이다.

초상화가 있는 방사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붉은 경계선으로 막아 놓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달라이라마의 초상화가 있는 방사는 다른 곳과는 달리 중국 관리인들의 경계가 느슨했다.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날선 중국 공안들은 온데간데없었고 티베트인 스님만 있었다.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불퇴전의 굳은 각오로 초상화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회만을 엿보았다. 3분가량 서 있었을까, 그 모습이 정성스럽고 지극하게 보였던지 티베트인 스님이 빙그레 웃으시더니 이내 자비를 베풀었다.

방사 안으로 들어가 관람하라며 손짓을 했다. 웃음을 지으며 얼른 들어가 초상화를 살피고 있자니, 티베트인 스님이 애써(?) 다른 관광객들을 핑계삼아 눈을 돌렸다. 기회였다. 이 때다 싶어 마구 사진을 찍었다. 티베트인 스님 덕분에 거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스님은 겉으로야 중국에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달라이라마의 귀향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성공을 자축하는 기쁨도 잠시, 서슬 퍼런 중국 공안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공안들을 피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스레 그곳을 빠져 나왔다. 티베트인 스님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방사를 향해 “라싸가 온전히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의 품으로 돌아 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히말라야의 팔만사천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며 합장 반배의 예를 올렸다.

라싸의 유일한 ‘14대 달라이라마’

기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궁전 밖 라싸의 하늘은 금세 회색빛 구름 이불을 걷어내고 파란 미소를 드러냈다. 중국이 강탈해간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달라이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 디지털 카메라를 켰다. 화면에 나타난 청년 달라이라마의 얼굴엔 티베트의 왕성한 기운과 함께 힘찬 기상이 뻗어 나오듯 푸른빛이 돌았다. 청년 달라이라마는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박차고 나와 법비(法雨)를 내리며 외로운 순례자들의 목에 카타(하얀 천)를 걸어줄 듯 표정이 밝았다. 파란 룽다 옆에서 달라이라마를 상징하는 적색 룽다가 라싸 하늘을 향한다. 티베트에서 룽다는 멈추지 않는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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