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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10.자연의 도반, 자연에 귀의한 사람들

기자명 법보신문

그들에게 바람-돌-나무는 ‘부처’

 
라싸의 티베트 사람들에게 고봉의 초입에 있는 바위는 삼존불을 모실 수 있는 도량이다. 정성을 다해 조성한 삼존불이 장엄하면서도 이웃집의 어르신처럼 서민적이다.
티베트를 어머니라고 일컫는 것은 그곳이 생명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북쪽엔 7000m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와 쿤룬산맥이, 남쪽엔 4000m 전후의 광활한 들녘을 간직한 창베이고원이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를 이루고 있다. 그 고원들엔 초자연적인 힘과 지수화풍(地水火風) 인연의 기운이 응집돼 생성된 지구의 빙하가 오랜 시간 침식하고 퇴적하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낸 함수호들이 1만 5000여개나 존재한다.

바다의 짠 기운을 머금은 티베트의 호수들은 아시아 주요 강(江)들의, 이를테면 인더스강을 비롯한 얄루창포강, 진사강, 메콩강의 원류이며 아시아인 85%가 티베트에서 흘러 내려온 생명(水)을 마시며 살아간다. 티베트를 아시아의 어머니로 받드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순례, 영성 맑게 하는 최상의 도구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라는 믿음으로 순례에 나서서일까, 라싸는 첫 순례인데도 늘 편안했다. 중국의 힘과 경제력에 의해 급격하게 변해가는 라싸의 모습이 자꾸만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나 라싸의 자연과 티베트인들의 일상은 낯설지 않고 친근했다. 고산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도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봄날의 따스한 볕에 눈이 녹아내리듯 이내 사라졌다. 그 어느 생엔가 한 번쯤은 다녀갔을 법한 익숙한 느낌들은 포탈라에서는 물론 라싸의 성지를 순례하는 내내 자주 들곤 했다. 그 인연의 시간이 몇십년 혹은 몇백년이 흘렀는가를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득한 저편의 기억들이 그리 생경하지만은 않았으며 제법 자연스러웠다.

달라이라마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 남아있는 여름궁전 노블링카에서도 그런 느낌들은 반복됐다. 달라이라마가 머문 궁전에서도, 정원과 연지에서도 그러했다. 정원에서 마주친 가난한 티베트인 순례자들의 밝은 미소에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으며 무작정 그들을 따라 걸으니 나 역시 티베트인 순례자가 된 듯 몸과 마음이 가난해졌다.

살아 있음’, 그것에 대한 감사함은 라싸를 둘러싼 고봉들처럼 꼿꼿해졌고 이웃을 향한 보리심(菩提心) 역시 더없이 지극해지는 듯 했다. 티베트의 순례자들이 오체투지를 하면서 수미산을 향해, 포탈라를 향해 순례를 하는 까닭이다.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노블링카의 자연이, 궁전의 정원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바람과 돌과 들풀들이 위대한 스승으로서 법을 설한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며
위대한 스승입니다
바람과 돌과 물과 들풀은
말없이 법비(法雨)를 내립니다

우리의 얄팍한 알음알이는
늘 자연의 가르침을 방해합니다
아무 말이 없는 정적(靜寂)의 흐름
자연의 지혜는 침묵입니다

자연은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말이나 행동이 아닌
그들만의 질서로서 깨침을 설합니다

이름 모를 들녘의 풀과 야생화는
바람과 따뜻한 온도, 물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지혜입니다

노블링카의 정원을 질서정연하게 구분해 주는 정갈한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달라이라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본 그 담벼락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를 위기의 순간, 달라이라마는 이 담벼락의 어둠에 몸을 의지한 채 아주 천천히 노블링카를 빠져 나왔다. 중공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군복으로 갈아입고 달라이라마가 기대었을 담벼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아 보았다. 달라이라마가 온몸으로 느꼈을 고통과 슬픔, 답답한 티베트의 현실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밀려오면서 가슴을 옥죄었다. 수백만 동포들의 생명(生)을 살리기 위한 가슴 아픈 선택, 그것은 약관의 청년 달라이라마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오색 룽다는 24시간 라싸의 바람에 흔들린다. 티베트인들은 경전을 적은 룽다가 바람에 나부끼면 그 소리가 수미산까지 전해진다고 믿는다.

탈출 경로를 따라 출입구로 향하다가 노블링카의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세상에서 가장 순박해 보이는 티베트인 일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보기에도 라싸 사람들보다 훨씬 가난해 보이는 이 가족 순례단은 궁전 앞의 공원에 앉아 한가로이 보리빵과 짬빠(보릿가루)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가난해 보였지만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따시뗄레’(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서 미소를 지으니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나의 카메라와 옷차림에 호기심을 보였다. 라싸와 티베트 전역에서 일어난 티베트인들의 유혈 봉기 사태(2008년 3월)로 인한 긴장이 채 가시지도 않은 라싸에서 이방인을 웃으면서 맞이한 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말을 한 마디 건넸기 때문이리라, 그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리라. 10세가량의 아들, 딸과 등에 업은 아기에다가 부부로 구성된 가족 순례단은 모두 다섯 명으로, “노블링카에 왜 왔느냐”고 물으니 그냥 웃기만 했다.

노블링카에 계신 벽화 속의 달라이라마를 친견했느냐”고 말했더니 그래도 웃기만 했다.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순례하는 것이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이번엔 티베트인 아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이라마에 관한 직접적인 답변은 애써 피했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며 긍정적으로 답하는 그들, 가족 순례단을 이끌고 있는 이들 부부는 행복의 참 의미를 아는 듯 했다. 비록 달라이라마를 친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달라이라마의 행복이 배어있는 노블링카를 참배하고 왔으니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밝고 푸른빛의 희망이 감돌았다. 밝은 표정에선 행복이란 순간순간 자족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란 그들만의 행복론이 읽혀진다.

일체의 존재들을 불보살로 받들어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과는 기준이 다르다. 적어도 우리의 사고만으로는 지금 행복해 하는 티베트인 부부에게서 수없이 많은 불행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 민족의 전부인 달라이라마께선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해 이곳 라싸에는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중국의 식민적 침탈로 조국과 자유를 잃지 않았는가, 뿐만 아니라 충분히 먹지도 못하고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약간의 짬빠와 버터 티 밖에 없을 만큼 가난해 불행하지 않은가.

그러한 불행의 요인들은 작은 불만족에도 기어이 욕심을 일으켜 그것을 채워야 행복하다고 믿는 우리들의 마음에만 존재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규정하는 외부적인 조건들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의 힘이 있다. 행복은 결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각자의 몫이며 끊임없이 외부적인 조건과 비교하면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다.

라싸 순례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마니차를 들고 성지 순례에 나선 티베트인들이며 다른 하나는 불보살님으로 화현한 라싸의 자연이다. 라싸의 티베트인들은 큰 바위덩이가 있으면 부처님과 보살님을 바위에 새겨 그곳을 부처님이 상주하는 불국토로 장엄했다. 바위에 나투신 불보살님들의 모습은 그 규모가 커 장엄하면서도 얼굴에는 소탈함이 깃들어 있어 서민적이기도 하다. 바위에 그린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주위에는 늘 카타(하얀 천)를 공양 올리고 주위에 있는 나무에는 경전을 적은 룽다를 걸어 24시간 염불 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한다.

티베트인들은 오색의 룽다가 바람에 나부끼면 경전을 읽는 것으로 여기며 그 독경소리는 바람에 의해 수미산까지 전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강변의 바람 부는 언덕이 있으면 그곳에 룽다를 걸고 글을 쓸 수 있는 돌판이 있으면 진언을 적어 진언탑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산 중턱의 작은 바위에도 작은 마애불을 조각해 부처님이 머무르도록 장엄한다. 티베트인들이 자연에 귀의하면서 자연을 부처님으로 바꾸어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일체의 생명은 물론 자연을 이루고 있는 일체의 존재들(頭頭物物)을 불보살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정성스레 조성해 놓은 삼존불님께 티베트 사람들처럼 카타를 걸어 드리고 기도를 올렸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청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이 왜 일상적으로 기도를 하고 순례를 하는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들이 가족 단위로 순례에 나서고 마을 사람 전체가 산(山)을 부처님 세상으로 조성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순간 만큼은 악업을 짓지 않아서이다. ‘옴마니 반메훔’을 염송하면서 순례하는 순간은, 자연을 불보살님으로 장엄하는 순간은 보리심과 이타심(利他心) 만이 가득하다.
영원한 자연의 도반임을 발원하는 어느 순례자의 지극한 정성이 담긴 노래가 마음을 맑게 한다.

나는 항상 방랑의 길에 있었다.
순례자였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흘러갔다.

나는 방랑의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몇 천 번을 쓰러지고
그때 마다 다시 일어났다.
아,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성스럽고 멀리 높은
하늘에 걸려 있었던
사랑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을 안 지금은
목적을 알지 못하던 동안에는
마음 편히 걸어갔고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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