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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11.소쉬르-이도흠 한양대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 영향 관계 중심의 사유 새 지평 열어

언어 너머에 있는 무의식 구조 통찰
당대 최고의 산스크리스트어 전문가
“언어는 사회적 규칙의 총체” 가르쳐

서양은 그리스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실체 중심의 사유를 해 왔다. 반면에 동양은 실체 너머의 허공과 그 사이에 있는 사물들의 관계에 대해 사유한다. 닭이 마당에서 노는 사진을 보여주고 그를 그림으로 재현하라고 하면 서양 사람들은 십중팔구 네모로 마당을 표시한 안에 닭만 그린다. 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닭과 함께 풀과 돌, 개나 오리 등을 그린다. 서양인을 처음 만나면, 그들은 당신은 누구냐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스승이나 아버지, 형제가 누구냐고 묻는다. 양의사들은 맹장염이 걸렸다고 하면 바로 맹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퇴화된 장기를 제거했으니 몸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한의사들은 맹장과 뱃속의 다른 장기와 균형을 고려하여 약처방을 하며, 맹장이 아무리 퇴화된 장기라 하더라도 그것을 제거할 경우 기(氣)의 흐름과 몸속의 조화가 깨질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기에 명의는 혈(穴)을 놓칠지언정 경(經)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양, 이데아 향한 고단한 날개짓

실체 중심을 하는 서양은 사물의 실체와 이데아를 규명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바쳤다. 스피노자와 같은 비주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양 철학은 “이데아를 향한 고단한 날개 짓”이었다. 이것에 반하여 관계와 구조의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펼친 이, 서양 인문학의 혁명을 이룬 이가 소쉬르다.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낱말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 낱말을 다른 모든 낱말과 구별시켜 주는 음성적 차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차이가 의미작용을 수반하기 때문이다.…언어에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한국어에서 ‘불, 뿔, 풀’은 별개의 의미를 가진 낱말이다. 한국인이 ‘ㅂ/ㅃ/ㅍ’의 음성적 차이, 곧 변별 자질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ㅂ/ㅃ/ㅍ]의 음성적 차이가 다른 의미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음성적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여 세 낱말이 모두 [pul]로 들리는 서양인 대다수에게 ‘불, 뿔, 풀’은 같은 낱말이다. 이렇듯 낱말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낱말과 저 낱말을 구별시켜 주는 음성적 차이다.

서양 사람들은 ‘나무’가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가 탄소동화작용을 하기에 나무인 것이고, 나무는 그 스스로 실체, 본질, 이데아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무’는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실체도 갖지 못한다. 나무는 ‘풀’과의 언어체계가 빚어낸 관계망 속에서 그것과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또 ‘나무’의 개념이나 소리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은 채 이 낱말의 옆에 ‘쇠’를 가져다 놓으면, ‘나무’의 의미는 ‘식물성, 목질성, 자연’ 등의 의미를 갖는다. 반대로 ‘쇠’는 ‘광물성, 금속성, 문명’ 등의 의미를 형성한다. 이처럼, 하나의 기호가 함유하고 있는 개념이나 음성적 자질이 아니라 그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 의하여 의미를 형성한다. 언어는 언어 체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개념도 소리도 갖지 않으며, 이 체계로부터 비롯된 개념적 차이와 음성적 차이를 가질 뿐이다.

‘연기에 의해 사물 구성’ 자각

소쉬르가 이런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된 것은 불교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고 인도의 신지법(theosophie)에도 조예가 깊었다. 『소쉬르의 하버드 필사본』에서 불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보면, “자아의 해소는 자아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 같다. 수레의 차륜들, 또는 채처럼 우발적인 사물들의 컬렉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불교도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존재와 실체를 확신한 서양인에게 자성(自性)이 없이 연기(緣起)에 의해 사물이 구성될 뿐이라는 자각은 분명 충격이었다.

이처럼 불교든 소쉬르든 존재와 언어를 서로 차이와 관계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소쉬르가 언어 사이의 자의적(恣意的)인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면, 불교는 언어와 존재가 서로 연기에 의한 것이기에 공(空)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어는 표현수단, 전달수단, 소통수단이자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이다. 소쉬르는 사상과 의미가 언어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주지하듯, 그는 기표와 기의가 상호작용을 하며 의미를 드러내는 체계를 정립하였다. 소쉬르는 “언어가 없다면 사상은 미지의 희미한 성운이다. 거기엔 미리 존재하는 개념이 없으며, 언어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상에 대한 언어의 독특한 역할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물질적인 음성수단을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소리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봉사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나무’라는 언어기호에서 ‘나무’라고 발음하면 우리는 그 소리를 귀로 듣는다. 언어기호에서 청각적 영상의 면을 기표(signifiant)라 한다. 이 소리가 귀를 지나 뇌세포를 때리면 우리는 정보를 종합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뜻을 떠올린다. 언어기호에서 의미의 면을 기의(signifie)라 한다. 양자가 역동적으로 의미작용을 일으키며 사상이나 진리를 드러낸다.

이때 사상이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음성적 차이다. 언어체계는 일련의 음성적 차이와 개념적 차이가 결합한 것이므로 음성적 차이의 구분에 의해 개념적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가 포착하는 것은 미리 주어진 개념이 아니라 체계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이다. 소쉬르는 개념체계와 소리 체계가 결합한 것이 기호임을 통찰하고 언어를 음성과 사상의 연결고리로 보며 이것이 언어의 독특한 역할이라고 규정한다. 

소쉬르와 불교는 차이와 관계가 의미를 형성하고, 이것이 사상과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는 것에는 일치한다. 하지만, 소쉬르가 음성과 사상의 연결고리로서 언어를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면, 불교는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를 통해서 드러낼 수 없음을 갈파하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한다.

우리의 말,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에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법칙과 구조, 문법 등이 내재한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가 의식의 표면으로 넘나들며 언어활동을 관장한다. 소쉬르는 언어와 발화, 랑그와 빠롤이라는 말을 써서 언어와 이에 내재하는 무의식적 구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언어는 발화 실행을 통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는 화자들 속에 저장된 보물이며, 각 뇌리 속에,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개인의 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체계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 어느 개인 화자에게는 완전할 수가 없고, 집단 내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언어는 인간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행한 언어활동의 사회적 부분이다. 이것은 개인의 외부에서 맥락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개인 혼자서 이에 변화를 줄 수도, 새로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어는 공동체 성원들 사이에서 맺어진 일종의 계약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언어활동에도 같은 언어공동체에 의해 채택된 필요한 관습들의 총체로 개인이 언어활동을 할 때 수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규칙의 체계인 랑그(langue)가 있다. 반면에 개인이 능동적으로 이 규칙 안에서 기호를 결합하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빠롤(parole)이다. 개인적인 언술인 빠롤 저 너머에 이를 규정하는 규칙 체계인 랑그가 있는 것이다.

소쉬르에게 일반 법칙이자 공시적 언어체계로 본질적인 랑그가 언어학의 대상이지 부수적이고 다소 우연적이며 개인적인 빠롤은 그 대상이 아니다. 이처럼 소쉬르는 언어, 개인의 언술 너머에 이를 규정하는 것이 있으며 이것은 개인이 변화를 주거나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사회적인 규칙 체계의 총체라고 보았다.

불교에서 보면, 인간 존재는 오온(五蘊)에 얽매이고 이에 따라 만든 언어로 대상을 분별하기에 궁극적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언어 너머에 이를 관장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니 진여 실체에 이르려면 의식작용의 본체[心王]가 객관의 대상[萬有]을 인식하는 정신작용[心所]을 오온에서 벗어나 적멸의 경지로 이끌어야 한다.  

소쉬르 사상 구조주의로 발전

소쉬르와 불교 모두 언어의 저 심층에 이를 규정하는 무의식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데 공통적인 통찰을 하였다. 이를 소쉬르가 사회적인 규칙의 총체로 보았다면, 불교는 언어 너머에 일심(一心)이 있고 일심이 불변(不變)이고 언어는 이에 의해 빚어진 수연(隨緣)으로 파악하였다. 불교는, 무명을 제거하고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듯, 인간이 대상과 만나 이루어지는 판단과 인식, 언어를 모두 부정하고 마음의 본체로 돌아갈 것을 설파하였다.

소쉬르의 사상은 레비스트로스를 만나 구조주의 철학을 형성하고 이는 바르뜨, 알튀세, 뿔랑자 등의 철학으로 꽃을 피운다. 실체가 아니라 차이와 관계, 구조에 의해 의미가 드러난다는 통찰은 라깡의 정신분석학,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데리다의 해체 철학,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으로 계승된다. 포스트구조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서양의 새로운 사상은 소쉬르의 세례를 받았고 직, 간접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도흠 교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도흠 교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의상·만해연구원의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을 역임했으며, 현재 계간 『불교평론』의 편집위원, 실상사 화엄학림의 외래강사, 조계종 포교원 통일법요집 편찬 연구위원으로 경전과 의식문을 번역하고 있다.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10여 권의 저서와 「원효의 화쟁철학과 탈현대 철학의 비교연구」 등 1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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