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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9.친일승려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계 이완용으로 불린 원종 종정 이회광

 
왼쪽부터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꾀한 이회광, 황도불교 건설 찬양한 이종욱, 명고축출 당했던 강대련, 친일서적 ‘임전의 조선불교’ 발간 권상로.

역사가 단절되고 민족의 정통성마저 뿌리째 뽑혀버린 일제시대 삶의 모습은 친일과 항일, 그리고 침묵이었다. 불교계 역시 대부분이 침묵으로 굴종의 시기를 버텨낸 가운데 만해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맞섰던 항일인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일제에 빌붙어 친일행각을 일삼으며 개인의 영달을 도모했던 인물 또한 적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행각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과 동시에 시작됐다. 한일합방 이후 온 나라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있을 때 이회광을 비롯한 최취허, 이보담, 이회명, 김용태 등은 자진해서 친일에 나섰다. 이들 중 한일합방 초기 불교계의 대표적 친일 인물로 꼽히는 이가 바로 근현대 한국불교 최초 종단인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다.

이회광은 『동사열전』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대강백’으로 기록할 만큼 뛰어난 학승이었으나, 권승으로 전락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불교계 이완용’이라는 극단적 비난까지 받았다. 이회광은 화계사 홍월초·봉원사 이보담과 인연을 맺으면서 나락의 길로 들어섰다. 홍월초·이보담은 자신들이 조직한 불교연구회가 일본 정토종과의 관계 때문에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비난을 피하기 위해 1908년 6월 원종을 만들고,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해 이미지 탈색을 꾀했다.

이때 원종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를 고문으로 추대했고, 다케다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을 적극 추진했다. 이에 이회광은 다케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6일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이 연합하는 맹약을 체결했다. 나라가 강제로 합병된 후 불과 45일만에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병합된 셈이다.

최취허는 총독의 식민통치 찬탄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 종무대표자와 조인한 조약은 말 그대로 조동종 위주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특히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고문을 비롯해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해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고 일본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는 것은 물론,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에 따라 포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한 지역의 수사나 사원에 숙사(宿舍)를 정하고 일반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에 종사케 한다’는 조약 내용은 불교계의 공분을 샀고,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맺은 맹약은 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사찰령을 반포하면서 원종 설립을 인정하지 않아 허사가 됐으나, 이회광은 30본산 중 하나인 해인사의 제1세 주지로 인가 받았다. 그는 1917년 4월 일본에 가서 데라우치 총리에게 그림족자를 선물한데 이어, 1919년 11월 다시 한번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에 유학중이던 조선승려들과 정적 관계에 있던 강대련을 비롯한 조선승려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무산됐다. 그리고 1923년 해인사 대중들이 총독부에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해 마침내 해인사 주지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친일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역시 본산 주지직이 박탈된 곽법경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내각에 구명 로비를 하면서 ‘조선불교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경성에 조선불교총본산을 설립하는 한편 본산 법당 안에 석가여래와 명치일본왕, 그리고 고종을 한 자리에 안치해 정교일치로 일선융화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친일 내용의 건백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에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면서 음모는 끝이 났고, 결국 1933년 한강변 견성선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회광이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획책하던 시기에 자발적 친일행각으로 세상의 질타를 받은 또 다른 인물이 최취허다. 그는 1911년 일본 왕과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식민통치를 찬양한데 이어 조선불교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일선융화를 표방한 불교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데라우치 조선총독의 식민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고 찬탄해 불교계 안팎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초기 강요가 없는 상황에서 이어진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행각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어 불교계 친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일제의 친일파 양성책과 맞물려 수많은 대처승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훗날 비구·대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후 불교계 친일동향은 193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과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내세운 친일행각이 두드러졌고, 심지어 일본 천황의 황은에 보답하겠다는 인사들까지 나타났다.

 
국방자재로 헌납하기 위해 모은 사찰 범종.

또한 친일 승려들은 ‘탁발보국’이라는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 헌금 등을 헌납했으며 비행기 구입 기금을 자진납세하기도 했다. 또 1943년 학도병을 징집하자 “제 발로 걸어 나가 죽는 것이 조선 청년 승려들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이 시기부터는 3·1운동을 비롯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던 항일인물들의 친일행각도 나타났다. 당시 대표적 친일 인물이 한성임시정부에 불교대표로 참여했던 이종욱이다. 이종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친일행각을 펼쳤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19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올 때 종회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 환영하는 등 본격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 15일 남산에 세워진 신사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한데 이어, 31본사주지회의 의장 신분을 이용해 전국 사찰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공문을 하달하는 한편 8월 5일에는 개운사에서 직접 기원법회를 열었다.

이종욱은 친일승려 1호로 지목

그리고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이조의 압정 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합병 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면서 총독부의 황도불교(皇道佛敎) 건설을 찬양하고 나섰다. 이후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임시종회를 소집해 국방자재 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로 만든 불구를 거두어 일제 당국에 헌납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친일행위로 인해 해방 이후 종무총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1945년 9월 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1호’로 지목돼 승권정지 3년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친일인물이 바로 강대련이다. 그는 “일본 승려와 조선승려들이 조선 왕족 여자나 양반 딸과도 혼인할 수 있게 한다면 조선동화와 불교 감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 민족계열 학승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8회에 걸쳐 3700여 원이라는 거금을 일본 군부에 헌납하는 등 일제의 종교시책에 적극 협조했고, 데라우치의 추도식에도 참석했다. 강대련은 이런 이유로 조선불교유신회 회원들로부터 ‘명고축출(鳴鼓逐出: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인 북을 치고 다니며 잘못을 널리 알리는 것)’을 당했으나 끝내 참회의 빛을 보이지 않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일제시대 불교계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승이었던 권상로 역시 친일행적을 보였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시국인식 친일강연의 연사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역설했고, 1943년에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우리모두의 살길이며 전쟁의 승리는 종교와 모든 윤리도덕에 우선한다”는 내용이 담긴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라는 친일 일색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불교계는 이처럼 중일전쟁 시기에 근로보국으로 일제에 노동력을 제공했고, 탁발보국으로 군수품 구입에 필요한 돈을 헌납한데 이어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군용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1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제를 옹호했고, 1943년 학도병 징집을 시작하자 “역사적 사명”이라며 청년승려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같은 일제시대 불교계 친일인사들의 행각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신문·잡지 등에 보도된 자료와 승려들의 자서전 및 전기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친일 승려들의 진상을 파헤쳐 온 임혜봉 스님에 의해 드러났다. 혜봉 스님은 『친일불교론』을 통해 당시 승려들의 친일행각을 알렸고, 『친일승려 108인』에서는 승려 108명의 친일행적을 세세히 밝혔다.

한편 창씨개명을 한 승려 수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전체 승려 6600여 명 가운데 3359명에 달했다. 창씨개명은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꾼이들이 있는 반면, 형식상 절반만 일본식으로 바꾼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가운데 완전하게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대표적 인물은 명고축출 당했던 강대련으로, 그는 이하라 가오루(渭原螢)로 창씨개명했다. 당시 총본산건설사무소는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회의를 열어 무료상담소 설치 및 운영과 수속사무 대행을 결의한데 이어 실제로 시행하는 등 창씨개명에 앞장서기도 했다.

비행기 헌납에 창씨개명 앞장도

 
일본에 헌납한 전투기 ‘조선불교호’.

조선총독부가 1939년 11월 법을 개정해 1940년 2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창씨개명은 법이 시행되기도 전인 1940년 1월 이미 김경림, 유재환, 변설호, 박찬범, 송구해, 김한송 등의 승려들이 이름을 바꾸며 일제에 유착하는 등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조선불교조계종 초대종정 한암 스님(야마가와 쥬겡)을 비롯해 종무총장 이종욱(히로다 쇼이꾸), 교무부장 임석진(하야시 겐기찌), 서무부장 김법룡(가가와 호류), 재무부장 박원찬(아라이 엔산) 등이 창씨개명했다. 이어 당시 혜화전문학교 교수였던 권상로(안토 소로우),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 김경주(가네야마 게이쥬) 등 학자들도 창씨개명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당시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살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모두를 친일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해, 운허, 효당, 백성욱, 김법린 등은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만해는 오히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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