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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최초] 52. 포교당

기자명 법보신문

1910년 10월 창건 각황사가 도심포교당 효시

법회•강연 등 불법홍포…일요학교도 개설 
1912년 만해 주도 임제종 중앙포교당 개소
  

 
1927년 제주불교포교당에서 치러진 불교식 결혼식 사진으로, 이 사진은 현재 볼 수 있는 최초의 불교식 결혼 기념사진이다. 사진자료=한국불교 100년

조선시대 들어 숭유억불정책에 따른 핍박으로 저잣거리를 떠나 산중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불교는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수세적 입장을 바꿔 인구가 많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포교당을 세우며 적극적으로 불법 전파에 나섰다. 당시 조선불교를 이끄는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던 만해 역시 1913년 조선불교의 개혁을 강조하며 내놓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사찰이 산간에 있음으로 인하여 구세의 정신과 경쟁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도심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불법포교의 필요성에 공감한 본사급 사찰을 중심으로 도심에 말사 혹은 분원 형태의 포교당(포교소)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개항이후 이 땅에 상륙한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도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근현대 한국불교 역사 속에서 기록상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도심포교당은 범어사 동래포교당이다.

그러나 범어사 동래포교당의 개설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에 혼선이 있어서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현재 부산 동래구에 자리잡은 범어사 말사 법륜사가 1988년 세운 사적비에는 “불기 2452년 범어사에서 동래 복천동에 포교당을 개설해 법륜사라 칭하고 포교활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908년에 동래포교당이 개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근현대 한국불교사 연구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천착해온 김광식 교수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에 대한 첫 기록은 「조선불교월보」 제19호에 나타나는 조선선종동래포교당으로 1911년 9월 설립됐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동래포교당의 설립 시기와 관련해서는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동래포교당 1908년 설립 주장도 

여하튼 동래포교당은 동래읍면의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야외집회장이 되어 민심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면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관하는 등 종교적 기능은 물론 계몽적 기능까지 겸하면서 활동 폭을 넓혔다.

그리고 1921년에는 ‘싯달 야학교’를 열어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에게 배움의 길을 터 주기도 했다. 동래포교당의 개설 시기가 연구과제로 남겨진 상황에서 현재 한국불교 도심포교당의 효시로 공인된 포교당은 서울의 각황사(覺皇寺)다. 각황사는 1910년 5월 개설 장소와 명칭이 확정된 이후 불사를 통해 10월 27일 봉불식을 갖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따라서 각황사는 일제하 최초의 포교당이자 서울 4대문 안에 최초로 자리잡은 사찰이기도 하다. 각황사는 1909년 12월 동대문 밖 원흥사에 모인 전국승려대표 150여명이 원종의 설립 인가에 대비해 한성부 내에 불교총합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함으로서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각황사 터는 예전 동녕위궁 자리를 3천원에 매입했으며, 10월 초 건축을 마무리해 1910년 10월 26일과 27일 봉불식이 열렸다.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이름 붙인 각황사는 원종이 창종 인가를 받지 못하면서 온전하게 포교당의 기능으로 출발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법회, 강연, 불교행사를 개최하는 등 포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참선회, 열반절 행사, 초파일 행사 등을 열어 불교를 알리기도 했다.

또 일요학교를 개설하고 수계식을 봉행하는가 하면 불교연극 등 문화행사를 선보이며 포교 영역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1912년 4월 부처님오신날에는 초파일 행사를 주야로 성대하게 열어 관객이 천여 명에 달하는 등 포교당 출범 3년만에 수많은 신도들이 운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각황사 포교당의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서울 인근 승려들이 포교의 공익성을 깨닫고 매주 일요일 각황사를 시찰하는 등 불교계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각황사는 이처럼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점차 불교계 중심 사찰로 위상을 강화해 나가는 한편 포교분야 발전을 바탕으로 1913년 『미륵상생경』을 한문과 한글로 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포교사와 함께 통역 한 사람을 두도록 해, 높아진 위상을 실감하게 했다. 그러나 탄생 배경이 순수한 포교당의 역할에만 있지 않고, 원종 종무원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던 탓에 굴곡도 적지 않았다.

1912년에는 원종 종무원을 계승한 본산주지회의가 인수했고, 1923년에는 운영 주체가 재단법인 교무원으로 바뀌었다. 이어 교무원의 종무행정을 보는 사무실을 비롯해 몇몇 단체가 입주하기도 했고 1927년에는 중앙선원으로 전환되기도 했었다. 또한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교무원과 불교청년들의 공동운영 체제로 전환됐고, 1938년 10월에는 포교당의 성격보다 정치 및 행정이 중심이 되는 총본산 각황사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이어 1940년에는 태고사로 사명이 개명됐고, 1941년 태고사법이 인가돼 조선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조계종 교단행정의 중심사찰로 성격이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황사는 한국불교 도심포교당의 효시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고, 현재의 서울 종로 조계사로 명맥을 이어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하는 초석을 다진 주요 포교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각황사에 이어 서울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포교당 중 하나는 바로 임제종 포교당이다. 임제종 포교당은 원종 종정 이회광이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는 맹약을 맺자 이에 반발해 만해, 박한영, 오성월 등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임제종 운동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포교당, 1929년 나혜석 전시회 

 
1912년 5월 26일 개최된 임제종 중앙포교당 개교식 관련 「매일신보」보도 내용. 사진자료=한국불교100년

임제종은 1911년 송광사에서 출범해 범어사로 종무원을 옮긴 후 그 뜻을 널리 알리고 대중을 교화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해 광주, 대구 등 대도시에 포교소를 설립했다. 이런 이유로 1912년 5월 서울 사동(지금의 인사동)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을 개설하게 된 것이다. 서울 사동에 48간 짜리 가옥을 매입해 1912년 5월 26일 문을 연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개교식에는 21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했고, 이 가운데 800명이 당일 입교하는 등 위상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개교식에는 만해를 비롯한 개혁세력 스님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백용성이 포교의 책임자인 개교사장 자격으로 법을 설했고 학생들의 주악과 창가가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가 시비를 걸어 간판 철거 명령을 내림에 따라 문을 연지 한 달 만인 1912년 6월 26일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해와 백용성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전환해 3년여 동안 포교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무려 3000여명의 신자가 증가했고,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이 포교당을 통해 참선이라는 말이 알려지기도 했다. 일제시대 개설한 포교당 가운데 눈길을 끈 또 다른 곳은 수원포교당이다. 1912년 4월 8일 용주사 불교포교소로 시작한 수원포교당은 1920년 공식적으로 개산했다. 각황사, 강릉포교당과 더불어 전국 3대 포교당으로 불리는 수원포교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의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29년 9월 23~24일 연 ‘나혜석 구미(歐美) 사생화전람회’가 바로 그것. 당시 동아일보에서 개최하고 중외일보가 후원한 이 전시회는 한국 최초 여성화가의 전람회인데다, 장소가 수원포교당이라는 점 때문에 세간의 관심사로 등장했었다. 일제시대 불교포교당 개설은 그 효시가 되는 각황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고운사 안동포교당이 1910년 문을 열었고, 백용성은 1911년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를 세워 대중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통도사 울산포교당도 같은 시기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송광사 전주포교당이 1912년에 개설된 것을 비롯해 1913년까지 전국적으로 18개에 달하는 포교당이 들어섰다. 이어 1924년에 월정사 강릉포교당, 1928년에 화엄사 제주포교당, 1929년 봉은사 삼척포교당이 연이어 개설되기도 했다. 특히 제주불교포교당에서는 1927년 불교식 결혼식을 올린 사진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관심을 받기도 했다. 

야학•빈민구제로 포교 영역 확대 

 
금강산 유점사도 현재의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경성포교당을 개설해 포교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북녘의 금강산 유점사도 1929년 서울에 유점사 경성포교당을 개설해 법륜사라는 이름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유점사와 법륜사가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불이성법륜사로 불렸던 이곳은 현재 태고종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태고종 총무원이 입주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포교당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불교중앙포교소는 1923년 최초의 불교의료기관인 불교제중원을 준공해 내과•외과•조산과 등의 의료과목을 두었고, 공주불교포교당은 1926년 실달강습원을 설치해 학생 150명을 교육시켰다. 또 능인포교당은 1925년 능인유치원과 능인여자야학회를 설립해 운영했고, 경남 함양불교포교당도 1926년 함양유치원을 설립해 새싹포교에 나섰다.

이어 1928년에는 경남 진주포교당에서 극빈자 구호에 나서는 등 불교포교당은 불법홍포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포교에 힘썼다. 한편 현대식 불교포교당은 태고종 창종으로 비구•대처 갈등이 일단락되면서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개설되기 시작했다. 1972년 대원 장경호 거사가 남산에 대원정사를 건립해 포교에 나섰고, 1974년 대각사에서 창립법회를 가졌던 불광이 1982년 잠실에 불광사를 건립하며 포교에 박차를 가했다. 또 1974년에는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가, 1984년에는 능인선원이, 1985년에는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가 각각 문을 열어 현재까지 대표적인 도심 포교도량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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