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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14.근세 대한민국과 티베트의 인연

기자명 법보신문

中, 한국전쟁 혼란 틈타 티베트 침공하다

1950년 10월께 중공군 티베트 침공 당시
세계 이목-UN, 한국 지키는 데에만 집중
달라이라마 “그로 인해 우린 관심 밖” 탄식
“티베트 붕괴 막아 달라” 국제 사회에 호소

 
세라는 600년 동안 ‘달라이라마’ 전통을 전승해 온 겔룩파의 ‘사캬 예쉐’가 1419년 산문을 열었으며 티베트의 불교학과 수행을 주도해 왔던 중심 도량이다. 전성기 때 학인 수가 무려 7000여명에 달했으나 이제는 단 한명의 학인도 없어 쓸쓸해 보인다.

‘라싸엔 티베트 시간이 없다.’
무슨 뜻일까, 지구상에서 자신들의 지리적 위치에 맞는 시간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도 있단 말인가. 실제 라싸에는 세계인들과 약속한 티베트만의 시간이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라싸는 물론 티베트 전역은 중국 베이징의 시간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상으로 보면 티베트는 서울보다 2~3시간가량 시간이 늦어야 하나 라싸의 시각은 베이징처럼 서울보다 1시간 늦다. 강압적인 힘에 의하거나 근세에 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에 복속된 티베트 등 55개 민족에게는 하나의 중국만을 인정하는 중화(中華) 사상에 의해 그들 고유의 전통은 물론 시간마저도 빼앗겨 버렸다. 세계인들과의 약속마저 저버리면서 라싸의 시간을 멋대로 정해놓다 보니 라싸의 아침 해는 유난히 늦게 잠을 깬다.

기나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라싸의 무명을 쫓아내는 햇님은 오전 9시가 다 되어서야 느릿느릿 떠오른다. 하늘아래 가장 높은 곳이기에 햇빛의 에너지와 밝음은 그 어느 곳에서 맞이하는 햇빛보다 강해보이지만 라싸의 자연스런 시간과 어울리지 못해서인지 조금은 어색해 보인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여명(黎明)의 시간대가 오전 예닐곱 시(時)라는데 우리들의 삶이 익숙한 터라 게으른 태양이 낯설기도 하다. 시간마저 강탈해간 중국에 대한 반감이 작용해서일 게다.

라싸의 변두리에 위치한 세라(色拉寺, Sera)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혼돈스러운 라싸와 같았다. 중국의 삼독(三毒)이 너무나도 많이 유입돼 아파보였고 반드시 함께 호흡하고 있어야 할 도반들을 잃어서인지 외로워보였다.

세라는 600년 동안 ‘달라이라마’ 전통을 전승해 온 겔룩파의 ‘사캬 예쉐’가 1419년 산문을 연 이래 티베트의 불교학과 수행을 주도해 왔던 중심 도량이다. ‘사캬 예쉐’는 겔룩파를 창종한 총카파 대사의 제자로, 세라의 전성기 때 학인 수는 무려 7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세라사원 내에 있는 토론의 정원에선 300여명의 학인들이 손뼉을 치면서 대론(對論)을 하는 열기가 매일같이 이어졌었다. 학인들은 논리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대론’을 통해 5개의 큰 경전의 내용을 꿰뚫는다. 5개의 큰 경전은 아비달마를 비롯한 반야경, 율장, 중론, 인명학 등으로, 세라의 학인들은 15년간 이들 경전을 중점적으로 수학한다.

티베트의 독특하고도 체계적인 교육 전통은 티베트 학인들을 적어도 논리력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수행자로 키워내는 동력이 돼 왔다. 1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론을 실전과 같이 연습을 했으니 ‘논리 제일’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러나 이젠 세라에서 학인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역동적으로 손뼉을 치며 ‘내 논리에 대응해 보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다그치면서 눈을 부릅뜨던 학인들도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응원하는 티베트 불자와 순례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순례자들은 자신들의 영성과 불성을 보다 맑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학인들의 대론을 친견하면서 그들의 맑은 에너지를 몸과 마음에 충분히 담아 삼독을 정화하려 했을 것이다.

텅 빈 세라의 법당에는 강렬한 햇빛이 내리쳐 더욱 환하고 넓게 보인다. 법당에 나투어 계신 라싸의 불보살님들께 삼귀의를 염송하며 기도를 올린 뒤 불단 아래를 보니 낯익은 지폐와 동전이 눈에 들어온다. 퇴계 이황 선생의 초상이 선명한 1000원짜리 지폐와 500원짜리 동전이 세라의 법당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칭장열차의 길이 열리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순례자들도 이곳에 들러 티베트의 영성을 오감으로 체감한 징표이다. 이역만리 이곳에서 우리 돈을 보니 잠시 친근한 마음이 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근세에 들어 티베트와 대한민국, 대한민국과 티베트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떤 인연의 고리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고개를 내민다.

기실 옛 역사 속에서 두 나라의 불교는, 특히 티베트 불교는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의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개혁승이었던 ‘신돈’이 티베트 본토의 사원에서 밀교 수행을 수학하고 돌아왔다는 등 고승들의 순례기를 비롯해 두 나라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밀교적인 요소들도 그렇거니와 우리의 여느 사찰에서도 흔히 쓰는 오방색, 티베트 불상과 비슷해 보이는 우리의 불상, 수인의 형태 등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세라에서 본 우리 돈 1000원은 나에게 ‘아시아의 가장 큰 변혁기인 근세에 두 나라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옛 역사의 인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근세에 인연이 있기는 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중공군의 티베트 침공 당시 달라이라마가 유엔에 보낸 호소문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티베트와 같이 대승불교라는 이유로 유난히 한국 불교에 대해 관심이 많은 달라이라마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중공군이 티베트를 침공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중공군이 ‘평화 해방’이란 미명 아래 티베트의 국경을 넘은 시기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뒤인 1950년 10월의 일이다. 중국은 왜 한국전쟁 개전 직후 티베트를 침공했을까.

“세계의 이목은 유엔군에 의하여 침략이 저지되고 있는 한국에 집중되어 있다. 멀리 티베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사한 사건은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우리가 티베트 국경지역에서 최근에 발생한 일들을 귀하를 통하여 유엔에 보고하여야 하는 책임을 느끼는 것은,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도 침략은 저지되어야 하고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 회고록』 중에서

달라이라마가 무얼 말하고 싶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공군의 티베트 침략이 시작되자 달라이라마는 “약육강식에 의한 티베트 붕괴를,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급한 티베트 사태를 막아 달라”는 호소문을 유엔에 보낸다. 나라와 민족이 일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 달라이라마에겐 외부의 양심에 호소문을 보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중공군이란 거대한 폭풍 앞에서 600만 동포를 지켜야 할 어린 달라이라마가 가졌을 절박함이란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했던 이준 열사의 그것과 같았으리라.

티베트와 대한민국, 수 천 km가 넘는 거리만 놓고 본다면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지만 달라이라마가 말했듯이 두 나라는 아시아의 굴곡이 많은 근대사에서 중국을 사이에 두고 엇갈린 미래를 맞이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유엔군의 지원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그로 인해 분단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나라와 민족의 터전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민족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그들에겐 절망을 안겨준 대사건이었다.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영국이나 미국 등 세계열강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공군의 티베트 침공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약삭빠른 중공 공산당은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티베트를 완전한 자기의 것으로 복속시켜 나가는데 열을 올렸다.

특히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티베트의 국경을 넘었으며 그 후로 8년여 만인 1959년 3월 21일 라싸에 입성해 치안과 불법 여행자를 막는 수준에 불과했던 8500여명의 티베트 군대를 완전히 제압했다. 공산당 혁명을 완성하면서 더욱 강력해진 최신예 화기로 무장한 중공군에게 티베트 군대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그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달라이라마는 동포들을 향해 ‘함부로 중공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일렀다. 동포들의 참을 수 없는 의기와 울분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동포들이 귀한 목숨을 쉬이 잃을까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말씀대로 유엔이 티베트 사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면 티베트의 미래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 결과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란 우리 민족 간의 비극이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고향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상실하게 했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시절 인연 때문에 달라이라마는 한국과 북한, 중국의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대해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과 이념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1960, 70년대라면 자신의 한국 방문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한국 방문을 실현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세 나라의 정치적인 관계와 자신의 한국 방문을 이렇게 요약하곤 한다.

“내가 살아생전에 서울로 가는 길은 중국의 베이징을 거쳐 미스터 김(김정일 위원장)이 있는 북한의 평양 그리고, 판문점을 거쳐 가는 것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베이징과 평양, 서울을 잇는 길이 열린 것은 세 나라와 티베트, 중국 사이의 정세 변화가 완성됐음을 의미 하겠지요.”

세라의 외로움과 병고는 티베트 민족의 지금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단면이다. 그러나 외로운 세라에 순례자의 발길이 끊기는 일은 없다. 비록 예전에 비해 순례자들의 수가 크게 줄기는 했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불자 혹은 여행자들이 라싸 사람들의 손 때 묻은 법당의 문고리를 잡아보고 불단에 앉아 계신 불보살님께 귀의하면서 티베트인들의 온기와 영혼을 담아 간다.

순례자들이 말하는 ‘순례’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빛 그리고 순례 중 만난 일체의 인연들에 대한 한량없는 감사함을 일깨우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의 풍습과 영성, 선함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하다. 순례자는 순례를 하면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와 공(空)으로 말미암아 일체 만물이 이루어졌음을 여실히 알아차리게 되며 그런 과정을 거쳐 자신도 자연이 되어간다.

제 아무리 인간의 과학 기술과 산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는 선연(善緣)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러한 진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로 나타나 인간의 욕심을 경책하고 있다. 물질적인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 여기며 더 편안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그리고, 더 빨리 가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 결과 우리는 더욱 더 혹독한 자연 재앙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공업(共業)이다. 그러한 공업은 연기와 윤회, 정의의 법칙에 따라 우리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업’으로 인한 과보가 언제 실현될 것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지만 과보는 분명 우리들의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지금은 한줄기 희망의 빛도 없어 보일 만큼 절망적이지만 연기와 윤회, 정의의 법칙이 있는 한 티베트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으리라.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듯.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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