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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54. 유치원

기자명 법보신문

1923년 ‘비단으로 수놓은 하늘’ 금천〈錦天〉유치원 설립

강릉포교당 병설로 개원…아동 62명 입학
1926년 설립 마산 배달유치원과 함께 현존

 
최초 불교유치원인 금천유치원의 초창기 졸업기념사진.

근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어린이 포교는 정기적인 법회와 함께 유치원 운영으로 확대됐다. 1914년 한국 최초의 유치원이 설립된 이후 1920년대에 ‘교육구국주의’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유치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유치원 역시 이때 불교 포교와 교육구국주의를 염원하며 생겨났다.

1923년 7월 29일 개원한 강릉 금천유치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금천유치원은 현재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1926년 설립된 마산 배달유치원도 1940년 이름을 대자유치원으로 바꿔 현재까지 80년 넘은 전통을 잇고 있다.

‘비단으로 수놓은 하늘’이라는 뜻의 금천(錦天)유치원은 1923년 5월 1일 당시 강원도 3대 본산인 월정사, 금강산 유점사, 건봉사가 공동으로 강릉 금학동에 자리한 포교당에 병설 유치원을 설립하기로 결의함으로써 빛을 보게 됐다. 5월 1일 유치원설립 결의에 이어 관련 시설을 갖추고 서류를 구비해 드디어 7월 27일 정식인가를 받아 7월 29일 문을 열었다.

금천유치원이 개원할 당시 원장은 이대연 스님, 원감은 정보성 스님이었다. 그리고 김상일 씨를 교무주임으로 임명하고 조금순 씨를 보모로 채용했으며 입학 아동이 62명이었다. 불교유치원 최초의 교사이기도 한 보모 조금순씨는 당시 경성에서 초빙했고, 보모를 보조하는 조보모는 지역 불자의 자녀를 채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유치원인 금천유치원의 탄생 당시 상황이다.

포교 차원서 사찰이 재정지원

유치원 운영은 월정사 등 지역 사찰들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이같은 사실은 1927년 9월 월정사 본말사 주지들이 이곳에 모여 임시총회를 열고 여러 안건을 토의하는 가운데 유치원의 유지를 위해 각 말사에서 경비를 부담하기로 결의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치원 관련 기록에 따르면 교사와 아동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해 개원 다음해에는 교사가 3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에는 아동이 99명에 이르렀다. 지역 불교계의 지원을 받으며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금천유치원은 강릉포교당 법당 옆에 건물을 지어 원사로 사용했고, 6·25때 한차례 이전한 후 1989년 현재의 새 원사를 완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치원은 최초의 불교유치원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불심을 키워 자비로움을 실천하게 한다’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첫 입학 때 취학을 앞둔 아동을 갑(甲)조, 그보다 어린 아동들은 을(乙)조로 구분해 한 교실에서 가르쳤다.

금천유치원의 당시 교육활동도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지금과 다르게 3학기제로 운영됐으며 취학을 앞둔 갑조의 아동들은 유희, 창가, 수공, 조선문, 일본문을 배웠다. 유아교육 관련 학자들은 이때 조선문과 일본문을 교육한 배경을 부모들의 높아지는 향학열에 비해 진학의 문턱이 높았던 보통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금천유치원에 남아 있는 기록들은 일제시대 유치원의 상황은 물론 정치적으로 일제의 영향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유치원은 일반 학교에 비해 일제의 관여가 적었음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받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38년 졸업식 순서에 ‘황국신민서사’가 포함돼 있고, 1942년에는 ‘궁성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송’을 묶어 국민의례에 포함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해방 이후 첫 졸업식인 1946년 졸업식 때부터 사라졌다. 그리고 창씨개명이 어린이들에게도 강요됐다는 점은 1941년과 1942년 졸업생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강릉포교당 법당 옆에 지었던 유치원 원사 모습. 사진제공=강릉 관음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에서의 모든 교육은 우리말로 진행했고 불교적 교육철학도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는 기록이 남아 있는 1936년 졸업식순에 삼귀의례와 찬불가 순서가 있었던 데서 확인할 수 있고, 1942년부터는 사홍서원도 식순에 포함돼 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마다 법당에서 예불을 올리고 불교관련 동화, 어린이 찬불가, 훈화, 예화 등 지도방법에 있어서도 불교와 관련해서 언급한 내용들이 있다. 불교유치원의 설립목적 중 하나인 어린이 포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20년대 설립한 유치원 가운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또다른 곳은 대자유치원이다.

대자유치원은 1926년 배달유치원으로 출발했다. 배달유치원은 1912년 통도사 구하 스님이 창건한 마산중앙포교당 정법사에 1926년 4월 5일 설립됐다. 이곳은 설립 당시부터 보모가 4명, 아동이 123명에 달할 정도로 지역사회의 관심이 뜨거웠다. 1931년 6월 1일 정식인가를 받은 후 1933년에는 교사를 6명으로 증원했으며 아동이 130명에 달했다.

이곳은 사찰과 지역사회 유지들이 공동노력으로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관심이 남달랐다. 때문에 설립 당시에는 통도사와 마산지역 청년회 및 지역인사 등이 협력하면서 운영비도 함께 충당했었다. 그리고 1940년 3월 15일 지금의 대자유치원으로 명칭을 바꾼 후에는 통도사 등 불교계의 지원이 더욱 확대됐다.

배달은 1940년에 대자로 개명

유치원 교육은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 한민족의 얼을 살리고 더불어 포교를 하자’는 설립목적에 따라 금천유치원과 같이 모두 우리말로 시행했다. 1928년에는 연간 경비가 1500원에 이르렀고, 1934년과 1935년에는 각각 경비가 2000원에 달했다. 당시 일반 유치원의 평균 운영비가 연간 400~5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재정적인 면에서 상당히 안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동아일보가 1931년 6월 7일자에서 “마산 배달유치원은 양산 통도사의 보조와 마산 유지의 노력 및 독지가의 희사로 충분한 경비를 들여 내용이 자못 충실하다”고 보도한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배달유치원의 교육내용 또한 불교유치원에 걸맞게 불교적 내용이 적지 않았다. 절에 기도하러 간 내용은 물론, 봄 소풍을 간 장소 역시 성주사라는 절이었다. 또 대자유치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간식시간과 점심시간에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엄마·아빠.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는 공양게를 외우도록 했으며 매주 월요일에 삼귀의례, 어린이 찬불가, 산회가의 형식을 갖춰 법당 예배를 하게 했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에는 법당 마당에서 재롱잔치를 했으며 수료식과 방학식 등의 행사 때에는 불교의식을 따르도록 하기도 했다. 이처럼 1920년대에 설립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금천유치원과 배달유치원(대자유치원)은 바로 불교유치원의 산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일제시대 문을 열어 어린이포교에 나섰던 불교유치원은 전국적으로 12곳에 달했다. 이같은 기록은 손미령이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한국불교유치원에 관한 연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어 불교유치원의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손미령의 논문에 따르면 불교계는 1923년 금천유치원을 시작으로 1924년 산청유치원, 예천유치원, 강릉선정불교포교원 유치원, 효성유치원 등이 설립됐다. 또 1925년에 보명유치원과 화광유치원, 1927년에 동래유치원, 1928년에 대자유치원과 함양유치원, 1931년에 자명유치원이 각각 개원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역별로는 경상도에 5개, 강원도에 2개, 함경도에 2개, 경기도에 2개, 충청도에 1개 등 전국에 12개였고 전라도에는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 12개 불교유치원 중 사찰에 위치한 것이 6개로 큰 사찰에서 유치원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사찰의 지원 여부가 불교유치원 운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찰의 지원 여부가 당시 불교유치원의 흥망성쇄를 좌우했다고 할 만한 기록은 산청유치원의 예에서도 나타난다. 산청유치원의 경우 “1931년 대원사의 본사인 합천 해인사로부터 연 300원의 경비 보조를 받았으나 경제불황으로 인해 경비출처가 막연해 유치원 경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정확하게 재정적인 이유로 1920년대 설립된 불교유치원이 사라졌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은 단 2곳뿐이다. 물론 이유가 단 하나일 수는 없겠으나 무엇보다 불교계의 지원 및 인식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시대때 전국 12곳서 운영

 
1926년 개원해 현재까지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달유치원(대자유치원)의 1928년 제1회 졸업식 사진. 사진제공=마산 대자유치원

때문에 불교유치원은 첫 불교유치원이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수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1923년 금천유치원이 설립됐을 때 전국 유치원수는 57개였고, 1931년 전국 유치원이 230개로 늘어났을 당시 불교유치원수는 겨우 12개에 불과했다. 이어 해방 후 1963년에는 그나마도 4개로 줄어들었다가 1970년에야 1931년 수준인 12개가 됐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980년에는 다시 10개로 줄어들었다. 당시 전국의 유치원 수는 919개에 달할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불교계 전반적으로 인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불교포교에 나서야 할 시기에 비구-대처 갈등으로 인해 어린이포교를 위한 유치원 설립과 운영에 관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행히 1981년 불교유치원 교육내용에 큰 영향을 준 전국불교유아교육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불교계 상황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불교유치원간 단합과 정보교환, 문교부 교육과정에 준한 불교적 교재개발과 보급에 나서는 한편 새로 생겨나는 불교유치원의 설립과 운영·교육과정 등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불교유치원 수도 늘어나기 시작해 1990년에 전국적으로 146개의 유치원이 생겨났고, 오늘날 전국적으로 220여 개의 불교유치원이 아동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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