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을 때는 삶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한 마음도 없게 된다.
-벽암록-
무더운 여름입니다. 오늘도 흐르는 땀과 함께 흙을 붙이다 제가 불모로서 지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들을 돌이켜 봅니다. 몇 해 전 불모라는 길이 이렇게 어렵나 하는 것을 한참 몸으로 알아가고 있던 때 저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격려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구속은 저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들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작업장으로 가다가 본 집 앞 택시회사의 ‘기사모집’이라는 현수막이 제 마음을 많이 흔들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벽암록』의 ‘살아있을 때는 삶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한 마음도 없게 된다.’는 짧은 경구는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게 했고 제가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함에 있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알게 해 주어 그 때의 어려운 시점을 견뎌내고 지금까지 불상조각가로서 작업을 해 나가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 후 몇 해를 그렇게 정신없이 작업해오다 그때 그 경구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만남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저에게 새로 조성될 영산전에 모실 소조 상들을 의뢰하신 스님께서 연세가 아흔을 한참 넘기신 노거사님 한분과 함께 그 작품들을 보러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조성중인 소조상들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시고 만져도 보시다 먼저 조성된 상들 앞에서는 합장을 하고 그분들의 명호를 불러가며 기도까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작품을 대하시는 노거사님의 모습을 보고 작품에 대한 만족감의 표현인 것 같아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단지 조각된 흙덩어리에 불과한데 하는 생각에 저렇게 까지 예를 갖추시는 모습에 조금은 민망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노거사님의 기도가 끝난 후 제가 “점안식을 올린 후에는 저분들도 모두 제 모습을 갖추실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에 노거사님께서는 후후 웃으시며 “서불모는 점안이 뭐라 생각하세요?”하며 되물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답변이 나오지 않아 잠시 생각하다 “성상들을 법당에 모실 때 점안을 통해 생명력과 신성성을 넣어 드리는 것 아닙니까”라고 답해드렸습니다. 다분히 사전적 의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말을 듣고 노거사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그게 점안이 맞기는 맞는데 그것만이 점안은 아니지”하셨습니다. 이어 나온 말씀이 “점안이란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지요 그러나 그것이 늘 마지막에만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맨 처음 흙을 한 점 붙여 가는 그 순간 이후의 모든 흙 한 점 한 점에 점안의 의미를 담고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저의 작업 한 부분 부분이 점안의식에 준 하는 즉 혼신의 힘을 쏟아 작업에 임해 달라는 부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도 제 이름을 건 작품들에 온 정성을 다했습니다만 저에게 작품을 의뢰한 그분들께는 작품이 아닌 성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저의 작품에 더욱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한 번 더 그 경구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작업에 임함에 있어 순간순간 작업 자체가 내가 되어 작품 속에 내가 스며들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작품이 남에게 한 번도 부끄러워 본적은 없습니다. 잘되면 잘된 대로 못되면 못된 대로 그 때의 제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또한 그것은 내가 나에게 거짓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저의 작가인생에서도 최소한 저를 속이는 부끄러운 작품은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하나를 가져 봅니다.
서칠교 (불교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