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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16. 자크 라캉-김석 건국대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이원론적 이성철학 한계 불교의 연기론으로 극복

불상 조각의 미 극찬
자의식 오류의 원천
기존지식 적극 부정

자연주의 모방전통을 뛰어 넘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창조하려고 했던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의 우키요에[목판화]에 매료된 것처럼 많은 탈근대 사상가들은 동양사상에서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려고 했다. 프로이트주의를 혁신하여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이 철학, 문학, 예술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은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1901~1981)도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구조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로 일컬어지는 라캉은 불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라캉은 항상 극동의 문화를 동경해서 노자의 사상을 직접 공부하기도 했으며, 1963년과 1971년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돌아보면서 불상조각의 신비한 미를 극찬하였다.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객이원론적 이성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라캉이 무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이나 연기론적 입장에 근거해 무아의 법리를 강조하는 불교사상에 끌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라캉은 ‘불안’을 주제로 1962~63년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욕망의 망상적 성격과 진리에 대한 전복적 태도를 주장하는 불교의 변증법적 사고가 자신이 개념화한 욕망이론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라캉이 불교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세 고리를 통해 무의식적 욕망을 설명하는 라캉과 불교의 사상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라캉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그것이 불교 이론과 어떠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자아는 진정한 주체가 아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라캉이 본격적으로 정신분석으로 전향하면서 정통 프로이트주의와 자아심리학에 대항해 이론적 차별화를 모색한 준거점은 1936년 발표한 ‘거울단계’와 ‘상상계’ 개념이었다. 『서양철학과 선(禪)』에서 프롬은 프로이트야 말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인 것으로 통합한 합리주의의 완성자이며 정신분석이 강조하는 치료는 불교의 구원과 통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선과 정신분석은 둘 다 ‘자신의 본성의 통찰, 자유, 행복 내지는 사랑의 성취, 에네르기의 해방, 정신 이상이나 불구로부터의 구제’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캉은 아이가 6~18개월 자아형성기에 거치는 거울단계의 경험이 한갓 이미지에 불과한 상상적 자아를 주체의 본질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계기임을 역설 한다. 의식이란 거울로 대표되는 가시적인 공간에 투영된 자아가 대상들의 이미지와 맺는 상상적 관계로 구조적으로 주체를 소외시킨다는 것이 라캉의 비판이다.

자아가 강화될수록 ‘상상적 이자관계’는 더 견고해지며, 그 속에서 주체는 헛된 만족을 추구하면서 타자의 욕망에 길들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가 오인에 기초한 상상적 동일시의 산물이며,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이 타자의 시선이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은 언제나 미혹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거울단계와 상상계의 자의성은 라캉이 자아심리학 뿐 아니라 의식의 명증성을 강조하는 주체철학을 비판하는 핵심 논거가 된다.

이러한 입장은 세계를 상관관계적 법칙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보면서 자아라는 것을 따로 내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교이론과 통한다. 석존은 인간존재 및 경험세계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제요소들 자체가 인간존재이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만물의 연기성을 통해 우주의 운항과 운동을 설명하는 불교의 입장은 공사상(空思想)을 전제한다.

인간은 언제나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관조하면서 타자로부터 인정되는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자신이 마치 세계의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대상화된 의식의 작용일 뿐이다. 거울단계를 통해 자의식이 환각과 오류의 원천이라고 비판하는 라캉이나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은 존재의 소외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

라캉은 욕망이 인간 삶의 본질이며, 욕망하는 주체는 무의식 주체라는 것을 밝힌 것을 정신분석의 가장 큰 공헌으로 간주한다. 라캉의 모든 이론은 무의식 주체의 발생과 욕망의 본성에 대한 해명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언뜻 대상에 대한 맹목적 추구나 본능적 행동처럼 이해되지만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언어적 존재인 인간이 경험하는 근원적인 결여와 연관된다.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비로소 소통과 이해가 가능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데 언어는 대상을 기호화하면서 사라지게 만든다. 쉽게 말해 내가 ‘사과’라는 말로 지시하는 대상은 사과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개념이나 이미지일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을 언어로 지시해야 하고 그것을 상징계의 대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만 언어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언어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상징계에 주체로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어떤 원초적인 대상(실재)을 잃어버리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욕망은 끝없이 대상에서 대상으로 미끄러지지만 결코 충족될 수 없는데 언어가 만들어 내는 결여는 경험적 대상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소외된 욕망은 대상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타자의 욕망만을 좇는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

라캉이 불교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욕망은 망상이다’라는 가르침이다. 욕망의 대상을 라캉은 ‘오브제 a’라 부르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결코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은닉하는 환상적 원인-대상을 가리킨다. 욕망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환상대상 때문에 소외된 욕망이 발생 한다. 불교에서도 대상에 대한 그릇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현상을 집제(集諦)라 하여 경계한다.

해소되지 않는 욕망의 무한한 순환인 갈애(渴愛)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욕망의 발생에서 불교는 특히 인과응보와 업(業)의 순환성을 통해 심리적 인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마음은 본래 거울과 같은 것이지만 언제나 미혹되기 쉬운데 불교는 이러한 심리적 작용을 무명훈습(無明薰習)이라 부른다. 마음의 작용이 만들어 내는 욕망의 순환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겪는다고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분석도 외부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망상적 구조가 빚어내는 인간의 소외와 정신적 고통을 강조한다.

현실이 아니라 실재에 주목

상상계와 상징계가 늘 욕망을 어긋나게 만들고, 인간을 환상 속에서 소외시키는 현상만을 강조한다면 정신분석은 인간운명을 비관적으로 보는 소극적 니힐리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욕망이 존재결여에서 비롯됨을 인정하고, 존재에 대한 향유의지로 환상을 통과하라는 적극적인 윤리적 태도이다. 이것은 환상을 벗어던지거나 욕망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욕망은 상징계의 대타자가 부과하는 법에 종속되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죽음 충동을 발생시키는데 여기서 욕망은 실재와 조우한다.

실재란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장소로 모든 개념화를 벗어나는 무(無)이자 상징계를 작동시키는 찌꺼기이다. 욕망의 윤리란 다름 아닌 이 불가능한 대상인 실재에 대한 갈망이다. 도덕법칙이 실재를 겨냥해야 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봤을 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며, 자칫 절대 대상에 대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나 환각을 강조하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라캉이 말하는 것은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포기한 결여를 상징하는 ‘오브제 a’를 내 존재의 핵심으로 환상 속에 능동적으로 위치시키면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기표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개별성을 향유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본체의 궁극적 요소로 정견의 대상이 되는 ‘다르마’(dharma)를 아는 깨달음, 즉 반야(般若)에 비유할 수 있다.

불교와 정신분석은 실재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진리에 대한 전복적 태도에서 통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라캉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본질적인 것은 의심, 즉 개념적 확실성이나 실증적 지식을 거부하고 실재를 그 자체로 조우(이것을 라캉은 ‘우연’,‘행운’을 뜻하는 그리스어 ‘투케’(tuch′e)로 지칭한다)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기존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회의하며 파괴하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덕’의 전략에 가깝다.

선불교에서도 진정한 법은 경전이나 문구를 벗어나며 오히려 침묵이나 무지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세계의 참 모습을 현상이나 실체에서 찾지 않고, 그 자체 순수형식으로 남으면서 비어있음을 통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재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 정신분석과 불교의 진리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신분석과 불교는 상당히 유사한 담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의 차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데 이는 담론이 만들어지는 조건과 담론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적과 관련이 있다. 종교로서 불교가 미망에 현혹되지 않는 개오(開悟)를 통해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다면, 정신분석은 치료의 끝에서 해탈(解脫)이 아니라 ‘주체의 궁핍’을 구조화하는 부정의 논리를 더 강조한다. 욕망은 치료의 끝에서 환상을 통과한 후 다시금 환상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욕망은 망상이다’라는 라깡의 말은 욕망과 환상의 필연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것은 망상적인 것을 경계하는 불교의 깨달음과는 차이가 있다. 
 김석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강의교수


김석 박사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했으며, 철학아카데미, 건국대, 서울시립대, 고려대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강의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살림),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이야기』(아카넷), 『프랑스철학과 문학비평』(문학과지성사), 『기억과 몸』(건국대학교 출판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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