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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1. 오대산 북대 미륵암에서

기자명 법보신문

만물해방·화엄개벽의 길은 오대산 북대서 시작

올해 연초 동학의 실천적 양상을 넓고 깊은 화엄사상으로 풀어낸 ‘화엄개벽의 길’ 연재를 시작한 이후 『벽암록』을 보던 중 선사들의 할과 방에 정신이 아뜩했다며 돌연 연재를 중단하고 『화엄경』 공부에 전념해온 김지하 시인이 다시 독자들 앞에 섰다. 「법보신문」은 이번 호부터 화엄사상 안에 새로운 문명의 대전환을 맞이하는 길이 있다고 강조하는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모심의 길’을 연재한다.


삽화=김지하

이 글, ‘화엄개벽모심의 길’은 후천개벽이 본격화한다는 올해 기축년(己丑年), 2009년 6월 20일 월정사(月精寺) 현기(玄機) 스님과 함께 오대산 북대(北臺) 미륵암(彌勒庵)에 올랐을 때부터 발신이 시작된다.

미륵암은 고려말 큰 스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만년에 머물러 화엄법신선(華嚴法身禪)을 완성한 곳이다. 화상은 일찍이 그 누이에게 보낸 시 구절에서 스스로를 삼천대천세계의 속곳을 다 보아버린 큰 거울 같은 눈으로까지 묘사한바 있는, 그러니까 어쩌면 미륵암이 전에 이미 해인삼매를 꿰뚫은 눈일 것이다. 그 밝은 눈이 새삼 오대산 북대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1400고지 두루봉에서 중얼중얼 내 입 속으로부터 시작된 첫 발신은 바로 이것이었다.
“또 하나의 ‘보림(保任)’이 아니었을까?”
이 말이다.
왜?
왜 하필이면 ‘북대’인가였다.

자장(慈藏)이 오대산을 화엄성지요 일승원교의 도량으로 못 박을 때부터 이미 오대산수행의 본행처(本行處)는 아무래도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일 것이 상식이요 대방광불화엄경이 아무리 광활한 시방지향(十方志向)이라 해도 입법계(入法界)의 선재남유(善財南游)가 가르키는 첫 상징적 방향은 아무래도 화상 자신의 쓰라린 고향이기도 한 남쪽 ‘남대(南臺)’ 근처일 터인데 왜 하필이면 ‘북대’인가였다.
그렇다.

속된 사람의 속된 생각은 어찌해도 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의문의 성격이 이렇게 밖엔 안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어떤가?
당대(唐代) 숙종(肅宗) 시에 숙종이 국사(國師) 혜충(慧忠)에게 국가대사에 관한 큰 소망을 물었을 때 혜충의 대답은 ‘무봉탑(無縫塔)’이었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바로 그 무봉탑의 비유를 설두(雪竇)선사는 ‘유리궁전(琉璃宮殿)’이라고 간결하게 해명한 일이 있다.

오대산 우통수가 새 시대
지중해인 황해를 이루는
저 큰강 남한강의 첫 샘물

‘유리궁전’이 무엇인가?
그것은 서경(書經) 훨씬 이전부터 중국사상사에 뚜렷한 한 신화적 이상사회의 메타포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한 북방(北方) 천공(天空) 중심의 우주변화를 가르키는 말이었는바 먼 훗날 19세기 한반도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 후천개벽의 뚜렷한 우주적 징표로서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겨울엔 온화하고 여름엔 서늘한 ‘사천년 유리세계(琉璃世界)’라는 우주비전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북방중심의 우주변동이다.

왜 북방인가?
북방, 북극은 우주의 임금자리다.
스티븐.호킹까지도 물과 생명의 탄생지인 지구의 북극이 우주진화의 참 중심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북쪽, 그 유리궁전, 그 무봉탑과 나옹화상의 북대는 아무 연관도 없는 것일까?
나옹화상의 미륵암 시절을 ‘또 하나의 보림’이라고 한다면 나옹은 분명 화엄성지 오대산에서 북방중심의 우주개벽에 의한 대화엄세계의 정치적 성취, 즉 ‘무봉탑’을 그때 꿈꾼 것은 아닐까. 여말(麗末) 진화(陣華)의 시에서처럼 남쪽 송나라는 이미 시든 꽃 모냥 스산하고 북쪽 원나라는 아직도 캄캄 밤중인 때다.

생각이 지나친가?
그러나 나의 변명은 이렇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모른다. 허나 나옹화상이라면 능히 그런 꿈을 꾸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의 시들, 그의 생애, 그를 향한 당대 민중들의 숱한 설화 속의 그 한 맺힌 피 어린 소망들. 그 뒤 이조 500년을 내리 비밀불교 조직인 당취를 비롯한 민중불교 저변을 관통한 나옹의 숱한 전설을 살펴보면 능히 능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었음을 뚜렷이 느끼게 한다.

‘화엄개벽’의 강렬한 예감이었던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구절, ‘남쪽 별 원만하면 북쪽 은하수 제자리에 돌아온다.(南辰圓滿北河回)’ 속의 그 ‘원만’이 분명 일승원교 화엄성지 오대산의 법신선(法身禪)의 완성이라면 그것은 서남북방으로 3000년 동안 기울었던 지구자전축과 함께 북극 태음쪽으로 돌아오는 북방천공의 모든 은하수, 성운군,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기위친정(己位親政) 즉 후천개벽을 뚜렷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북대.

눈부시게 흰 자작나무와 시뻘건 금강송, 도처에 핀 산동백 사이로 아득한 동북쪽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두루봉과 미륵암 입구에서 그때 나의 뇌리에 떠오르던 세 가지 이야기는 다음이다.

하나는 19세기 남조선사상사 중의 전설중의 전설인 김광화(金光華)의 남학(南學)에 남아 있는 그 무렵의 담론이다. ‘북학 다음에 서학이요 이어서 동학이고 또 그 다음이 남학이니 이제는 중조선에서 중학(中學)이 일어서서, 북학을 참으로 실천할 때다.’

둘은 ‘만국활계남조선’의 강증산을 이어 일어선 보천교(普天敎)에 ‘화엄개벽의 씨는 남조선에서 뿌려지고 그 열매는 중조선에서 거둔다’는 말과 함께 그곳 최고 간부의 아들 탄허(呑虛) 스님이 보천교 탄압직후 곧바로 오대산에 와 방한암 스님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이를 정역 등 개벽역과 연결 지어 무언가 광대한 만물해방을 꿈꾸며 가끔 ‘北方震來 萬蘇蘇(북쪽의 우레가 때리니 만물이 일어나 소생하도다)’란 시 구절을 읊조렸다는 이야기.

셋은 지리산 산신이 된 마고할미의 1만4천년 전 파미르고원 마고성의 ‘신시(神市)체제’, 이른바 여신창조설에 토대를 둔 모녀직계혈통중심의 새로운 남녀평화의 신문명-팔여사율(八呂四律, 여성성.혼돈성 여덟에 남성성.균형성 넷 비율의 혼돈적 질서)의 ‘호혜.교환.기획적재분배사회’를 뜻하는 남방문화 ‘다물(多勿)’과 복희씨(伏羲氏) 같은 리대인(離大人)에 의한 철저한 여성보호와 추대의 남녀이원집정제(男女二元執政制)를 뜻하는 북방문화 ‘불함(不咸)’사이의 융합이 진정한 화엄개벽의 미래라는 신화복합설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8월 24일. 어제 고 김대중 전대통령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북한 조문단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갔다.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하고 있다. 고인이 갈라진 남북을 서로 가까이 묶어 놨다고.
나쁘지 않다.
이 뉴스를 보면서 두 달 전 오대산 북대의 나옹화상 이야기를 그 의미망을 따라 실질적으로 처음 발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내가 그동안 예상하고 있던 국내정세의 ‘당파’ 또는 ‘겹당파’(‘당파’는 선(禪)으로 표현한다면 ‘비중이변(非中離)’, 풀어 말하면 ‘가운데도 아니고 양 가장자리도 아니다’의 그 세 갈래 이견(異見)들, 또는 그것이 그대로 안팎으로 겹쳐진 여섯 갈래쯤의 서로 다른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여러 입장들)가 이리저리 얽히며 서로 길항하는 매우 복잡한 정세가, 동아시아.태평양 및 전세계적 현실의 참으로 난점 투성이의 복합적 진행과 함께 뒤섞이면서 바로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거기에 신종플루와 생태위기, 기후혼돈이 마구 얽힌 기괴한 생명계 변동과 더불어 아무리 봐도 해괴한 아테네의 산불, 일본의 대지진의 예감, 그리고 참으로 진정한 네오.르네상스를 갈구하는 썩어빠진 전 인류문화의 퇴폐적인 현실들이 한꺼번에 소리 소리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마땅히 여기에 대답해야 한다.
누가?
바로 화엄개벽모심의 길이다.
어떻게?

오대산 북대. 나옹화상의 미륵암 이야기를 이 시기에 꺼낸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실제에 있어 오대산 서대 우통수가 저 거대한 강물, 그리하여 또 하나의 새 시대의 지중해인 황해를 이루는 저 큰 강 남한강의 첫 샘물임을 잘 안다.

전 인류와 전세계중생이 기다리는 만물해방과 화엄개벽의 첫 샘물이 바로 이 시기, 북한과의 민감한 평화지향적 관계 속에서의 남한 및 동아시아 태평양의 복잡한 문명사전환의 대과도기에 그 근원적 해결의 비전인 화엄개벽모심의 길이 오대산 북대, 북대를 제 안에 이미 함축한 화엄성지 일승원교의 오대산 바로 그곳으로부터 훠언하게 동터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오대산의 화엄개벽모심이
새 문명의 중심 건설을 향해
한발 성큼 내딛어야 할 때

현금의 경제문명위기에 대해 독일의 메르켈은 ‘캄캄한 대낮’이란 표현을 쓴다. 이때에 대낮은 한량없이 밝고 밝았던 유럽의 경제중심사회과학의 그 전지전능을 가르킨다. 영국의 고든.브라운은 ‘좌도 우도 중간도 해결 못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태다’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사르코지는 거듭 거듭 시행착오 뿐이다.

오바마는 어떤가?
암중모색. 애매모호. 그야말로 의미심장한 카멜레온 상태다.

중국은 어떤가?
한창때 대중적 기업의 대박 터진 꼴이다. 아마도 현재 전세계 제일의 돈벌이는 중국뿐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사상도 보편적 종교도 소수민족 존중과 상식선의 인류애도 여성에 대한 당연한 모심도 빈부를 넘어선 평등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초보적 정의감도 썩은 공산당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분노조차도 일체 없는 그들이 내일 무엇이 될 것인가?
그들은 붕괴하거나 찢어지지 않고도 문화와 삶의 대개벽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아세안 10개국과의 단일시장, 단일통화를 추진중이다. 정말로 그 20억 민중의 연대는 잘 될까?

일본은 어떤가?
야스쿠니 국수주의의 후퇴와 동아시아 공동체의 급추진. 환류시스템이나 따듯한 자본주의 등 페르낭.브로텔과 카알.플라니의 새로운 융합시도, ‘호혜와 교환과 획기적 재분배’를 향한 민중생협과 환경.여성.시민운동의 선진적 도약,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식 자본주의의 시도(교세라 명예회장, 이나모리.가즈오)'는그야말로 ‘먼지는 함께 뒤집어 쓰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는 중생을 위한 항상된 진리의 길(同塵不染利生常道)’이라는 ‘화엄경 대종이과(大宗二科)’의 경제원리에로의 접근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신시’, ‘비단 깔린 장바닥’에의 참다운 근접인가?
참으로 그들은 ‘오까네(現金)’란 별명의 지독한 ‘돈 중독(中毒)’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참으로 그들은 극우적인 국수주의?제국주의를 버릴 수 있는가?
참으로 그들은 그 혹독하고 뿌리깊은 여성차별을 넘어설 수 있는가?
참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화엄종에서 또 하나의 제국주의인 ‘세계일화(世界一化)’가 아닌 ‘월인천강(月印千江)’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속단은 이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현 정부는 공개적으로 ‘돈은 벌되 탐욕은 멀리하자’고 말 만으로라도 마음과 돈 사이의 중도(中道)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오대산의 화엄개벽모심’이 지금 여기 새 문명의 중심 건설을 향해 한발 성큼 내딛어야 할 때가 아닌가?

나옹화상과 같은 아빠도 없이 태어난 철저한 중생.민초 스님이 바로 그 원만중도의 오대산에서, 북대 두루봉 가까운 미륵암에서 화엄법신선을 그 시끄럽던 동아시아의 과도기에 피투성이로 보림한 까닭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것 아니었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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