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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3. 흰 그늘·모심·화엄개벽의 길로!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는 화엄개벽시대 전 인류와 중생의 멘토

 
삽화=김지하

인정해야 될 것이 있고 인정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우리는 나날이 살면서 이런 점을 실감한다. 일체의 폭력적 사태는 당연히 반대해야 하지만 또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방만한 편안함 위주의 자유주의나 무사안일주의는 도리어 더욱 악성적인 폭력과 불의의 무정부상태의 시작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첫째 전세계와 동아시아 태평양 및 한반도가 지금 이같은 딜렘마 속으로 진입하고 있고, 둘째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딜렘마의 접근이나 이 딜렘마의 조짐 등에 관해 전혀 경계심이 없으며, 셋째 이 딜렘마 안에 무엇이 함장되어 있는지에 대한 선험적 지혜가 전무하고, 넷째 이 모든 사태가 왜 일촉즉발의 위험수준에 와 있으며 왜 이것이 그 근본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평화와 새로운 해방세계의 열림을 도리어 예감시키고 유도하는 해뜨기 직전의 캄캄한 어둠과 같은 사태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 바로 이같은 딜렘마 속에서 꽃피듯 별 뜨듯 열려올 대화엄개벽과 만물해방의 새 세상을 준비하는 긴장된 실천적 예감, 즉 ‘아시안 네오·르네상스의 흰 그늘의 미학’과 철저한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일체에 대한 ‘모심의 문화혁명’이 전혀 논의조차 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또는 반대로 그렇게도 좋은 조짐이라면 무엇을, 어디서부터 새로이 시작해야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인가?
역사, 문명의 역사, 그리고 이제부터의 우주생명의 변화의 진폭은 예전의 문명사가들이 진단하고 예언했던 그런 속도나 진행과정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이 점을 먼저 각오해야 한다.

빠를 뿐 아니라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심야의 떼도적 같다. 벼락같고 천둥같지만 또는 정반대로 소리 없는 독 배암 스며들 듯 할 것이다. 마치 지금 번지고 있는 ‘신종플루’ 류형의 괴질처럼 말이다. 종말이 도적처럼 갑자기 온다는 성경의 말씀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개벽’은 서양식 표현으로 하면 그대로 ‘종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흰 그늘’이란 메타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문으로는 그늘보다 그림자 또는 어둠이 더욱 가깝다. ‘백암(白闇)’이 그것이다. 흰 그늘.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길한, 그러면서도 기대에 찬 예감의 가장 날카로운 표현은 ‘게로니모스·하이로미에’의 시구절 ‘흰 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였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와 5000만이 죽어나간 이차대전 직전의 노래 ‘글루미·썬데이’는 서방 전체에서 하루에만도 200명 이상의 자살자를 불렀고 독일 종교개혁 전, 프랑스 시민혁명 전, 러시아 10월 혁명 전의 복합적 예감의 형태가 모두다 하나같이 일종의 ‘흰 그늘’ 이었으니 검은 이 세상에의 절망과 막연한 새 세상에의 쌔하얀 갈증의 복합이었다.
지금 우리의 나날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도 여기에 무거운 책임을 당연히 느껴야 할 지도적 인사들,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도무지 캄캄절벽이고 감감무소식이다.

우리나라 한해 자살자수가 12000명. OECD 국가 중 첫째요 세계에서 네 번째다. 대학생 자살자수가 한 달 평균 30명 이상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급증하는 자살자수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극도의 절망과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죽음에의 경사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삶이 그토록 괴롭기만 한 것인가?

본디 어떤 악조건에서도 자살 같은 것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악바리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그런데 왜 이리 되었는가? 무슨 천지대변동이 다가오는 불길한, 아니 참말로 거대한 변화의 기이한 조짐들인가?

이 조짐들은 언제 참으로 심각한 현상으로 사회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인가? 언제쯤에야 저 말 많고 꾀 많은 지식인들과 잽싸고 날렵한 예술가들과 눈치 빠르고 솜씨 빠른 CEO들의 눈에 확실한 ‘흰 그늘’로, 나아가 ‘중도의 가운데로서도 좌우 양 가장자리로서도 전혀 되먹지 못한, 그것도 여섯 갈래 쯤의 주변 외세와 결탁한 복잡한 겹 당파’의 혼돈, 그렇다고 우당탕탕 목숨을 건 박력있는 투쟁과도 거리가 먼, 똑 다라운 외세 의존적 ‘철밥통 싸움’의 형태를 띈, 그런 하나마나한, 그럼에도 까딱하면 컴컴한 지옥문이 활짝 열릴런지도 모르는 그런 해괴한 해체의 소음이 언제 확연히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인가?

1∼7세기는 인류 최대 과도기
해인삼매의 이상 절실했던 때
지금도 그 시기와 비슷한 상황

지금부터다. 바로 이 가을부터다.
그래서 내가 애당초 법보신문과 11월부터로 약속되어 있던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것이다.
왜? 그게 뭘 그리 급한가?
그까짓거 망하면 대수인가?
국운(國運)이 좋다고 내내 떠들어 댄 것은 바로 당신 자신 아닌가?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나다. 그것 때문에도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이 결집되던 서기 1세기에서 7세기 사이의 중앙아시아는 원시공동체 중심 부족사회 일반에서 전반적으로 고대 왕정국가체제 중심의 세계적 대제국주의 경쟁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거창한 전쟁만발의 과도기였다. 따라서 만물과 중생과 보살들에겐 그야말로 대방광불화엄경과 같은 백화제방, 만물해방, 천지공심의 생명·평화로 가득찬 ‘해인삼매’의 이상이 절절히 필요했고 ‘월인천강’의 그 당시 나름의 ‘개체-융합’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었다.

지금은 어떤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이다. 유렵연합의 전체주의적 재결집요구, 러시아 주변 유라시아의 새로운 형태의 집단주의적 확장, 미국의 남미·아프리카·아시아에의 전혀 새로운 형태의 확산효과, 종국의 아세안 10개국과의 단일시장·단일통화 추진,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급추진.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만만치 않은 자체결집추세 등은 모두 다 그때, 1세기∼7세기 사이의 중앙아시아와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너무 비슷하다”

‘아니다·그렇다’ 현상이 극명한 시기가 예컨데 5만년 전 선천개벽과 같은 바로 개벽기 그때다. 더욱이 숨고 드러남, 닫힘과 열림, 축적과 순환, 확산과 수렴이 복잡화하는 현대의 개벽기는 특히나 동아시아 태평양과 한반도 주변의 경우 명백한 후천적 화엄개벽현상의 뚜렷한 폭발적 드러남을 잠재적으로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화엄개벽모심에의 일상적 요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본디 모심이라는 일종의 선(禪)적인 실천자체가 그 나름으로 안으로는 신령의 무궁한 비움의 힘이, 밖으로는 복잡화의 빈틈없는 채움의 열기가 함께 움직이고, 온세상 사람이 한꺼번에, 그러나 각각 제 나름 나름 따로따로 화엄이라는 전 우주적 융합을 깨닫고 실현하려는 줄기찬 창조적 진화의 노력이다. 그럼에도 그 주동력인 신불(神佛)의 힘의 본성은 언제나 텅 빈 공(空)이요 무(無)요 허(虛)요 동시에 의미심장한 대 침묵이다.
바로 이 지점에 우리가 오늘 서 있다.
다름 아닌 오늘이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이에 대응하여 세 가지 제안을 이미 내어놓았다. ‘흰 그늘의 미학을 선두로 하는 아시안 네오르네상스’,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존재를 우주공동주체로 들어 올리는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그리고 ‘화엄개벽의 목숨을 건 선적 실천으로서의 일상적 모심’이 그것이다.

나는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 이미 ‘시커먼 늙은 소의 쌔하아얀 눈물’을 통해 ‘흰 그늘’을, ‘아빠’ 대신 ‘엄마’ 열풍이 휩쓰는 신세대 감수성에서 ‘모심’을, 그리고 관객 1000만을 돌파하고 있는 ‘해운대’에서 이 사회와 온 세계에 덮칠지도 모를 종말적 개벽이라는 이름의 ‘쓰나미’에 대한 사람들 마음 밑바닥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근원적 공포와 불안을 뚜렷이 읽고 있다. 나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누구보다 먼저 이것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대안을 제시해야 할 사람들. 지식인 나부랑이나 정치인, 예술인 부스러기들이 가장 둔감하다는 바로 그 점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 삶의 구조 자체가 바로 그 나부랑이들, 부스러기들이 먼저 나서서 설치며 호들갑을 떨어야만 이 사회와 동아시아 태평양, 그리고 나아가 온 세계에 객관적 공론과 담론이 형성되도록 이미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 구조와 그 길을 도리어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대위기와 혼돈 헤쳐나갈 대안은
흰 그늘·모심·화엄개벽의 길
불교가 대안 논의해 구체화해야

어떻게? 누구보다도 먼저 종교인이 먼저 일어서서 손을 들어 달을 가르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느 종교인 말인가?
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불교다. 이제 불교가 전 인류와 중생의 멘토인 시대다.
화엄개벽은 그렇다 치자. 네오·르네상스와 문화혁명도 그렇다는 말인가?
그렇다. 왜?

본디 화엄경은 그 본뜻이 개벽(開闢)이다. 백화제방(百花齊放), 만물해방(萬物解放), 천지공심(天地公心)이 사실상 화엄의 본뜻이니 그것이 바로 후천개벽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복희역, 문왕역, 정역, 등탑역이 천부역과 함께 오역(五易)이라는 개벽역으로 목하 전문화하고 있고, 그 나름으로 과학화하고는 있다. 그러나 본디는 그렇다는 뜻이니 ‘꽃이 열려 세계를 장엄함’이 ‘개벽’의 가장 아름다운 해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또 이런 점이 있다.

‘개벽은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당대(唐代) 화엄학의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 안에 다 전개돼 있다’라는 주장은 전혀 옳지 않다. ‘혁명(革命)’이란 말이 이미 옛 유학용어 안에 들어있다 해서 그 옛 글 안에 근현대 혁명의 날카로운 전략전술이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개벽이나 혁명은 언제나 새로워야만 하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동시에 또 이런 것도 생각해야겠다.

화엄학의 ‘법계연기(法界緣起)-성기(性起)-연기(緣起)의 사상사’ 안에 이미 그 나름으로(그렇다. “그 나름”이다!) 화엄과 해인의 대해탈에로 가는 그 역시 한 길로서의 ‘흰 그늘의 입고출신(入古出新)’과 ‘모심의 사회변혁’이 비록 씨앗이나 그 뼈대만이라도 오롯이 들어있음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라는 것.

어쩌면 그밖에도 호혜와 교환과 획기적재분배의 착한 경제의 크고 힘찬 새 길이, 어쩌면 여성과 어린이와 소외대중에의 한 세계화엄개벽의 새로운 주체형성의 역동적인 방략이, 그리고 또 어쩌면 신경컴퓨터를 넘어 신령컴퓨터와 우주복합콘셉터의 길 역시 그 눈부신 씨앗이 오롯이 함장돼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래서도 불교 쪽에서 맨 먼저 이 세 가지 대안을 포괄적으로 제안하고 그 논의와 추진을 구체화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기독교, 천주교 등과 기타 종교들, 사상, 과학, 문화 관계자들을 모두 포함시키며 여기에 북한 동포들을 반드시 반드시 포함시키며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 사람들과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온 아시아, 더욱이 저 수많은 이슬람 사람들, 특히 여성과 청소년, 노인과 소외대중을 맨 먼저 앞장서 포함시키는 일대 현대적 결집을 이 가을 안에 한반도에서 실현시켰으면 한다.

그리고 그 장소로 이미 이 글의 첫 회에서 강조에 강조를 거듭한바 있는 화엄성지 오대산에서 개최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참으로 돈독한 바램이다.

나는 ‘흰 그늘’을 이 경우의 하나의 메타포로서 거듭 거듭 강조해왔다. 흰 그늘은 분명 촛불이다. 촛불은 한없이 가라앉은 죽음과 중력의 검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끝없이 타오르는 초월과 신생(新生)의 흰 불꽃이다. 그래서 ‘파스카’라고 부르고 그래서 ‘해탈문’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통과의례를 일승원교의 화엄성지 오대산에서 비록 그 초기에는 자그마한 규모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 가을에 전세계적인 대위기, 대혼돈 앞에서 그것을 헤쳐나갈 인류최대 최고의 대안인 “흰 그늘과 모심과 화엄개벽의 길”을 흰 그늘의 다소곳한 하나의 촛불로서 켜도록 어느 한 스님이 문득 나서서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르키시라!

그리하여 올 가을의 당파, 겹당파의 난장판을 도리어 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까지 포함한 위대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화엄개벽모심을 결집하는 그 ‘무봉탑’, 그 ‘유리궁전’의 터전으로 한번 바꾸어 보시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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