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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59. 연극(演劇)

기자명 법보신문

1928년 부처님오신날 법회서 공연된 ‘출가’

1930년대 대중포교 일환으로 법당-학교서 공연
일반무대 올린 첫 작품은 1930년 ‘나무아미타불’

 
2000년대 작품 중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원담 스님 작 ‘지대방’.

종합예술로 불리는 연극(演劇)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교와 관계를 가져왔다. 고려시대 국가의 양대 축제라 할 수 있었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불교의 종교적 목적과 함께 여러 가지의 연극적 놀이들을 포함하면서 이른바 잡희(雜戱)를 행하는 국가적 축제로 발전했다. 이때 축제에서 벌어지는 잡희들의 종류와 규모가 방대해지면서 그 잡희들을 총칭해 ‘백희가무(百戱歌舞)’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인형극·가면극 등이 포함됐다. 바로 거기에 불교연극의 전통적 요소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옛적부터 연극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던 불교계에 불교연극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일제시대로, 1930년대에 대중포교 필요성을 인식한 불교계에 의해 저변을 넓혀갔다.
연극은 고정된 장소에서만 상연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는지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연된 서구적 개념의 연극이 1908년 11월 원각사에서 공연된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최초 공연 연극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불교연극 역시 이러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들을 살펴볼 때 1928년 4월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에서 공연된 홍사용의 ‘출가’를 첫 불교연극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홍사용의 ‘출가’가 현재까지 밝혀진 최초의 불교희곡이라는 점 역시 이 작품이 최초 불교연극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어 1929년 2월 경기도 양주군 보광사에서 ‘목련극’ 공연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같은 점에 미뤄 당시 불교 행사가 열리는 많은 곳에서 연극이 공연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초 극단은 ‘룸비니 극단’

불교연극은 1930년대 들어 불교의 대중포교 원력과 불교개혁운동이 펼쳐지던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이같은 사실은 불교잡지인 「불교」지와 신문이었던 「불교시보」의 기사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1930년 각황사의 성도절 기념법회 식순에 활비극(活悲劇)으로 소개된 황금(黃金)을 시작으로 김소하의 희곡작품이 빈번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김소하는 1930년에만 ‘승리의 새벽’, ‘불심’ 등 다섯 작품을 쏟아 낸데 이어 1932년 ‘우란분’, 1937년 ‘누구든지’ 등 김소하라는 필명과 김태흡이라는 본명으로 모두 12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김소하가 활동했던 1930년대는 연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프로극단이 생겨나기도 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극단이 30여 개에 달했다. 불교계 역시 불교의 대중화를 화두로 삼은 상황에서 연극을 하나의 포교방편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에 따라 법회에 연극을 올리는 한편 별도의 문화행사를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소하는 1930년 1월호 「불교」지에 “일요학교나 소년회가 있는 곳에서 성도절 기념법회에 앞서 각본을 요구하는 곳이 적지 아니하다”고 본인이 각본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연극이 사찰의 법회나 행사에서만 선보인 것은 아니다. 연극이 대중에게 불법을 보다 쉽게 전달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연극은 사찰 밖 무대로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1930년 공연된 박진의 ‘나무아미타불’은 개화기 이후 사찰을 떠나 극장에서 공연된 최초의 불교연극으로 꼽히고 있고, 불교 최초의 연극 ‘출가’를 만들었던 홍사용의 작품 ‘흰젖’도 ‘백유(白乳)’라는 이름으로 일반 극장에서 공연됐다. 그리고 ‘우란분(盂蘭盆)’은 부민관에서 5일간 공연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1932년 8월 발표된 ‘우란분’은 『목련경』과 『우란분경』의 경전 내용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1932년 5월에는 순천 선암사가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에서 같은 이름으로 재공연하기도 했다. 이어 1940년 5월 봉원사 성도봉축기념일 행사에서도 목련극에 대한 공연기록이 있다. 「불교시보」에 따르면 1940년 공연된 이후 관객들의 호응이 높게 나타나자 수원 소재 일반극장에서 재공연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이후 공연에 대한 호평이 잇따르면서 전국각지로 알려진 끝에 마침내 전국순회공연까지 하게 됐다. 이같은 사실은 불교연극이 일반 관객에게도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30년 1월 7일에는 비록 아마추어 수준이기는 하지만 문헌상 최초의 불교연극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룸비니 극단이 탄생하기도 했다. 서울 각황사에서 성도일 기념법회 후 불교연극의 활성화를 위해 극단을 창단한 것이다. 불교연극은 또 학교 기념행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공연돼, 1937년 명성학교 성탄봉축기념법회에서는 ‘입산’, ‘감로수’ 같은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불교연극은 소재와 무대 등에서 상당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불교연극의 한계 상황은 1930년 6월호 「불교」지에 실린 ‘성탄극 우주의 빗을 보고’라는 글 중 “각황사에 와 보니 대문 앞에 ‘붓다이벤트’라는 간판이 있는데, 그 밑에 수백 명의 군중이 밀고 당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억지로 들어가 법당에 들어가려고 하니, 부인 관중만 1300~1400여명이 꽉 차게 앉아서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고 표현한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당시 불교연극에 대한 대중의 높은 관심과 함께 열악한 공연무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1948년 ‘마의태자’도 성황

 
1990년 초연된 이래 2006년 재공연이 이뤄진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출연진의 삭발식.

이후 불교연극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1948년 극단 극협에서 무대에 올린 유치진 작, 이화삼 연출의 ‘마의태가’가 성황리에 공연됐고, 1955년에는 극단 대중극회가 ‘지옥과 인생’을 공연했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1967년 ‘이차돈의 사’가 공연됐다. 이 작품은 비구니 스님이 직접 주역을 맡았고 모든 배우가 불자로 구성되면서 작품에 대한 완성도가 높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8월 한 달 동안 국립극장에 무려 2만여 명의 관객이 몰리는 등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1968년에는 불교 최초의 프로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 탑이 창단돼 ‘이차돈의 사’를 다시 한번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어 1970년대 들어서는 무대에 올려진 작품의 수가 적지 않았으나 이른바 앵콜 공연이 많아 작품의 질적 향상을 이루지는 못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극단 자유극장이 무대에 올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국립극단이 공연한 ‘에밀레종’, 극단 신협의 대한민국연극제 출품작 ‘탑’, 박제천 시인의 연작시를 극화한 ‘판각사의 노래’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일반극단의 작품 외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작품과 뮤지컬이 등장하는 등 불교연극의 영역이 확대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1982년 진관 스님이 극을 쓴 ‘선객’이 무대에 올려진 것을 비롯해 ‘구름 가고 푸른 하늘’, ‘조신의 꿈’ 등이 선보였다. 그리고 1984년 만해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엮어 발표한 ‘님의 침묵’은 창작 불교뮤지컬의 새 장을 여는 동시에 불교연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연극 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는 1990년 4월 초연된 이만희 작가의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이다. 한 인간의 세속적 번뇌와 견성의 과정을 극화한 이 작품은 철학적·문학적으로 깊이 있는 대사의 조화가 뛰어난 것은 물론, 고고한 탈속의 세계가 아니라 속세와 연결된 번뇌 속에 따뜻한 휴머니티가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같은 평가는 곧 각종 시상식에서의 수상으로 이어져 삼성도의문화저작상을 비롯해 서울연극제와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각종 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어 1996년에는 뉴욕 라마다 극장에서 상연돼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강만홍 연출의 불교신체연극 ‘두타’가 있었고, 1998년에는 ‘느낌, 극락 같은’이 무대에 올려져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 작품은 불상제작을 하는 두 사람의 가치관 차이를 통해 진정한 구원은 무엇인가를 다룸으로써 호평을 받았고, 수많은 상을 휩쓸며 대중성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고 흥행작은 ‘그것은 목탁∼’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극중 한 장면.

1999년에는 국립극단이 전년도 창작희곡공모당선작인 ‘아노마’를 청소년을 위한 특별공연 시리즈의 일환으로 공연했고,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인간복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다룬 ‘철안붓다’가 공연되기도 했다.

불교연극은 2000년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2000년에는 1993년 초연 됐던 ‘탈속’이 인천연극제에서 재공연된 것을 비롯해 ‘붓다를 훔친 도둑’, ‘한바탕 꿈인 것을’, ‘붓다마이바디’, ‘피고지고 피고지고’, ‘아름다운 남자’, ‘선’, ‘지대방’, ‘환화여 환화여’, ‘매혹-회암사 그 천년의 눈물’, ‘아버지의 가수’ 등이 무대에 올랐다. 이 가운데 ‘지대방’은 지금의 수국사 주지 원담 스님이 극을 직접 쓰고 불교연극 전문연출가 강영걸 씨가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수행자의 쉼터인 ‘지대방’ 풍경을 그리면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불교연극은 1928년 ‘출가’ 이후 이처럼 지속적으로 발표됐고, 또한 시대를 거듭하며 진화하며 포교의 한 방편으로 자리해왔다. 하지만 신은연이 「1930년대 불교희곡 연구-김소하의 희곡을 중심으로」에서 지적하듯, 불교연극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이것이 곧 대중예술을 통한 포교 영역 확대의 지름길이도 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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