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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7. 당파·겹당파, 십회향의 대안-①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의 깨트려지지 않는 중생구원 회향이 대안

 
삽화=김지하

‘당파(鐺把)’란 말이 아무래도 생소할 것이다. 당파는 각기 그 길이가 서로 다른 옛 삼지창(三枝槍)의 이름이다. 짐승을 죽일 때 그 영혼으로 하여금 천천히 삼도천을 건너가도록 하기 위해 그 찌르는 창의 길이가 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가운데 창이 가장 길고 왼쪽이 그 다음, 그리고 오른쪽이 가장 짧았다고 한다. 간화선(看話禪)에 비교한다면 도리어 ‘비중이변(非中離辺)’인 셈으로 전설에 의하면 고려 강화도 무신정권때의 결코 만만치 않았던 선승 혜정(惠正)이 중간파, 문신(文臣), 무신(武臣) 순으로 따뜻한 모심 속에서도 한편 치명적인 비판을 가했던 이른바 ‘당파선(鐺把禪)’ 또는 ‘모심선(侍禪)’의 바로 그 삼지창 이름이다.

그리고 이 세 갈래의 오류 위에 다시 외래세력의 세 갈래 네 갈래 이해관계가 얽힌 여섯 갈래 이상의 복잡한 양상을 함께 비판할 때에 이것을 ‘겹당파’라고도 불렀다는 후일담이 남아 있다.

‘당파’, ‘겹당파’가 왜 오늘에 와서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둘이다.
하나는 전 인류문명사의 근원적 대전환의 중심흐름이 바로 지금 한반도와 주변 동아시아·태평양 쪽으로 이동해 들어오고 있어 기존의 이익집단이나 사상권력들이 강약을 불문코 얽키 설키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기에 대응하여 흰 그늘의 문예 부흥과 모심의 문화혁명,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화엄개벽의 잠재적 역동적인 생성이 음양으로 충돌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화엄경 십회향품의 경제사회문화적 해석과 전망에서부터 이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그 첫 회향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이야기하였다. ‘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이라는 관념을 벗어나는 회향’에 관해서 였다.

이미 이 첫 단계에서부터 좌우, 중간의 세 갈래와 유럽의 근대사상, 동아시아의 오랜 선천(先天)의 통치이념 사이에 극렬한 상극과 갈등이 불을 뿜었다. 두 번째 회향에서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두 번째는 ‘깨트려지지 않는 회향’이다. 결코 쉽지 않다. 여기 ‘깨트려지지 않음’이 무엇을 뜻하는가?
‘깨트려지지 않는 진리성’일 것이다. 무엇이 진리성인가?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요 인간마음의 바탕이요 비로자나불의 저 원대한 화엄세계 해인삼매의 대 침묵, 그 어떤 경우에도 훼손될 수 없는 진여(眞如) 아니겠는가?
그것이 조금치라도 더럽혀지거나 방해받음이 없이 중생구호나 구원으로 회향해야 된다는 말이다.
어렵다.

이러니 민중해방, 서민구원을 외치면서 공금을 잘라먹고 뇌물을 받아먹고 지도부의 정치적 하자를 은폐키 위해 여성 동지를 강간하는 따위 조폭 수준들이 꽃피는 화엄이나 별 뜨는 개벽에의 첫 길 ‘회향’에 과연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어렵다. 이러니 몇 안 되는 저희 끼리 끼리 돈 좀 벌자고 산천을 파괴하고 악성적으로 4대강 개발을 추진하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친 환경이니 녹생 성장을 떠벌리는 따위 애당초부터 진리나 불살생이나 자비나 생태계와는 거리가 먼 위선자들이 중생회향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신종플루 같은 바이러스나 생명위기, 기후혼돈이 악화될 경우 유전자 조작을 주무기로 하는 통섭론이나 빅·브라더의 통제가 그 이데올로기인 중추신경계 온 생명주의 따위 악당들의 차원이 참다운 중도주의의 회향이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렵다.

깨트려지지 않는 회향이란
부처님 진리요 마음의 바탕
절대 훼손되지 않을 진여다

새 시대 화엄개벽의 길에서 요구되는 중생구원의 경제사회적 회향은 분명 이미 강조하였듯이 옛 신시와 같은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현대적 부활이며 ‘장바닥의 먼지를 함께 뒤집어쓰되 탐욕에는 물들지 않는 중생을 위한 항상된 진리의 길’리고 끝없는 창조적 복승(複勝)과 한없는 축적순환의 확충(擴充)으로 늘 자유로운, 그러면서도 깨트려지지 않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길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쉬울리 있겠는가?

이 길을 가자면 먼저 1만 4천년 전 마고성(麻姑城)의 옛 천시(天市), 신시(神市)의 우주율이었던 ‘팔여사율(八呂四律)’, 즉 ‘여성성·혼돈성·생명성·영성·개체성·우발성 등의 여(呂)가 여덟이고, 남성성·균형성·경제성·물질성·집단성·필연성 등의 율(律)이 넷 비율의 우주근원의 혼돈적 질서’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이 중국인들이 요즘 한없이 으스대며 자랑하는 주역이나 공자의 이론으로만 획득될 것인가? 4천 5백년 전 황제(黃帝)의 세계질서인 ‘율려(律呂)’, 즉 ‘남성성·균형성 등의 율(律)이 여성성·혼돈 등의 여(呂)를 앞서서 지배하고 통제하는 철저한 평균율의 음악원리’가 기초가 돼 있는 주역이나 공자 가지고 미국 금융위기와 생태·기후변화 따위 혼돈 일변도의 현대 세계에서 그야말로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 이외에는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신시 나름의 ‘호혜교환’이나 불교화엄사상 나름의 ‘동진불염(同塵不染)’, 그리고 복승론이 제기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축적순환론이 추구하는 ‘환류시스템’, 그리하여 ‘자유로우면서도 결코 깨트려질 수 없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선(禪)적인 경제사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깨트려질 수 없는 회향’이 아직도 주역이나 공자같이 청태가 퍼렇게 앉은 위선적 추연(推衍) 체제 아래 단단히 묶여있는 낡은 선천(先天)사상 따위로 이른바 ‘악마의 멧돌’이라 불리는 장바닥의 저 시커먼 먼지구덩이 한복판에서 ‘거기 있되 동시에 거기 없는 흰 그늘’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정역은 이 경우 ‘간태합덕(艮兌合德)’으로 대답하고 있고 이것이 곧 옛 신시의 원리이지만 그것을 현대화할 경우 반드시 ‘삼천가지 제도개혁과 한가지 우주생명학적 질서의 통일(禮三千而義一)’을 절대적으로 조건화한다. 당연히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의일(義一)’이 ‘율(律)’ 이라면 ‘예삼천(禮三千)’은 의례껏 ‘여(呂)’요 더욱이 ‘팔여(八呂)’의 그 혼돈한 삶의 세계 아닐까?

요컨데 ‘깨트려지지 않음’은 그것이 구체적인 중생구원의 회향인 한 ‘팔여사율’의 근원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혼돈적 질서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천부역(天符易)은 그래서 이 경우 ‘석삼극(析三極)’으로 대답한다. ‘세 개의 극으로 나뉨’이다. ‘셋’이란 천지인이기도 하지만 중생 회향의 경우엔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셋이기도 하다. 이것이 반드시 중요하다. 호혜의 살아 있는 혼돈성, 교환의 엄정한 대칭성, 그리고 획기적재분배의 이원집정적 중심성이 반드시 나뉘어 작용해야 함이 원칙인 것이다. 거기 추상적 왈가 왈부가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러나 보라! ‘석삼극’은 그 앞에 명백히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는 대전제, ‘한 처음은 처음이 없는 하나’라는 ‘변·불변(變·不變)’, ‘동·부동(動·不動)’의 철저 원리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중생에 대한 섬세하고 살가운 회향이면서도 변함없는 깨트려지지 않음인 것이다.
오역(五易) 화엄경, 화엄개벽 모심의 현대적인 한 구체적 사례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복희역(伏羲易)은 이때 아무 말이 없는가?

있다. 무엇이라 하는가? 대원칙, 즉 ‘깨트려지지 않는 중생구원의 회향’을 애당초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거기 있되 거기 없는 흰 그늘’의 괘(卦)를 통해서다. 그것이 무엇인가? 정역의 간태(艮兌)에 해당하는 한국의 정동(正東)과 미국의 정서(正西)의 위치에 흰 빛을 뜻하는 이(離) 괘와 검은 그늘을 뜻하는 감(坎) 괘가 뚜렷이 대치하므로서다.
이래서 당대(唐代) 화엄법신선 수련의 저유명한 공안집 벽암록(碧巖錄)은 제17칙 ‘향림서래의(香林西來意)’에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자 선사는 ‘오래 앉아 있었더니 피곤하다(坐久成勞)’고 대답했다’라고 가르친다. 무슨 뜻일까? 여기에 설두송(雪竇頌)이 붙는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짓 쉬지 못하면 자호선사가 유철마 때리듯 해야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깨트려지지 않는 중생구호의 회향’이 철저히 경계해야 될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짓(左轉右轉)’임을 사뭇 섬짓한 느낌으로 깨닫게 된다.
‘좌전우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좌’가 무엇이고 ‘우’가 무엇인가? 더욱이 ‘굴림(轉)’이 도대체 무엇하는 짓인가?
굴린다? 짱구를?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 통해
중생에 경제이익·여유 제공이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회향이다

나아간다. 십회향의 세 번째,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회향’이다. 이것은 ‘온갖 선(善)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되 동시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깨달음에 접하여 부처님과 같이 깨닫도록 회향하는 것’이다.

만약 이 회향이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를 통해 중생에게 경제적 이익과 생활적 여유를 제공하는 회향일 경우, 그 대상인 중생이 그 전 과정에서 다만 중생일 뿐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님과 평등한 처지로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매우 어려운 이야기다.
경제를 ‘사냥’이라 할 경우 그 ‘사냥’이 ‘사랑’이 돼야하고 ‘자비’가 돼야하고 더 나아가 그 사냥 자체가 부처님의 ‘자비행’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능한 일인가?

마르크스주의는 재분배를 평등분배로 추상화 했다가 망했다. 경제에 있어서 추상적 낭만이나 이상적 유토피아는 통용되지 않는데 이 일은 여하히 가능할 것인가?
주역에서는 ‘못과 산은 고르다(澤山成)’라는 괘가 있어 이에 대응한다. 인민의 삶은 거룩하다는 그 뜻은 좋으나 여기에서 그 추연(推衍)의 핵심인 ‘함(咸)’은 상당히 고약하다.

매우 위선적인 통치술의 한 영역으로서 항속적 가치 판단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에 비해 정역은 ‘십일일언(十一一言)’에서 우주인 십무극(十無極)과 중생인 일태극(一太極)을 하나로 묶어 ‘기위친정(己位親政)’이라 하여 ‘밑바닥이 임금이 되는 하느님 직접 통치’를 가르키고 있다. 또한 주역의 추연(推衍)이 아닌 천부역의 묘연(妙衍)은 이 경우 ‘天一一’이라 해서 ‘하늘은 한 님이면서 하나다’의 뜻으로 하느님과 한 중생이 똑같은 하늘(天)임을 전제하고 주역의 괘상 자체인 ‘산 위에 물이 있는’ 그 신시의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섬세한, 결코 추상적 평등이 아닌 공정하면서도 세세히 개별적인 회향을 통해 당연히 중생의 삶이 부처님이나 하느님과 같은 처지이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중생에게 회향하는 재분배를 획기화·세목화함으로서, 추상화와 착취를 동시에 넘어섬으로서 중생을 부처님과 평등하게 회향하는 것, 그래서 재분배가 어렵고, 그래서 재분배의 중심성은 ‘남녀의 이원집정제’이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십회향인 ‘모든 처소에 이르는 회향’에 대응하는 보살의 회향 기도는 ‘나는 선(善)의 힘을 모든 처소, 모든 나라, 모든 지역과 일체 만물 중생에 빠짐없이 이르도록 하겠다. 사물의 실상은 세간이나 중생이나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듯이 나의 선(善)의 힘도 모든 처소, 모든 지역, 모든 나라에 이르러 두루두루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 도달하여 그곳으로부터 부처님에게 공양하겠다’이다.
이른바 환경, 생태계 문제의 회향이다. 매우 중요하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주역의 괘인 ‘坤爲地’는 우선 이중적이다. 우주생명학적 가치관과 땅을 매우 낮추어 보는 의미가 함께 작용하는 자체 한계를 제 안에 애당초부터 가진다. 여기에 비해 정역은 이를 중생의 ‘십일일언(十一一言)’에 대한 철저한 반려로서의 ‘십오존공(十五尊空)’으로, 나아가 ‘포오함육(包五含六)’과 ‘십퇴일진(十退一進)’의 우주론과 대개벽으로 풀어서 그 공덕이 무량한 것으로 높이 들어올린다.

천부역은 이때 ‘지일이(地一二)’, ‘땅은 하나이면서 둘이다’의 뜻으로 물질로서의 땅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으로서의 영적 생명력, 즉 처소이자 중생 부처님으로 본다. 이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가장 눈부신 영역인 ‘묘덕원만신(妙德圓滿神)’에서 ‘부처님 배꼽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생명력의 씨앗과 빛’, 즉 ‘수생장(受生藏)’, ‘수생등(受生燈)’에 그대로 연결된다.

이 부분은 현대에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 서구 생태학과 녹색당이 이미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그 원인이 바로 ‘객관적 관찰의 체계’를 못 벗어나는 생태학과 녹색당의 ‘영적고갈’에 있고 그들이 지금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바로 그 까닭이 ‘화엄불교의 영성에 토대한 동아시아의 변혁적 생명학’의 가능성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바로 이 네 번째 회향은 앞으로 전 인류와 온 중생 만물을 오염과 혼돈으로부터 해방할 귀중한 보석 같은 한 화살(一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매 벽암록이 제56칙 공안 ‘흠산일촉(欽山一鏃)’에서 ‘한 화살이 세 관문을 뚫는다(一鏃破三關)’고 한 말은 다름 아닌 현대 생태관련의 대 오류인 ‘원자력 대체 에너지론과 지속가능적 발전의 경제학’, ‘친환경·저탄소 녹색성장 및 녹색운동론’, ‘유전자 결정론이나 중추신경계 온 생명론 따위에 의한 에코·파씨슴’ 등 세 가지의 좌·우·중간의 악마적 경향들을 손가락질한 것임을 우리는 똑똑히 알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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