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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9. 당파·겹당파, 십회향의 대안 ③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 바탕한 한반도 중심의 신문명 창조 가 ‘진여’

 
삽화=김지하

일곱째 십회향. ‘평등하게 일체중생에 따르는 회향.’ 여섯째의 ‘평등에 따르는 공덕의 회향’과 일곱째의 ‘평등하게 일체중생에 따르는 회향’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元曉·‘似然 ‘非然’’)
주역의 괘는 ‘물·바람의 우물(水風井)’이요 정역은 ‘改邑不改井(읍치는 바꿔도 우물은 못 바꾼다)’이다. 등탑은 ‘南離北坎(남쪽의 빛 괘이고 북쪽의 그늘 괘)’에 ‘西北巽 東南震(중국바람·일본 우레)’이고 천부는 ‘無匱化三(가두지 않으면 셋이 다 조화한다)’이며 벽암록은 제66칙 공안 ‘(암두선사의 칼)’이다.

‘水風井’의 괘상은 바람이 아래에 있고 물 그늘이 위에 있다. 등탑에서는 중국이 바람(巽)이고 북한은 물그늘(坎)이다.
둘 다 공산주의 국가다. 그러나 둘 다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통치권력 중심의 옛 선천(先天)체제다. 그들은 서로 매우 가깝다. ‘우물’은 그들의 오직 그들만이 자부하는 기괴한 소수 독점적 상호경제 틀의 이름이다. 그런데도 이정호의 ‘주역정의(주역을 정역의 틀 안에서 재해석한 책)’에서는 바로 그 기괴한 우물을 ‘정치체제(읍치)는 바꿔도 결코 바꿀수 없는 꿀단지’로 표현하고 있다. 기이한 일이다. 중국과 북한의 ‘우물’에는 후천개벽이 지나가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그 ‘우물’은 내내 밑을 받치는 바람이 위에 있는 물을 가지고 내내 흔드는 것인가?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이정호 정역학의 시대적 한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중국 중독, 유학 중독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북한에 주체적 후천개벽의
독특한 민주적 정치전통과
호혜경제체제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지난해 ‘촛불, 바람소리냐 비냐-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라는 강연을 통해 북한의 ‘우물’이 어차피 북미관계 개선과정에서 ‘읍치’보다 더 먼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며 그 때에 이른바 ‘읍치’에 해당하는 주체사상과 수령관 자체가 동학적인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교차생성적 타자관을 보강하고 육임제(六任制) 중의 ‘도집(都執)-집강(執綱)-’ 체제론 민주집중화하며 군중노선도 ‘삼불입(三不入)’과 ‘마당 포덕(布德)’의 탄력적 ‘개폐(開閉)’구조의 과도행태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바 있다.

물론 ‘과도’다. 중요한 것은 북한에 중국에는 아예 없는 주체적 후천개벽의 독특한 민주주의적인 정치전통과 그 나름의 오랜 호혜경제체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다름아닌 남한의 화엄개벽지향이라는 빛(離)과 ‘다물(多勿)’의 신시적 음개벽에 마주한 그늘(坎)과 ‘불함(不咸)’의 ‘습감주경(習坎主敬·여성성을 존중하는 바이칼의 환인계 전통)’의 가능성인 것이다. 이 또한 ‘가능성’의 영역이다.

이제 다가오고 있는 ‘평등하게 일체중생에 따르는 회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중생’이 이른바 ‘산업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 노동운동이나 전체주의적 당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프랑스 68혁명 이후 신좌익 일반이든 네그리·하트의 자율운동이든, 이제는 일본공산당이나 유럽의 그것마저도 여성과 어린이와 비정규직 등 쓸쓸한 대중을 포함한 광범위한 ‘다중(multitude)’이지 좁은 차원의 민중이 아니다. 더욱이 진취적 생태학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한 일체존재를 다같이 거룩한 우주공동주체로 드높이는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아니면 현금의 지구 대혼돈을 극복할 길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하는 형편이다.

나는 이쯔음에서 천부역의 ‘가두지 않으면 셋이 다 조화를 발한다(無匱化三)’라는 ‘묘연(妙衍)’의 귀신같은 그 예언적 섬광을 큰 놀라움과 함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셋(三)’이 무엇인가?

하나는 북한의 옛부터 ‘남남북녀(南男北女)’로 유명한 그 드센 여성 파워이고 둘은 우리가 그동안 참으로 안타깝게, 아니 좀 못난 사람들 쯤으로 차라리 낮춰 보아왔던 북한의 소수 당핵심 이외의 각계각층 대중일체의 그 지독한 인내력 속에서 바야흐로 이제부터 터져나올 위대한 창조력의 가능성이며 셋은 나로서는 지금 확인할 길 없으나, 내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이른바 주체노선 이후의 그 잘했던 못했던 간에 주체적이었던 민족사상, 민족과학, 민중의료 등, 매우 제한된 차원에서나마 전통적인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흔적을 붙들고 애써온 주체 지식인들-예컨데 내가 그리도 높이 존경하는 김봉한(金鳳漢) 같은 이들-이 이제 바야흐로 그 감춰진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조건은 무엇인가? ‘무궤(無匱)’다. ‘가두지만 않으면’이다. 틀렸는가?

어차피 지난회에도 썼듯이 한반도와 동아시아·태평양의 신문명은 천부역의 ‘일적십거(一積十鉅)’가 보여주는 ‘호혜 교환을 위한 축적순환과 환류시스템’이라는 최신·최상의 옛 신시부활의 경제체제를 ‘화엄경적인 십무극(十無極) 개벽 구조’로 밀고가게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그때 ‘무궤’는 원효의 ‘무애(無碍)’처럼 무궁무극한 화엄개벽시대의 최전선에 바로 그 북한의 흰 그늘, 그 ‘검은 그늘 속에 잠자던 흰 빛’인 ‘셋’을 크게 들어올리게 되어있다. 누가 그 셋을 ‘천지인’이라 추상화한다해도 대세엔 크게 지장이 없다.
이른바 김봉한의 ‘복승(複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솟구쳐 일어서는 ‘셋’을 두고 다시 살아온다면 김봉한은 역시 위대한 ‘산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인가?
벽암록 제66칙 공안 ‘암두작화’에서 ‘황소의 난’이 지난 뒤 살육으로부터 해방된 그 ‘칼’을 둘러싼 중생의 무서운 부처의 힘을 크게 상찬한 암두선사의 너털웃음, 설봉선사의 매30대, 설두선사의 느긋한 노래가 바로 기막힌 ‘산알예찬’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참으로 ‘평등하게 일체중생에 따르는 회향’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일 수 있단 말인가!
여덟째 십회향 ‘진여(眞如)의 실상으로 향한 회향’이다.
이 부분은 참 어렵다. ‘진리 파지의 길’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구호나 구원이나 경제회생 따위의 기초차원에 머물 수 없는 무언가 본격적인 노력 없이는 안되는 영역, 그래서 진여의 실상에로의 회향이다. 근대 이후 일본이 부딛친 그 나름의 화엄, 그 나름의 개벽과 그 나름의 모심의 어려움이겠다. 우선 주역은 이에 ‘바람(巽)’으로 대답한다. 바람, 그 괘는 ‘巽爲風’이니 위아래가 모두 바람이다. 바람은 어디든지 들어간다. 바람은 허파에도 들어간다. 바람은 늘 샛바람이다. 돈이 생기거나 이로운 일,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바람이 일어나고 스며든다. 일본의 한 특징이다. 중요한 것은 바람이 위아래 다 있다는 점이다. 위아래는 중요한 통괄이다.

첫 괘사가 벌써 시비쪼다.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소형이유유왕 이견대인·조금은 형통한다. 갈바 있음에 이롭고 대인을 봄이 이롭다)
재작년 중앙아시아 여행에서 나는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의 제팬·파운데이션이 있음을 보고 바로 이 괘사의 앞부분을 생각했다. 그들은 돈의 방향을 정확히 냄새 맡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괘에는 ‘田獲三品’이란 이상한 말이 나온다. 소인기질을 물리치고 군자의 큰 뜻을 품으면 ‘先庚三日 後庚三日’과 같은 거대한 개벽적 변동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大人’이 누구일까?

주역에서 ‘바람’인 일본은 개벽역인 정역에서도 역시 ‘바람’이다. 기이한 일이다. ‘先庚三日 後庚三日’의 경우 크게 살아남는 운수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인가? 그럼 문제는 ‘大人’에 있다. 大人이 누구인가? 일본의 ‘大人’이 밝혀지면 나의 10년 전 해운대 등탑암의 허공계시인 일본의 ‘우레(震)’가 해명되는 셈이다. 그냥 우연이 아니라 일본의 앞날에 ‘大人’의 ‘우레’는 필연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바로 그것이 거듭된 ‘바람(巽)’의 운명 밑에서 ‘우레(震)’를 복승(複勝)시키는 비밀일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진여(眞如)’다.

그래서 ‘진리 파지의 길’이라 한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천부역에 물어보자. 천부역은 이 경우 ‘天二三’으로 대답한다. ‘하늘은 둘이면서 셋이다’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天’ 즉 ‘하늘’은 ‘진여’요 ‘진리’이겠지만 그 다음의 ‘二三’, ‘둘’과 ‘셋’은 무엇일까?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 54년 체제가 끝나고 민주당이 승리했다. 민주당은 야스쿠니 국수주의의 후퇴, 동아시아 공동체의 급추진, 탈미입아(脫美入亞), 새로운 경제개혁을 약속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어려운 과제를 그들 자신이 떠 안은 셈이다.

日 학자 역시 일본의 구원이
문화혁명에 있고, 그 소식은
한반도에서 올 것이라 강조

첫째, 미국을 떠나 아시아로 들어오겠다는 그들의 각오가 이미 둘이면서 셋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게 하겠지만 그렇게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나는 것은 미국의 ‘둘’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과 군사적 제패라는 이원적 적대의 틀이고 그들이 못떠나는 것은 오바마 리더십과 월가가 추진하는 새로운 세계경제의 틀, 좌도 우도 중간도 아니면서 그 세 흐름을 절충(아직은 그렇다) 하면서 어떤 차원에서는 아시아 고대의 신시부활에로 약간 근접하는 ‘셋’의 공생사회를 향한 신문명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이 내내 일본에 기대했던 아시아사상의 서양화, 서양문명의 아시아화 비전에서 일본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접근했던 것이 ‘셋’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유물변증법(19세기 이후의 왕성한 일본 진보주의)’이었던 데에 반해 서양과 동양 사이의 ‘둘’을 근원적으로 융합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극단적 적대주의의 짝퉁으로 저급화시킨 문명사적 책임과 부채의식이 진리파지의 골치꺼리로 남은 점.

셋째, 일본의 수리과학, 신경정신계통의 동서융합적 기초과학, 그리고 우주생명학적 소통에 관한 창의적 발상 영역 등은 매우 발전해 있다. 그중의 한 영역이 ‘창조적 발상지원 시스템’인 콘셉터 구상과 ‘산성(酸性) 쎈트라우볼’을 비롯한 분자생물학, 그리고 우주소통 기능과 관련한 관념수학의 발전이다. 이것이 모두 우주생명학적인 ‘둘’과 ‘셋’의 동아시아적 균형적 역동, 혼돈적 질서 원리의 확장결과다.
앞으로 미국 뇌과학이 멈칫하고 있는 신경컴퓨터와 영성컴퓨터, 그리고 자기들의 곤셉터를 복합하는 우주생명적 소통 수학으로 천부역의 ‘9×9=81’이라는 신비로운 우주수의 비밀을 한국의 오역수학(五易數學)과의 협조하에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잔재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역화엄경의 선적 모심으로서의 진리 파지의 피나는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넷째, 아시아에로 돌아온다는 말의 문제점이다. 돌아온다는 말 그 자체가 엉터리다. 아시아는 침묵의 땅이 아니다. 제 멋대로 들어오고 나가는 문명의 옛 관광지가 아니다.
작년말 금융위기 직후 후꾸오까에서 열린 새 경제틀을 찾는 아시아 민중의 호혜교환 심포지움에서 내가 제안한 아시아 고대의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신시 시스템에 대해 쉽사리 접근 못할 만큼 전멱적으로 서구화되어 있었다.
앞으로 한국의 흰 그늘의 아시안 네오·르네상스, 모심의 문화혁명, 대화엄개벽의 물결이 뿜어내는 결정적 유도력을 정중히 모시지 않으면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또한 ‘둘’과 ‘셋’이다. 까닭은 생각해보면 금방 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일본의 현자 ‘쓰루미슌스케(鶴見俊輔)’ 선생은 일본의 구원은 문화혁명에 있고 그 주체는 여성이며 그 새로운 문화의 소식은 한반도로부터 온다고 거듭거듭 주장한다. 나라(奈良) 교오또(東都) 백제문화 도래시대의 창조적 반복인 것이다.
일본의 여성학대는 자고로 유명하다. 내 눈에 일본의 ‘둘’ 즉 치명적인 드러난 차원은 남녀의 상극이다.

그러면 ‘셋’은 무엇인가? 그 드러난 차원 밑에 숨어서 발전하고 있는 ‘욘사마’ 이후 반도로부터의 소식인 그 ‘흰 그늘’이 어느날 문득 ‘복승’하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 일본의 ‘산알’이다.
이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벽암록 제68칙 공안 ‘慧寂慧然’은 가르친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혜적입니다.’
‘혜적은 내 이름이다.’
‘그러면 제 이름은 혜연입니다.’
이에 앙산 선사께서 껄껄 크게 웃으셨다.”
이를 두고 설두 선사는 노래가운데서 한마디한다.
‘본래부터 범을 탔으니 애 쓸 것이 무어랴’
혜적과 혜연이 도대체 누굴까?

두 사람 이름 앞의 ‘慧’가 무슨 뜻인가? ‘진여’, ‘진리’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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