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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개벽모심의 길] 11. 화엄의 큰 뜻은 꽃보다는 장엄에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개벽의 길 바탕은 초발심보살공덕품

 
삽화=김지하

나는 이 글 전체에서 ‘꽃’ 보다는 그 꽃을 피우는 노력의 ‘과정’에 별이 떠 비추기를 기대했다.
사실 화엄의 큰 뜻은 ‘꽃’ 보다는 ‘장엄’에 있는 듯 하다. 천삼백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이 사실 꽃을 위한 장엄의 시간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꽃보다는 장엄이 더욱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왜 이런 표현을 써야 하는 것일까?

한민족은 그 긴 세월 내내 화엄을 위한 참으로 개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천신만고의 대전환을 꿈꾸고 더듬어 온 역사의 주인공이다. 신라와 고려는 물론이지만 이후 이조 500년에까지도 내내 비밀불교 당취와 우뚝한 여러 큰스님과 절집들이 그러했으며 19세기 서세동점과 국권상실기에 마저도 개벽중심의 남조선 사상사의 근본흐름을 여전히, 아니 더욱더 치열하게 지배해왔다.

민족은 왜 이러한 힘든 장엄의 길을 걸어온 것일까? 민족은, 비록 작고 가난한 국토일망정 그 타고난 재능과 비범한 우주적 향심으로 왜 한번도 화려한 꽃시절을 탐하지 않은채 꿋꿋이 그 험난한 장엄의 행진을 계속해온 것일까?
간다하라지역 민속지 ‘헤라볼로이타이의 불꽃같은 별’에 다음의 글귀가 보인다.

“10세기경의 간다하라 전설에 ‘어느날 화엄주불 비로자나의 입이 열리는 날 세계는 하늘과 땅과 사람은 물론 바닷물 밑에서까지 꽃들이 피어나는 천지개벽의 새로운 창조의 날을 맞이하게 되리라’ 라는 깊은 파미르산맥 속 한 나뭇꾼의 예언이 열 여섯 개의 마을-서로 호혜계(互惠契)를 묻은-에 수 백년을 전해 내려왔다고 돼 있다.”

문제는 ‘화엄주불 비로자나의 입이 열리는 날’이란 부분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비로자나 부처도 말을 하는가?
그렇다면 저 대방광불화엄경의 장대한 침묵의 숨은 뜻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 숨은 뜻이 열린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한 전설에 불과한가?
또 하나의 문제는 ‘천지개벽의 새로운 창조의 날’이다.

우리는 이제껏 현금의 전 인류문명사의 대변동과 지구대혼돈을 바로 후천개벽으로 확신하고 바로 그날에 인류사 최대최고의 희망인 대화엄의 세계, 해인삼매가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날에 비로자나부처의 대침묵이 새로운 가르침으로 바뀐다는 말인가?
비로자나의 침묵이 입을 여는 것이 화엄개벽이란 말인가?
이 민족이 혹시는 바로 이날을 기다려왔던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비로자나의 그 새로운 말씀은 화엄법신선에서 보아왔던 것 같은 정신적인 몸, ‘산알’은 아닐까? 하나의 신문명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한민족은 긴 세월 화엄을 위한
참 개벽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대전환을 꿈꿔온 역사의 주인공

나는 이쯔음에서 지난회까지 십회향공부에서 다루어왔던 북한, 일본, 중국, 미국과 생태계 등에 연관된, 크게 보아 천지인(天地人) 모두를 그야말로 화엄개벽하는(결코 ‘통합’이나 ‘세계일화(世界一花)’ 따위가 아닌) ‘대삼합(大三合)’이 바로 이 한민족, 한반도의 오늘날의 시대정신, 시대적 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복희역, 주역, 정역, 등탑역을 모두 오역(五易)으로 융합하는 천부역의 한 묘연(妙衍)이다.

루돌프·슈타이너와 그의 제자 다까하시·이와오(高橋巖)는 인류문명사의 대전환기에는 반드시 다가오는 새시대인류의 새 삶의 아키타잎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그 민족은 옛 이스라엘에 이어 이제는 한민족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976회의 외국침략에 짓밟히면서도 그리도 질기게 꽃을, 그것도 한송이 꽃이 아닌 온 인류, 온 중생, 온 개인들의 수수억천만 송이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기 위해 그리도 열심히 장엄해온 이 민족의 현대·초현대적 성배의 소명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바로 그 운명이 다름아닌 ‘대삼합(大三合)’이다. 그리고 그 소명이 곧 ‘화엄개벽의 모심’일 것이다.
천부역은 ‘대삼합(大三合)’에 이어 ‘육생칠팔구운(六生七八九運·여섯이 살아 생동하니 일곱, 여덟, 아홉 운수가 개벽한다)’을 열고 나온다.
주역은 이에 마지막 64괘 ‘화수미제(火水未濟·불과 물이 아직 융합되지 않은)’로 정역은 이에 ‘유부우음주(有孚于飮酒·술자리에서 마음을 조심하다)’로 등탑은 ‘남이북감(南離北坎·남쪽의 흰 빛과 북쪽의 검은 그늘)’의 ‘흰 그늘’로 대답한다.

모두 다 ‘미완성이요 이제 시작이지만 무궁무진 무한대의 개방적 가능성이니 도리어 멋진 술자리에서 마음을 조심하고 민족 내부 문제나 문화와 전통에 대해서는 늘 ‘흰 그늘’로 남북사이의 신비로운 미래를 잊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이 바탕에서 화엄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바로 ‘초발심보살공덕품’이다.

시커먼 고통중에 있되 그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쌔하얀 해방의 길을 찾는 첫 마음이다. 초발심보살공덕품에서 가장 중요한 씨앗은 역시 ‘모심’이고 그 모심은 흰 그늘로부터 시작되는 ‘가만히 좋아하는’ 자제된 열정이며 그 열정은 ‘기위친정(己位親政)’ 즉 ‘밑바닥이 임금자리에 되돌아 감’이라는 후천개벽의 대전환점에서 수백만 꽃송이가 수백만가지 서로 다른 모양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자유스럽게 피어나는 대화엄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대화엄을 조그맣게라도 실천하는 최근 시청 앞 광장의 여성과 어린이들과 쓸쓸한 대중의 촛불에서 가장 영롱하게 배어난바 있다.

그들의 고즈넉한 결심과 다소곳한 행동,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사수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잔잔한 미소와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의 합의의 정신을 잃지 않으며 가장 기초적인 생활과 생명과 영성의 결코 속일 수 없는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그 어떤 장애나 폭력이나 좌절아래서도 포기할 수 없는 고결한 정신으로 끝끝내 명령자도 조직도 책임자도 강압적 요구도 없이 첫 열정과 향심 속의 영적 생명의 모심을 끝끝내 밀고 나간 그들의 첫 한달 여의 집단행동 속에서 우리는 한반도에 주어진 ‘대삼합(大三合)’이라는 이름의 ‘성배’, 그 ‘화엄개벽모심’이라는 새 시대 새 삶의 아카타잎을 감격 속에서 발견한다.

기이하게도 바로 이 초발심 영역의 ‘대삼합(大三合)’에서 주역도 정역도 등탑도 천부역도 모두다 그 깊은 뜻이 일치 융합함을 이상스런 감동 속에서 발견한다.
이 발견의 내용이 곧 ‘육생칠팔구운(六生七八九運·여섯이 살아 생동하니 일곱, 여덟, 아홉 운수가 개벽한다)’이다.

‘여섯의 살아 생동함’이 주역의 천하통일의 상징인 ‘오황극(五皇極)’의 그 ‘다섯’, 즉 선천(先天)의 정치균형체제까지도 벗어 던진 불확정수인 ‘여섯’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당대(唐代) 운문(雲門) 선사의 화엄법신(華嚴法身)관인 ‘육불수(六不收)’를 재확인한다. 바로 이 ‘육불수’의 거침없음이 생동(화수미제·火水未濟)할 때 비로서 ‘일곱, 여덟, 아홉 운수가 개벽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동아시아 신비수학인 ‘술수탐비(術數探秘)’ 안에서는 ‘체제(일곱), 과학(여덟), 우주질서(아홉)’이고 당대 화엄종 법장(法藏)의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에서는 ‘금강삼매(일곱), 해인삼매(여덟), 용화회상(아홉)’이다. 이것이 모두 개벽하니 참으로 대화엄이 현실화 하는 것이겠다.
초발심의 공덕이, 촛불의 씨앗이, 그리고 이제부터의 화엄개벽모심의 흰 그늘의 초발심보살의 공덕이 이리 대단한 것이다.
또 발견한다.

로사나품(盧舍那品) 열군데에 제시된 화엄선의 최종 해탈문인 비로자나 부처의 그 광활하고 고요한 지혜의 세계를 6월초에 이어 7월초에 시청 앞 광장에서 새 촛불을 켜든 불교승가회 스님들의 집단 선에서, 그리고 이어 8월 27일 시청 앞 범불교도대회에서 또 발견한다.

한없는 인연에 의해 성립되는 세계바다를, 그 신통과 진여를, 하나 하나의 세계바다가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의지되고 성립함을, 혹은 둥글고 혹은 네모나고 혹은 세모나며 혹은 팔각이거나 혹은 물결치거나 혹은 꽃 모양 같은 자유자재하고 무량한, 유전(流轉)하며 또한 불가사의한, 하나의 털구멍 안에서도 무량한 부처님 나라가 장엄하는 그 인연들의 모든 세계 바다를 발견한다.

그리고 세계 바다의 여러 가지 몸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력의 장엄들, 온갖 청정한 방편들, 무수무수한 부처님의 진리들이 우리 귀 안에 들어오고 그 하나 하나의 세계바다마다에서 저마다 다른 세계의 시간들이 물결치고 있음이 우리 눈에 놀랍게도 거듭거듭 발견되고, 또 온갖 번뇌에 의해 이리저리 변화하는 중생과 보살의 모습들, 그리고 드디어는 일체차별이 없는 넓고 넓은 한 바다같은 생명의 저 큰 세계를 드디어 우리는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이 긴 시간에, 그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화엄의 시절에 끊임없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애써 사람을 모시고 고통을 참아내는 여러분들의 그야말로 ‘꽃 아닌 장엄’의 그 어둑어둑한, 그러나 그 속에 살며시 피어나던 흰빛들의 괴로운 기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화엄경의 십지품은 온 인류와
만중생의 화엄개벽 모심의 길
그 자체의 이정표들이 될 것

천부역의 묘연은 이에 대해 ‘삼사성환오칠일(三四成環五七一·셋과 넷이 동그라미를 이루고 다섯과 일곱이 하나가 된다)’로 대답한다.
무슨 뜻인가?

‘셋’은 ‘여각(旅閣)’이니 바로 장자(莊子)의 ‘역려(逆旅)’라! 원자핵 둘레의 쉴새없는 움직임으로 도리어 우주중심을 잠정적으로나마 유지하는 소립자장(素粒子場)의 상징수이니 원효의 ‘생멸문(生滅門)’이요 한국전통음율의 삼음보(三音步) 즉 ‘여율(呂律)’이고 혼돈(混沌)이다. ‘넷’은 뒷등에 반드시 백운과 청산이 있는 ‘가람(伽欖)’이니 이는 또다시 장자의 ‘좌망(坐忘)’이라!

현대 동력학(動力學)에서 움직이되 선형(線形)이 아닌 사방팔방으로 확산·환류하는 에너지 시스템의 표기수치다. 원효의 ‘진여문(眞如門)’이요 한국전통음률의 사음보(四音步) 즉 ‘율려(律呂)’이고 균형이다.
이러한 셋과 넷이 동그라미, 반지, 일원상(一圓相)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원만중도’일 것이다. 좋다. 그러나 그 다음은 무섭다.

‘다섯’은 ‘귀신(鬼神)’이고 ‘일곱’은 ‘신명(神明)’인데 이 둘이 융합하여 이른바 ‘부처를 이룸’의 ‘하나(一)’가 되었으니 오죽이나 무서운가!
움직이는 일원상 법신불이니 화엄이요 ‘귀(鬼)’ 즉, ‘일태극(一太極)’과 ‘신(神)’ 즉 ‘오황극(五皇極)’과 ‘불(佛)’ 즉 ‘십무극(十无極)’을 다 이루었으니 아마도 개벽이다. 무섭지 않은가?

나는 ‘대삼합(大三合)’의 ‘초발심보살공덕품’과 ‘로나사품’ 단계에서 정역 개벽학 용어로는 ‘십일일언’의 ‘기위친정’과 ‘십오일언’의 ‘무위존공’이 융합하는 ‘삼팔동궁(三八同宮)’으로 들어가는 화엄개벽 모심의 선(禪), 민족전체가 이웃중생 및 만물과 함께 치열한 ‘개벽선(開闢禪)’으로 필연코 들어갈 것이고 또 지금 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 과정은 반드시 ‘십지품(十地品)’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부처의 오묘하고 심오하고 숭고하면서 넓고 다양한 경지를 지나지 않고 어찌 생동하는 법신불에 이르며 마구니까지도 제 안에 승복한 신불(神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당연히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는 그리하여 도리어 우리민족 모두와 함께 동아시아 태평양, 나아가 온세계 인류와 만물중생의 대화엄개벽모심의 길 그 자체의 이정표들이 되지 않겠는가!

한반도의 괘상은 변함없이 ‘간(艮)’이요 산이니 바로 ‘그침(止)’이라 언뜻 꽉 막혔으나 동시에 모든 것을 근본에서 새로이 시작함이다. 그래서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종만물 시만물 막성호간(終万物 始万物 莫盛乎艮·만물이 끝나고 만물이 새로이 시작하는 개벽은 간방(한반도)보다 더 치열한 곳이 없음)’이라 썼다. 역괘는 마지막 직전의 63괘 ‘수화기제(水火旣濟)’이니 대융합의 완성이니 도로 ‘대삼합(大三合)’이다. 정역은 이를 ‘초길종란(初吉終亂·처음엔 좋으나 뒤는 어지럽다)’이라 풀었다.

즉 ‘기제(旣濟) 이지만 동시에 미제(未濟)’란 뜻이다. 개벽이 종말을 동반하는 까닭일 것이고 그러므로 유학의 개벽역(開闢易)으로 모자라 거기 오래전부터 우주태평의 해인삼매, 용화회상의 화엄개벽이 곁들인 것 아닌가! 거기에 근현대에는 치열한 실천적 모심이 뒤따라 붙는 게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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