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남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가 며칠 간격을 두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자 태국도 매우 불안해졌습니다. 국경 주변에는 공산주의 활동가들과 동조자들이 나라밖에서 무기를 조달하여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고, 산악지역의 가난한 사람들도 동조하고 있었으며, 총명한 태국 대학생들이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지원하기 위해 정글로 몰려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정부의 관리와 군 고위장성들은 당시 태국에서 정신적인 의지처였던 아잔 차 스님에게 끝없이 조언을 구하였고 숙고 끝에 태국 정부는 세 가지 원칙으로 반란군에 맞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째, ‘자제’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기지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알고 있었음에도 군부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용서’입니다. 적절할 때마다 수차례에 걸쳐 무조건적인 사면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 반란군 중 누구라도 전향하기를 원하면 그는 그저 무기를 버리고 자신의 고향이나 대학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감시 정도는 받았을지 모르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근본적인 문제 해결’입니다. 피를 말리는 대치상황 속에서도 게릴라 지역에서는 새 도로가 건설되고 낡은 길들이 재포장되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확물을 도시에 내다팔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태국 왕이 직접 나서서 수백 개의 작은 저수지들과 관계수로들을 건설하고 그 비용을 대자 농민들은 이모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외딴 마을까지 전기가 들어가고 학교와 진료소가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산악지역과 정글의 주민들은 정부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 당국의 무능하고 공평치 못한 정책에 분노하여 젊은 목숨도 기꺼이 내던질 각오로 무장했던 반란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인내와 자제는 저 분노에 찬 사람들이 총을 어디에 겨눠야 할지 방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게릴라들은 하나둘 총을 버리고 가정으로 사회로 대학으로 돌아갔고, 그리하여 1980년대 초에는 반란군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란군 지도자들 중에는 장관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태국에서 ‘풋중 생활’을 하고 있던 호주인 스님 아잔 브라흐마는 이 당시를 자세하게 들려주면서 이렇게 힘주어 말합니다.
“이것은 실화이며, 나는 이 이야기를 그 당시 태국 북동부 시골사람들과 병사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이런 기사는 어떤 매체에도 보도되지 않았다.”(109-110쪽)
분노는 한 나라의 체제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려 위험을 무사히 건너온 아주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