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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길가는 사람 붙잡고라도 물어라

기자명 법보신문

『북학의』/박제가 지음/박정주 옮김/서해문집/2003

북학파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서명응은 박제가를 ‘기이한 선비’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오가는 길에 보고 들은 것들을 단 한 가지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았으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꼼꼼하게 물어서 기록을 남겼다. 관심 분야가 넓고 깊은데다가 호기심도 대단하여, 북경에서는 각 지역의 여자 옷을 수집하려고 하다 돈이 떨어져 사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던 적도 있다.

연암 박지원이 추천사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묻는 것이 옳다. 비록 하인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우선은 그에게 배워야 한다.…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 말을 그대로 실천했던 사람이 박제가였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이런 관심은 개인적인 호사가 취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수레가 널리 쓰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화물을 모두 등짐이나 지게로 나르는 것을 보고 한탄하는 것은, (물류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전국 물가가 고르지 못하고 지역에 따라 생활필수품 수급의 불균형이 심각한 것·중국을 왕복하는 수만 리 사신 행렬을 걸어서 오가는 것 등)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요즈음 중국에서 우리나라 자동차·조선·전자 기술을 빼내가는 것 때문에 비상이 걸리기도 하는데, 박제가도 “만약 중국 배가 표류하여 해안 마을에 정박하면 반드시 그 배의 구조와 기타 여러 가지 기술을 자세히 물어서 솜씨 좋은 기술자로 하여금 그대로 만들도록 해야 한다. 표류해 온 배를 모방해서 배 만드는 법을 배우거나 표류해 온 사람이 머무는 동안 잘 접대하여 그들의 기술을 다 배운 후에 돌려보내도 괜찮을 것이다”라면서 ‘해외 기술 빼오기’를 적극 주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북학의』를 읽다보면,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가 박제가에게는 결코 벗기 어려운 굴레였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득이 될 것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 “중국 것은 모두 좋다”는 생각이 너무 깊게 깔려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가깝고 성음(聲音)도 비슷하다. 따라서 백성 전체가 본국의 말을 버린다 해서 안 될 이유가 없다. 그래야만 오랑캐라는 말을 면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주장에 이르면, 심지어 국문학과 국악 전공과목까지 영어 강의를 강요하는 요즈음 교육 당국자들이나 일부 숭미(崇美)주의자들도 혹 “우리의 말을 버려야 오랑캐를 면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박제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다.
 
이병두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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