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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에서 만난 허운대사] ⑤계족산 가섭전사와 금정사

기자명 법보신문

“계정혜 부지런히 닦고 탐진치 소멸하라”

 
계족산 금정사 입구. 금정사는 계족산 최고봉인 천주봉 해발 3240m에 위치한다.

계족산(鷄足山) 축성사(祝聖寺) 아침 공양시간은 7시 30분이다. 오늘은 아침을 먹자마자 계족산 정상을 등반해야 한다. 계족산의 최고 봉우리에 위치한 가섭전사와 금정사 참배에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모르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허운대사가 운남성(雲南省) 계족산에 처음 온 목적이 가섭전의 가섭존자를 친견코자 했던 것이니 힘들어도 꼭 가야할 일이다. 산길을 걸으면서 스님이 만년에 불사했던 사찰들을 떠올렸다.

허운 스님(1840~1959)이 19세에 출가했던 복건성(福建省) 용천사(涌泉寺)는 1920년대 군벌할거로 인해 절이 완전히 타락했다. 당시 양반 자제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도첩을 사서 용천사에는 몇 백 명의 대중이 살고 있었다. 게다가 절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군벌에게 뺏기다보니 청정한 용천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용천사가 위기에 처하자 승려들의 권고와 복건성 관리들의 요청이 잇따랐고, 결국 1929년 90세의 허운은 운남성 화정사에서 용천사로 옮겨 갔다.

스님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계율 정돈이었다. 도첩으로 승려가 된 사람을 용천사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당시 율사로 알려진 문질(文質)화상을 청해 계를 주었다. 또한 불교학에 뛰어난 승려와 학자를 불러 강좌를 열었고, 어느 사찰에나 그랬던 것처럼 대장경을 모아 비치했다. 용천사의 종맥(宗脈)을 정리하고, 절판된 경본들을 정리 보수했으며 일본에서 가져온 대정장(大正藏)과 불교서적을 장경실에 보관했다.

또한 스님은 사찰 생산의 잉여물이나 공양물을 정부에 내어 놓았고, 고산(鼓山)에 죽 배급소와 무료 의료실, 약국을 열어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스님이 용천사에 상주한 이래로 대중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군벌들의 곡식 수탈이 없어 그 많은 승려들이 살 수 있었다. 스님에 관해 최초로 『허운화상 연보(年譜)』를 만든 잠학려 거사가 이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 동북의 군벌인 장학량과 뜻이 맞지 않아 떠나던 중 용천사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90세가 넘는 도인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경치도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하며 용천사를 찾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 거기에 일본 침략까지 이어지면서 사찰이 파괴되고 먹을 게 부족해 스님들마저 절을 떠나는 세상이었는데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생사에 초탈한 1500여 명의 스님들이 죽 한 그릇에 생사를 건 정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한 분의 노승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직감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놀라운 것은 한 사람의 원력으로 지옥처럼 타락한 곳이 극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1935년 95세의 허운은 광동성(廣東省) 관리인으로부터 전보를 하나 받게 되는데, ‘소관(韶關) 남화사(南華寺)가 무너지고 법맥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스님께서 절을 중건해 달라’는 것이다. 남화사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이 주석하던 절이요, 중국의 대선사인 혜능, 감산(憨山), 단전(丹田)의 육신상이 모셔진 동아시아 선종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전쟁 중에도 1500대중과 정진

 
금정사 금전과 능엄탑. 15세기 명나라 때 창건된 금정사는 사원 전체가 청동으로 지어져 금전(金殿)이라고 불린다.

허운은 선종 승려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용천사에서 남화사로 옮겨갔다. 스님이 남화사로 가보니 혜능 육신상은 파손되어 칠이 벗겨진 채 넘어져 있었고 대웅전, 장경실 등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또 도량은 군인들이 가축을 기르고 있어 악취가 진동했다.

스님은 청규(淸規)를 제정해 승려들의 기강을 세우고, 주변에 암자를 지어 비구니가 머물게 하는 등 분주한 불사를 진행했다. 무엇보다도 절 앞으로 흐르던 조계(曹溪)의 물길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우회하여 북강(北江)으로 흐르도록 만들었는데, 이 물길의 변화는 남화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조계 일대의 농지와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스님께서는 또한 남화사에 상주하면서 『육조단경』이 설해졌던 대감사(大鑑寺)도 함께 중건했다.

하루는 스님께서 남화사 중건 불사금을 난민을 위해 보시하고자 광동성의 이한혼 장군을 찾아갔는데, 장군은 ‘그 돈으로 운문산 대각사(大覺寺)를 중건할 생각은 없느냐?’고 스님께 물었다. 마침 스님도 폐허가 된 대각사를 염려하던 차였다. 대각사는 광동성 유원(乳源)에 위치하는데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이 창건한 절로 운문종(雲門宗)의 근본도량이다.

이런 인연으로 허운은 1943년 103세에 대각사 도량도 정비했다. 1949년 109세가 될 때까지 몇 년간 중국의 혼란한 시기에도 이 어른은 남화사, 대각사, 대감사를 오가며 불사를 완성했고 이런 중에도 승려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9년 사회주의 공산당이 들어선 이래 종교탄압이 시작되었다. 스님이 공산당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스님을 석방했다. 허운은 공산당에 강서성(江西省) 영수현(永水縣) 진여사에 머물기를 요청해 진여사로 옮겨갔다. 운거산(雲居山) 진여사(眞如寺)는 역대 이래 수많은 선사들과 문인들이 수행했던 곳이다. 현재도 농선병행이 일치하는 선방으로 알려져 있으며 승려들이 직접 일구는 차밭이 유명하다. 스님은 선종 5가중 종맥이 끊겼던 위앙종(潙仰宗)을 되살려 진여사를 위앙종 종풍(宗風) 본찰로 만들었다.

진여사는 몇 년 전 추운 2월말 폭설이 내릴 때 찾아갔었다. 운거산에 들어갔다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하산했다가 다음날 고생고생해서 찾아간 곳이다. 절구통 같은 고목을 연상케 하는 선승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참으로 그리운 곳이다.

1954년 114세의 스님은 공산당의 감시에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진여사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1년 뒤 진여사는 스님을 찾아온 사람들로 몇 천 명에 이르렀고, 이들에게 계를 주어 불문에 귀의토록 했다. 또한 자비와 인욕으로 끝까지 맞서며 ‘아미타불’ 염불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공산당의 자아비판 요구에 노승은 “불교를 전파하고 부처님의 자비를 실행하지 못해 부끄럽다. 중생의 고통을 미처 살펴보지 못한 채 늙은 것이 부끄럽고, 지금 화남(華南)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해 모두들 기근에 시달리는데 내가 쇠약하여 도우러 가지 못함이 죄스럽다”고 한숨 지며 눈물을 흘렸다. 1959년 병세가 악화되어 누워서도 제자들에게 불사 걱정을 하였다.

“해회탑(海會塔)은 다 건립되었는가? 지장보살상은 완성되었는가?”
얼마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운 채 입적했다. “계정혜를 부지런히 닦고 탐진치를 소멸하라. 법을 구하기 위해 몸을 잊고 서로를 존중하라. 도량을 보존하고 사원의 청규를 지켜나가는 데는 오직 한 글자로, 바로 계(戒)이다.”

자비와 인욕으로 폭력에 맞서

 
가섭전사 가섭전에 모셔진 가섭존자.

일본의 하쿠인[白隱, 1685~1768]선사는 제자들에게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절대로 주지 살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다. 청정승려였던 하쿠인의 이 말에 속뜻이 담겨 있음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하쿠인의 염려가 허운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인가?! 중생을 향한 자비가 발원된 방편으로 주지소임을 살아야지, 명예를 위해 소임을 살면 헛된 공명만이 떠돌게 된다.

허운의 만년 인생을 생각하며 계족산 정상을 향해 산길을 홀로 걷고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10여명의 가족이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아랫마을에 사는데, 휴일이어서 할머니를 비롯해 손자까지 온가족이 산에 왔다고 한다. 잠시 정자에서 쉬는 동안, 꼬마가 사탕과 빵을 하나 건네준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어린애 눈에 내가 불쌍해 보인 모양이다.

지금이야 계족산 산길이 좋지만, 허운 스님이 가섭전사로 오르던 이 길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축성사에서 출발한지 3시간 만에 가섭전사 산문에 들어섰다. 천주봉(天柱峰) 동쪽 산비탈에 위치한 가섭전사는 계족산 사찰 가운데 종주(宗主)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계족산에 영산일회(靈山一會)라는 편액이 자주 보이는데, 영산회상에서 가섭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절은 가섭이 부처님 가사를 전해 받고 부처님 발우를 들고 2000년 동안 미륵불을 기다리며 수행하고 있다고 해서 얻어진 사찰 이름이다.

가섭존자는 계족산의 상징적인 의미이며 가사전사(袈裟殿寺)라고도 불린다. 명나라 때 잠시 도교사원이었다가 사찰로 바뀌었고, 1691년 청나라 때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되었는데 이듬해 혜문 스님이 사찰을 중건했다.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1992년에 복원되었다. 막상 가섭전사 도량에 들어서니, 가섭전에 가섭존자가 모셔진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이곳저곳 도량을 살피다 미얀마 종이 있어 실수로 건드렸다가 스님께 혼만 났다.

가섭전사 앞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사(金頂寺)에 올랐다. 계족산은 창산(苍山)과 이해(洱海)를 마주하고 뒤로는 금사강(金沙江)이 흐르며 산에는 40개의 봉우리가 있고, 3곳의 절벽 그리고 45곳의 샘터와 개천이 흐른다. 그중 최고봉인 천주봉은 해발 3240m인데 바로 금정사 위치이다.

금정사는 15세기 명나라 때 창건되었으며 사원 전체가 청동으로 지어졌기에 금전(金殿)이라고도 한다. 금전 당우 전체가 금으로 칠해져 있으며 내부와 관음보살까지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지나치게 화려해 거부감이 일어날 정도이다. 금전 뒤편의 능엄탑(楞嚴塔)은 1929년에 불사를 시작해 1934년에 완성된 탑으로 높이 42m, 13층이다.

그런데 가섭전사에서도 뼈저리게 느꼈던 바지만 이 사찰도 마찬가지로 부적이나 점을 쳐주는 곳으로 사찰이 이용되고 있다. 허운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개탄했을 일인가. 실은 축성사 도량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 사찰들의 이런 풍습에 혀를 찰 일이지만, 현 한국불교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한국의 사찰들은 천도재가 많아졌고, 정월달에 부적을 파는 사찰도 더러 있다. 사찰재정이 어려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 문제인가? 일본도 교외 사찰들은 도량 내에 장지들로 가득하다. 일본불교도 장례문화가 발달된 것으로 보이는데, 좋은 현상은 아니다.

최고 봉우리에서 동쪽으로는 아침 해돋이, 서쪽은 산과 바다, 남쪽은 구름, 북쪽은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雪山)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서보니 풍경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 속에 청정치 못한 불교의 앞날이 켜켜이 다가온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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