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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 미얀마] 2. 피비린내 없는 땅 바간

기자명 법보신문

이름 없는 민중의 신심이 천년을 흐르는 탑의 바다

 
수천개의 사원과 파고다가 흩어져 있는 탑의 나라 바간. 1044년 아노라타왕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후 바간은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내일 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4시입니다. 늦지 않도록 준비해주세요.”
미얀마의 관문 양곤에 도착한 첫 날, 밤새도록 아름답게 불을 밝히고 있는 쉐다곤 파고다의 장엄한 모습에 매료되어 잠이 오지 않을까봐 가뜩이나 걱정인데 다음날 스케줄을 알려주는 가이드의 말엔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기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미얀마 국내선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순례의 전 일정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전체 면적은 678,330㎢로 한반도의 약 3.5배, 남한의 6배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크다. 특히 남북의 길이가 총 2,100㎞에 달하고 북쪽은 마름모꼴 이어서 전체적인 국토의 모습은 길게 꼬리가 달린 가오리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긴 나라에 고속도로가 없다는 점이다. 미얀마 군사정부는 경제개발 정책을 비롯해 갖가지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고속도로 건설을 매번 중요한 공약으로 제시하지만 수십 년째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주는 주요 도로라도 포장조차 안 돼 있는 경우가 다반사고 포장이 돼 있더라도 낡고 노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도 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육로를 이용한 순례는 자칫 최악의 ‘고행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도시 간 이동은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얀마 순례의 첫 여정은 바간에서부터 시작하게 됐다. ‘탑의 나라’로 불리는 바간에서 순례의 첫 걸음을 시작한다는 것도 나름 의미가 깊지만 하룻밤 사이에 훌쩍 떠나기엔 양곤이 쉽게 마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양곤 전체가 아직 지난밤의 끝자락에 덮여있는 새벽 5시,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는 쉐다곤 파고다를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한다. 눈길은 여전히 쉐다곤을 떠나지 못한 채 매달리고 있는데 버스는 이런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둑한 시내를 무심하게 내달려 양곤 공항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우리처럼 새벽밥을 챙겨먹고 부지런히 길을 나선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공항은 한 낮처럼 북적인다. 양곤에서 출발하는 미얀마 국내선 비행기는 바간, 만들레이, 껄로 등을 차례로 거친 후 다시 양곤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순환 노선으로 운행된다. 하루 동안 이렇게 전국을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반대 방향으로 다시 한 번 돌아야 하니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탑승 확인을 하고 나니 어깨에 스티커 한 장을 붙여준다. 미얀마 국내선을 운영하는 4개의 항공사가 모두 양곤에서 출발하는데 시간이나 탑승장 등이 수시로 바뀌다보니 헛갈리는 승객들을 위해 항공사 측에서 이렇게 스티커를 붙여 자신들의 승객을 구분하는 것이다.
양곤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20분 정도를 가볍게 날며 하늘에서 맞는 일출의 장엄함을 창밖으로 보여준 후 바간 공항에 내려선다.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아직은 열기를 머금지 않은 상쾌한 아침 공기가 바간의 첫 인상을 ‘쿨’하게 만들어준다.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두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과 더불어 세계 3대 불교유적지로 손꼽히는 바간은 42㎢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에 세워진 고대 도시다. 우리의 경주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처럼 하나의 도시 그대로가 유적인 곳이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적이다 보니 특정 사원이나 파고다를 들어가기 위해 입장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바간 도착과 동시에 공항에서 ‘지역 입장료’를 내야 한다. 또한 수 천 개의 파고다와 사원이 흩어져 있는 도시를 둘러보기기 위해 렌터카나 마차 등 적절한 교통수단 선택이 필수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이 고대의 도시를 천천히 훑어보며 다니는 것도 꽤 매력적이다.

자발적 동참으로 일군 신심의 결정체

 
아노라타왕이 건립한 쉐지곤 파고다. 부처님의 머리뼈 사리와 모조 치아 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거대한 유적이 마음을 끄는 이유는 ‘피 냄새’가 없는 순수한 신심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남긴 거대한 문화유산의 태반은 정복자, 또는 권력자가 무력과 절대 권력을 이용해 피정복민이나 피지배층을 동원하고 착취해 조성한 정복과 권력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두르, 캄보디아 앙코르,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 등 인류의 웅대한 건축 유적 속에는 규모에 비례하는 양의 피와 땀, 강제노동과 희생의 역사가 서려있다. 그러기에 장엄한 유적의 모습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 조성 과정에서 스러져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한숨과 고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간에서 만큼은 그 같은 피의 역사가 뿜어내는 비릿한 안타까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바간의 수많은 파고다들은 정복당한 민족의 원한과 강제 동원된 힘없는 민중의 한숨이 아닌 신심을 간직한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파고다 아래에는 상륜부의 그림자가 비치는 물구멍이 있다.

파고다 세우는 일이 현세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공덕이라 여기는 미얀마인들은 바간에 대규모 파고다 불사가 벌어질 때마다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몰려들어 불사에 동참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닿는 만큼 기꺼이 불사에 동참한 미얀마인들의 불심과 자부심이 만들어낸 유적. 그것이 바로 바간의 오늘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역사인 동시에 인류가 자랑할 만한 진정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바간을 손꼽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바간은 사람이 살았던 도시라기보다는 파고다와 사원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보다 파고다와 사원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도 유적보호를 위해 인근 뉴 바간 지역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에 올드 바간으로 불리는 이 고대도시는 한산하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바간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1044년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인 바간 왕조를 연 아노라타왕이 이라와디 강 동쪽 연안인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부터다. 아노라타왕은 앙코르 왕조에 의해 미얀마 지역으로 밀려나있던 몬 족을 원조해서 캄보디아 군을 몰아낸 후 1044년 바간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후 북부의 라카잉, 남부의 타톤 왕조를 복속시켜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일으키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처럼 정복자의 기질이 다분했던 아노라타왕이 불교에 귀의 한 것은 북벌을 마친 직후, 남부 타톤 왕국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바간을 찾아온 담마다사 스님과 만난 이후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불을 숭배하는 토속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 삭발하고 가사를 걸친 스님의 등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담마다사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전하기 위해 이 지역에 왔다는 말을 들은 한 사냥꾼은 아노라타왕에게 이를 전했고 수행자에게 관심이 많았던 아노라타왕은 담마다사 스님을 왕궁으로 초대했다.

담마다사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아노라타왕은 곧바로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도의 아쇼카왕처럼 미얀마 전역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특히 경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왕은 이웃나라를 정벌해가면서까지 경전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담마다사 스님은 이후 ‘깨달은 장로’라는 존경의 의미가 담긴 ‘신아라한 스님’으로 불려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파고다들이 밀집해 있는 올드 바간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이라와디 강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쉐지곤파고다는 불법의 수호자임을 자청했던 아노라타왕이 세운 파고다로 그 규모나 화려함에서 당시 아노라타왕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쉐지곤파고다는 ‘황금 모래 언덕의 파고다’라는 뜻인데 파고다 아래에는 부처님의 머리뼈사리와 모조 치아 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이 모조 치아사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것으로 4개의 모조치아사리를 코끼리 등에 얹어 각각 4개의 방향으로 보낸 후 코끼리가 멈추는 곳에 봉안하기로 했는데 그 중 북쪽으로 향한 코끼리가 멈춘 곳에 세운 파고다가 바로 쉐지곤이다.

코끼리 멈춘 곳에 사리탑 세워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수 있는 냥우 재래시장. 날씨가 더운 미얀마의 특성상 아침 일찍 시장이 열린다.

바간의 파고다들이 대부분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지어진데 비해 쉐지곤파고다는 사암을 깎아 쌓아서 만들었다. 일일이 바위를 깎아 만들려다보니 조성 기간도 오래 걸려 아노라타왕 때 시작된 파고다 조성불사는 미완으로 남아 있다가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짱짓따왕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한다.

파고다 전체를 금으로 치장해 놓은 미얀마의 쉐지곤을 접하니 비로소 ‘황금의 땅’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지금도 4년에 한 번씩 개금을 새로 하는데 그래서인지 파고다는 천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말쑥하고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개금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파고다의 꼭대기에는 금종과 각종 보석들로 장식한 일산 모양의 상륜부를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이 상륜부는 단순한 장식적 효과 외에도 특별한 임무를 갖고 있다.

바로 외침을 당했을 때 침략자들이 보물을 찾기 위해 파고다를 훼손하는 대신 이 장식을 떼어가는 것으로 만족해 달라는 의미에서 마련해 놓은 것이라 하니 부처님의 사리와 파고다를 지키려는 미얀마 국민들의 신심이 이미 천 년 전부터 이처럼 견고했음을 보여주는 듯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쉐지곤파고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되는 이유는 또 하나있다. 파고다 아래 바닥에는 야구공만한 홈이 파여 있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속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물위로 파고다의 꼭대기가 비춰지기 때문이란다. 이 홈은 원래 왕이 파고다 꼭대기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기 편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탑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호수를 바라봤다는 아사녀의 전설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한참동안 파고다의 그림자를 찾아본다. 옛 사람들의 기발한 발상이 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파고다 어디쯤에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돼 있는지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만큼 파고다의 규모는 크다. 그러니 파고다가 조성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그 안에 모셨다는 사리를 직접 보지 못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조금 더 짓궂게 마음을 쓴다면 과연 저 아래 진짜 사리가 모셔져있기는 할지 의심해봄직도 하다.

하지만 이곳 바간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탐착하는 이런 의구심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천 년 전 파고다 불사에 참여했던 이름 없는 민중들은 탑의 어느 곳에도 자신의 이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저 많은 파고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작은 벽돌을 손수 만들고 쌓아올리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신심의 표현인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붓다와 조우하는 환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번쩍이는 황금으로 단장된 유명한 사원이나 벽화로 곱게 단장한 화려한 사원이 굳이 아니라도 좋다. 먼지가 이는 메마른 땅에서 황량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탑이라도 마냥 쓸쓸하거나 처량하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천 년 전 그날처럼 이 땅의 많은 민초들은 여전히 거친 손으로 흙을 빚고 돌을 쌓아 파고다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숨 쉬고 있는 각자의 부처를 찾는 이름 없는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탑의 나라 바간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미얀마=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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