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이야기] 보시했다는 마음마저 없어야 진정한 보시
[금강경 이야기] 보시했다는 마음마저 없어야 진정한 보시
  • 법보신문
  • 승인 2010.06.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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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바 있는 보시, 과보 다하면 삼도 떨어져
상에 머물지 않아야 복덕이 시방 허공과 같아
부처님 말씀 따라 색에 머물지 않으면 곧 보살

4. 집착 없는 보시(妙行無住分)

 
흐드러지게 핀 벗꽃 사이로 바라본 기림사 전경.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서북방, 사이사이, 아래 위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여! 보살은 반드시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한다.”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佛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佛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중생들이 보시(布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몸의 단정함(身相端嚴)이나 오욕쾌락(五欲快樂)을 바라는 마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법당을 깨끗이 청소하면 얼굴이 예뻐진다더라. 또는 열심히 절을 하면 건강해진다더라. 보시를 하면서 갖는 이런 마음이 바로 몸의 단정함, 즉 아름다운 외모를 위한 보시입니다. 그러면 오욕(五欲)의 쾌락(快樂)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반드시 무언가를 바라고 구합니다. 대개 우리의 욕망을 연장시키는 것들입니다. 많은 재물이 생기기를 바라고, 합격을 원하고, 수명장수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오욕의 쾌락입니다.

몸의 단정함과 오욕의 쾌락을 바라는 이런 보시는 그 과보가 다하면 다시 삼도에 떨어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시를 하지 않았던 과거와 하등이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까닭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를 했다는 마음마저 없는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 몸의 단정함과 오욕쾌락을 구하지 않는 자비, 즉 내 것을 아끼고 탐하는 인색한 마음(慳貪心)을 깨뜨려 모든 이웃들을 이익 되게 하는 자비를 제대로 된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부주색 보시(不住色 布施)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상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 또한 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복덕이 시방 허공과 같아서 가히 비교하고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일설(一說)에 보시의 보(布)는 넓다는 뜻이고, 시(施)는 흩어버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능히 가슴 속에 망념(妄念)과 습기(習氣)와 번뇌(煩惱)를 흩어버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네 가지 상(相)을 끊어 없애 마음에 쌓아 두지 않는 것이 참된 보시라는 말입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나라는 생각이나 너라는 생각, 잘났다는 생각 등 이런 마음을 모두 벗어버린 것이 보시입니다.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고 도와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그러나 참된 보시는 내가 갖고 있는 망상과 번뇌 이런 것을 모두 없애 가슴에 쌓아두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을 싹 비우는 것, 이것이 참된 보시라는 설명입니다.

보시의 보에는 널리 미치다의 뜻도 있습니다. 이는 육진(六塵)의 경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귀에 들리는 소리에 끌려가지 않는 것, 이것이 보시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는 유루(有漏) 분별치 않고 오직 청정한데로 돌이켜서 만법이 공적함을 확실히 아는 것이 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하면 오직 업장만이 증진될 뿐입니다.

따라서 안으로 탐애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과 밖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 한량없는 복을 얻게 됩니다. 보시는 안으로는 내 잘못된 생각을 조금씩 제거하고 밖으로는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돕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과 밖에서 보시가 함께 실천돼야 공덕이 됩니다. 절에 가서 시주하면 공덕이 쌓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덕이 공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그 허물을 보지 말며 마음에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을 일러서 상(相)을 떠난 것이라 말합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해서 마음의 주관과 객관이라는 능소(能所)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선법(善法)입니다. 능소는 부연하면 나와 너를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에 능소를 가지고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으며, 이를 제거하지 못하면 마침내 해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각과 생각이 항상 반야의 지혜를 실천해야만 그 복이 한량없고 또한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사람과 천신(天神)이 함께 공경하고 공양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복덕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로 일체 생명을 널리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도 없으며 표현할 길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의 궁극적인 행위는 모든 생명을 공경하는데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공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낮춰야 합니다. 잘났다. 더 가졌다. 배웠다는 아만 내지는 분별의 마음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서는 다른 생명을 진정으로 공경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남에게 무엇인가 주는 것만을 보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훌륭한 보시입니다. 우리에게 입이 하나만 달린데 비해 귀가 두 개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을 적게 하고 많이 들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주상 보시를 해서 얻은 공덕은 사량(思量)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동쪽 허공으로써 비유를 했습니다. 수보리 존자에게 질문을 하시되 동쪽 허공을 가히 사량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라고 대답합니다. 동방 허공을 사량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허공은 그 끝이 없어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 또한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끝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가운데 허공보다 큰 것이 없고 일체의 성질 가운데 불성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무릇 형상 있다고 하면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크다고 말 할 없습니다. 그러나 허공은 형상이 없는 까닭에 크다고 하는 것이며 일체의 모든 성질은 한량, 즉 크기가 있어 크다고 할 수 없지만 불성은 한량이 없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텅 빈 허공 어디에 동서남북이 있겠습니까. 만약 동서남북이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모순에 처한 것입니다. 허공에 동서남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임의로 정했을 뿐입니다. 불성에도 또한 본래 사상(四相)이 없습니다. 만약 불성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사상의 모습을 본다면 그것은 불성이 아니라 중생의 상입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성 속에 잘못된 것만 나타나고 좋은 것은 가려져 버리니 사상으로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불성이 불성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흐린 날 밝은 햇볕이 구름에 가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상이 있으면 불성이라 이름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른바 모습에 집착해서 보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망심(妄心) 가운데 동서남북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이치에서 따져보면 어찌 있겠습니까. 이른바 동서남북이라고 하는 것이 참이 아닌데 하물며 남북이 어찌 다르겠냐 하는 것입니다. 자성이 본래 텅 비어 있고 서로 섞이어 분별이 없는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분별을 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가르침과 같이 머물러야 한다고 할 때 응(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에 순종해 따른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가르침을 수순해서 부주상보시하면 그것이 곧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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