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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 미얀마] 5.꽁바웅 왕조의 마지막 수도 만들레이

기자명 법보신문

옛 왕국의 哀史와 젊은 활기가 공존하는 도시

 
하녀의 시중을 받고 있는 옛 꽁바웅 왕조의 공주들.

책을 한 권 샀다. 『버마 사진 여행 1855~1925』. 버마의 마지막 왕조인 꽁바웅 왕조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1885년을 전후해 촬영된 사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길거리 노점상의 수레위에서 발견한 책은 오래 동안 팔리지 않았는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메케한 곰팡내를 풍긴다. 책 먼지 때문에 잔기침이 계속 나오지만 누렇게 빛바랜 사진 속 옛 미얀마의 모습은 도저히 책을 덮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표현된 사진, 그나마도 빛이 바래 황토 빛을 띠고 군데군데 얼룩도 있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화려했던 시절의 영화를 덮어버리기에는 그 빛이 너무도 찬란했다. 섬세하게 장식된 웅장한 궁전, 비단옷과 갖가지 장신구로 한껏 치장한 귀족들, 물론 그 속에는 소달구지를 끌고 강가에서 물을 긷는 소박한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도 담겨있다.

그 가운데 어여쁜 두 소녀의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버마의 공주들’이라는 제목 옆에는 ‘하녀의 시중을 받고 있는 공주와 그녀의 동생’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공주들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1879년 궁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처럼 높은 서열은 아닌 듯 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순간, 가슴 속으로 휙 소리를 내며 헛헛한 바람이 지나간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국 공주의 삶이란 것이 얼마만큼 가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고종황제의 막내딸이었던 덕혜 옹주라는 아픈 상처를 통해 가늠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꽁바웅 왕조의 이 어린 공주들의 삶 또한 그와 같았을까. 왕조가 멸망한 후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화려했던 왕조의 사진은 어느새 찬란해서 더한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옛 꽁바웅 왕조의 수도 만들레이로 향하는 하늘 길도 왠지 더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라와디강 동쪽 퇴적지대에 펼쳐져있는 만들레이는 미얀마 제2의 도시다. 양곤이 정치 경제의 중심이고 네삐도가 행정의 중심이라면 만들레이는 단연코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다.
만들레이가 특히 종교의 중심지로 손꼽히는 이유는 2500여 년 전 붓다께서 그의 제자 아난존자와 함께 지금의 만들레이 언덕에 다녀갔다는 매력적인 전설 때문이다. 붓다는 만들레이언덕에서 지금의 도시 자리를 가리키며 “내가 죽은 후 2400년이 지나면 이곳은 위대한 왕조의 수도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셨다고 한다. 미얀마인들에게 만들레이 언덕은 붓다의 흔적이 서려있는 성지로 지금까지도 손꼽히고 있다. 더불어 붓다가 수기한 도시 만들레이가 미얀마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전설에 의지하지 않고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하더라도 만들레이는 여전히 매력적인 도시다. 이곳이 지금과 같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57년 민돈 왕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면서다. 이후 미얀마를 식민통치한 영국이 이곳에 서양식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면서 만들레이는 고대와 현대, 유럽과 동아시아가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의 도시가 되었다.

요새 같던 성은 15일 만에 함락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만들레이성은 영국군의 요새로 사용됐다. 사진은 1890년 촬영한 영국군 장교와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대의 사열 모습.

옛 왕조의 수도로서 만들레이의 역사는 만들레이성에서부터 시작되고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들레이성은 19세기 유럽 열강 제국주의의 상흔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애잔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미얀마에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은 바간 왕조에 이은 두 번째 통일왕조였던 따웅우 왕조를 남부 몬족을 앞세워 1752년 멸망시켰다. 그러나 1755년 버마족의 세 번째 왕조인 꽁바웅 왕조가 일어나면서 버마족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는다. 꽁바웅 왕조는 태국지역의 아유타야를 침공해 멸망시키고 서부의 여카인 주를 정벌해 영토를 넓혔다. 또 통신, 법체계 등을 정비하는 등 세련된 통치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접어들면서 영국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됐다. 1824년과 1852년 발생한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은 사실상 영국의 승리였다. 영국은 왕국의 남부 지역 대다수를 장악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민돈왕은 아마라뿌라보다 북부에 위치해 있던 만들레이로의 천도를 결심한다.

물론 그 같은 결정에는 2400년 전 ‘위대한 왕조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붓다의 수기도 한 몫 했으리라. 붓다의 약속이 서려있는 만들레이를 중심으로 국민들을 단결시키고 불법을 융성시켜 옛 버마족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려는 포부. 왕은 백성들을 독려해 1857년부터 5년 동안 만들레이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를 추진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왕궁, 즉 성의 건설이었다. 민돈왕 스스로가 인근 사원에 머물며 공사를 감독했을 정도로 공을 들인 만들레이성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성벽은 한 쪽 면의 길이가 3킬로미터에 달하는 정사각형 형태로 높이는 8미터, 성벽의 두께는 무려 3미터에 이른다. 성 밖은 폭50미터, 수심3미터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완성된 만들레이성은 성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요새에 가까웠다. 그만큼 미얀마를 향한 외세의 침략은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왕이 축성 공사에 그처럼 공을 들인 이유도, 만들레이성벽이 그처럼 높으며 해자까지 감싸고 있는 이유도 외세, 바로 영국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878년 민돈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띠보왕은 그 천성이 유약했을 뿐더러 권력 쟁탈을 둘러싸고 극에 달해 있던 왕실 내의 암투로 인해 왕의 권위를 찾아보기 힘든 불운한 왕이었다. 왕실의 혼란과 그로인한 국력의 쇠약을 틈타 영국군은 티보왕에게 미얀마 전체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권을 요구했고 무능력했던 왕은 영국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회신했다. 그러나 이미 무력정복을 목표로 세운 영국군은 만들레이를 향해 거침없는 진격을 시작했다. 띠보왕은 무조건항복을 선언하며 만들레이성의 문을 스스로 열고 말았다. 요새처럼 견고해 보이던 성과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해자는 수도를 이전한지 30여년도 채 되지 않았던 1885년, 영국군이 만들레이로 진격을 시작한지 불과 15일 만에 영국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후 체포된 띠보왕은 이라와디강변에서 밤배에 실려 오지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꽁바웅 왕조는 마지막 왕의 역사를 기록한 채 막을 내렸다. 아마도 사진 속 어린 공주들의 운명 역시 왕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검붉은 성벽의 만들레이성과 성을 둘러싸고 흐르는 해자. 해자의 물은 비교적 맑고 깨끗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왕조가 망하며 만들레이성도 그 운명을 같이했다. 왕족이 떠난 왕궁은 영국군의 요새로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시 일본군의 남방사령부가 되어 군대가 주둔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3월 20일 패퇴하던 일본군대가 왕궁에 불을 질러 거의 모든 목재건물이 화염 속에 사라졌다. 불과 100여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휘몰아쳤던 영욕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옛 왕조의 흔적도, 식민의 역사도 함께 그 끝을 고한 것이다.

지금 만들레이성 안에 남아있는 몇몇 건물들은 최근 들어 정부가 왕의 집무실과 전망대 등을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왕궁 지붕을 함석판으로 복구하는 등 졸속으로 진행돼 화려했던 흔적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성안을 가득 채우던 전각들이 사라진 자리는 휑하니 비워져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옛 왕조의 수도를 방문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첫 걸음에 둘러봐야할 만들레이성은 관광 순위에서도 멀찍이 밀리곤 한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성 밖에서 성벽과 해자, 그리고 성벽 위에 도열하듯 서있는 성루를 바라보는 것으로 후딱 마무리 짓는다.

영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파놓은 해자는 그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이들의 데이트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해자의 맑은 물이 실어다 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쌍쌍이 자리 잡고 있는 연인들을 바라보니 이곳이 미얀마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지경이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미얀마, 그리고 만들레이다. 도심 한 복판 도로에 갑자기 한 무리의 행렬이 지나간다. 줄지어가는 픽업트럭들이다. 트럭 뒤에 탄 어른은 금빛 양산을 받쳐 들고 있는데 그 우산 아래에는 마치 만들레이성에 살던 왕자라도 되는 듯 화려하게 치장한 10대의 소년들이 앉아있다. 그 뒤로 줄줄이 이어지는 트럭에도 모두 마찬가지다. 네, 다섯 대의 트럭 뒤로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잔뜩 태운 승합차와 트럭 등이 꼬리를 문다. 단기출가를 위해 사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이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버스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창밖으로 뛰어내릴 듯 고정돼 버렸다. 이들의 모습을 놓칠세라 미처 창문도 열지 않은 채 성급히 촬영했음을 알아차린 것은 행렬이 다 지나가고 나서다.

동-서양, 과거-현재가 어우러진 거리

 
단기출가를 위해 사원으로 향하는 소년들. 가족들은 소년을 차에 태우고 거리를 행진하며 기쁨을 표현한다.

머릿속이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아득한 전설, 사라진 왕조, 비운의 공주 등 꿈결 같은 이야기 속을 헤매며 꿈을 꾸다 깬 기분이다. 마치 거대한 용처럼 도시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만들레이성의 검붉은 성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당하다. 아름답다. 성벽과 성루 어디에도 슬픔은 없다. 이 도시에서 전설 같이 애잔한 이야기만 떠올리고 있다가는 조잡하게 복원된 왕궁을 손가락질하며 실현되지 못한 붓다의 수기에 실망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보다 먼저 가슴을 때린다.

여행안내책자들은 종종 만들레이를 사가잉이나 아마라뿌라, 잉와, 밍군 등 주변의 다른 유적기로 가기 위한 출발지 정도로만 소개하곤 한다. 만들레이 자체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복궁이나 경주의 불국사처럼 잘 보존 되고 정비돼 있는 유적을 기대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옛것이 아닌 지금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한다면 만들레이 만큼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도시도 많지 않다. 미얀마 사람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사원 중의 하나인 마하무니파고다의 살아있는 신심이 있고, 200여 년 전 승가에게 공양된 우뻬인 다리가 건재해 있다. 1000여 명의 수행자가 함께 수행하는 마하간다용 사원도 만들레이에 있다. 미완의 탑으로 남아있는 거대한 밍군대탑으로의 순례도 이곳 만들레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가하면 도심 한 복판에는 여러 개의 십자가를 올린 중세 유럽의 고딕풍 양식 교회 건물이 버티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해가 지고 난 후 만들레이의 얼굴은 180도 바뀐다. 젊은이들은 오토바이를 몰며 도시 곳곳을 우르르 몰려다닌다. 흡사 우리나라의 폭주족 같다. 만들레이성 주변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리는 더운 낮 동안의 무기력함에서 깨어난 듯 술렁인다. 변화의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너무 과장일까.

하지만 150여년 남짓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을 낳고 변화를 거듭해온 이 도시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갈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저명한 사원과 스님들을 배출하고 있는 만들레이 지역 불교가 미얀마 불교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그 한계점을 가늠키가 쉽지 않다.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애잔한 과거,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만들레이 순례는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시간여행의 짜릿한 첫 맛을 선사하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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