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이야기]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은 없다
[금강경 이야기]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은 없다
  • 법보신문
  • 승인 2010.08.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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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은 중생 근기에 따른 방편일 뿐
문자·자구 집착 말고 뜻 이해해야
깨달음은 관조이며 관조가 곧 지혜
 
경주 안압지 인근에서 산보를 하고 있는 종광 스님.

7. 깨침과 설법이 없음(無得無設分)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들이 다 무위법 속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무득무설(無得無設)은 얻은 바도 설한 바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는 깨침과 설법이 없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득(無得)은 진리를 얻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만 한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무설(無說)은 깨달음이나 진리에 대해 단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모습을 떠난 참 진리는 우리의 감각이나 생각으로 인식할 수 없고 또한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깨우침도 없고 설한 바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바른 깨달음, 혹은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구별하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하는 분별의 마음을 제거하면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래께서는 병에 따라 약을 쓰고, 마땅한 바를 좇아 법을 설합니다. 그러니 어찌 정해진 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만이 진리가 되고 그 외에는 전부 진리가 아닌 것이 될까요. 누가 어떤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 외의 것들이 모두 그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우리 중생들이 다만 잘못된 주관을 가지고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 이것은 맞다, 저것은 틀렸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평소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정으로 옳은 것이었습니까. 처음에 가졌던 확신이 끝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느꼈겠지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의 태반이 그른 것이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환경에 따라 위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정되어진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위없는 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본래 얻을 것이 없으며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의 소견들이 같지 않기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가지가지 방편으로 이끌어서 교화해 모든 집착을 끊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일체 중생의 망심은 끊임없이 생멸(生滅)해 그치지 않아서 경계를 따라 요동을 치는데 앞생각이 일어날 때 뒷생각이 이를 바로 깨달으면, 깨달음도 이미 머물지 않음으로 견해 또한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비유하면 경전의 말씀도, 여래의 가르침도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습니다. 강을 건너면 당연히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강을 건넜는데 뗏목을 등에 지고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여러 가르침도 중생적인 잘못된 생각들을 끊어 내재해 있는 부처가 현현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재해 있는 부처가 현현했다면 수단인 경전의 말씀 또한 당연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정해진 법이 있어서 설법을 했겠느냐고 여래께서는 묻고 계신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뜻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는 다양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아(阿)는 마음에 망념(妄念)이 없다는 것이고 뇩다라(耨多羅)는 마음에 교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삼(三)은 항상 정정(正定)의 삼매(三昧)에 있다는 의미이고 먁(藐)은 마음이 바른 지혜에 머물러 있음을, 삼보리(三菩提)는 마음이 공적(空寂)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일념(一念), 즉 한 생각에 범부의 마음을 다 제거하면 바로 불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정해져 있는 법도 없고,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말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정법(無定法)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해진 어떤 법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이 여래께서 설하신 문자나 자구(字句)에 집착을 해서 무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게 지혜를 낼까 두려워 수보리에게 불가취(不可取), 즉 얻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전의 내용이나 말씀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집착을 할까봐 그것 또한 취할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께서는 가지가지 중생을 교화할 때 그들의 근기에 따라 대응하고 그들의 수용 능력을 살펴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따라서 설하신 바에 어떤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다만 배우는 사람들이 여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교법(敎法)만 외우고 본심을 깨닫지 못해 마침내 성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가 불가설(不可說), 즉 말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이 아닌 것이요.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해서 마침내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곧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

경전의 말씀에 집착하지 말고 경전의 가르침대로 실천해서 내재해 있는 불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길입니다. 산은 높아야 되고 계곡은 깊어야 합니다. 산과 계곡이 모두 평평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산도 없고 계곡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중생 자리에서 중생다워야 하고 부처는 부처 자리에서 부처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패랭이꽃이 장미꽃과 같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패랭이꽃은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듯이 우리의 불성의 현현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입니다. 법이 아니면서도 법 아님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들이 다 무위법 속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삼승(三乘)의 근기에 따라 이해하는 능력이 같지 않아서, 같은 말을 듣고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바가 다른 까닭에, 얕고 깊음의 차이가 생겨 이를 일러 차별(差別)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무엇을 봐도 생각이 다 다릅니다. 자기가 아는 만큼 보고 듣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명해 줘도 소용없어요. 자기의 근기를 벗어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내면이 맑아진 만큼 보이고 자기 눈이 떠진 만큼 보이는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삼승의 근기에 따라 이해하는 능력이 같지 않아서, 같은 말을 듣고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바가 다른 까닭에, 얕고 깊음의 차이가 생겨 이를 일러 차별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무위법(無爲法)인데 무위법은 무주(無住)입니다. 곧 머무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머무름이 없기에 곧 무상(無相)입니다. 상이 없다는 말이지요.

무상이 무엇입니까. 여래께서는 앞서 『금강경』 사구게(四句揭)를 통해 거듭거듭 말씀 하셨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신체적 특징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것이 무상입니다. 무상은 또 무기(無起)입니다. 일어남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어남이 없으니 소멸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멸(無滅)입니다. 이렇게 텅 비어 일체가 공하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가지런히 거둬 들여서 보고 깨달음에 걸림이 없는 것을 해탈의 불성이라 합니다. 여래는 본디 깨달음이며 깨달음은 또한 관조(觀照), 즉 조용히 비추어 봄입니다. 또 관조는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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